1. 문화
[2484호] 2017.11.27
관련 연재물

[정여울의 도시 이야기] 오슬로

뭉크와 피오르드, 그리고 고요한 내면으로의 여행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 오슬로 시청사 내부를 관람하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오래전 웅장한 건축물과 위대한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나의 여행은 점점 ‘실내공간에서 실외공간으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하고 있다. 정원, 공원, 그리고 숲을 향한 매혹은 인공의 예술 작품이나 화려한 건축물에 대한 불타는 호기심보다 훨씬 잔잔하고 여유롭게 찾아왔다. 느긋함이나 ‘쉬엄쉬엄’이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에게 정원과 공원, 그리고 숲과 산은 오직 자연만이 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가르쳐주었다. 특히 과거에는 개인의 사적 공간이었지만 현재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예술가의 정원들(로댕의 정원, 모네의 정원, 헤세의 정원 등), 자연의 호흡과 예술가의 정신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공원들(헬싱키의 시벨리우스공원, 오슬로의 비겔란공원 등)은 힘들 때마다 사진을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는 내면의 장소가 되었다.
   
   오슬로는 노르웨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피오르드 여행의 출발점으로도 유명하지만 해마다 노벨평화상이 수여되는 오슬로 시청사, ‘인형의 집’으로 페미니즘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헨리 입센의 국립극장, 그리고 뭉크의 그림과 비겔란공원으로도 유명하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발하면 기차로 5시간30분, 버스로 8시간, 승용차로 6시간30분 정도 거리에 오슬로가 있다.
   
   오슬로의 상징이자 행정적 중심으로도 유명하지만 해마다 노벨 평화상 수상식이 열리는 장소로 더욱 유명한 곳이 바로 오슬로 시청사다. 노벨평화상을 제외한 모든 부문의 수상식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리고 오직 평화상만이 노벨의 유언에 따라 오슬로에서 수여된다고 한다. 시청사 앞에는 오슬로의 상징인 백조를 형상화한 아름다운 분수가 가로놓여 있고 강가를 산책하거나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시청사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여행자들을 반기는 것은 바로 거대한 벽화들의 퍼레이드다. 벽화들 앞에 앉아 반대쪽 벽화를 바라보며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 뭉크의 작품 ‘라이프(Life)’가 전시된 2층 ‘뭉크의 방’, 마치 야외 놀이터인 듯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로 가득한 시청사 내부는 의외로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야외 광장과 우아한 미술관을 한곳에 합쳐 놓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외적인 느낌과 실내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 배치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광장처럼 여기저기 자유롭게 거닐어도 보고 미술관처럼 가만히 앉아 그림을 감상하기도 해보니 바로 그런 ‘실외’와 ‘실내’의 평화로운 공존의 느낌이 이 장소의 매력임을 알 수 있었다.
   
   오슬로 시청사 앞을 걸어 나오면 극작가 헨리 입센의 동상이 서 있는 국립극장의 모습이 보인다. 2017년 여름 오슬로의 국립극장은 공사 중이었지만 헨리 입센의 동상만은 여전히 비바람에 풍화된 모습 그대로 의연히 거기 있었다. 입센의 동상을 보니 ‘인형의 집’ 중 한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 가정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는 ‘가정의 천사’ 역할에 만족하는 척 스스로 완벽한 연기를 하며 살아왔던 노라. 노라는 언제든지 남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왔지만, 정작 남편은 자신을 향해 그만큼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절망한다. 남편은 그녀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인형처럼 느껴질 때만 ‘완벽한 아내’로 대했고 아내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왠지 예측불가능한 존재가 될 때마다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노라가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싸늘하게 등을 돌리는 남편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내 결혼의 진정한 좌표’를 깨닫는 모습은 언제 다시 읽어도 소름이 돋는다.
   
   낭만적이지만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남편의 그늘 아래 항상 완벽하고 행복해 보였던 노라가 사실은 ‘행복한 척 연기를 해왔던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이다.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오슬로의 국립극장은 입센 연극이 가장 많이 상연되는 장소로서 노르웨이 공연문화의 메카 역할을 해왔는데 ‘인형의 집’과 ‘민중의 적’ ‘유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입센 작품이 이곳 국립극장에서 상연되었다.
   
   
▲ 비겔란공원 전경

▲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 ‘남과 여’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뭉크의 집대성
   
   ‘그곳에 가면 뭉크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가슴 설레던 장소가 바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다. 뭉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둘러싼 천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삶이 끝날 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질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은 마치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삼총사처럼 뭉크를 따라다녔고 뭉크는 평생 그 고통에 시달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병과 광기, 죽음이야말로 뭉크의 예술을 창조해낸 원동력이기도 했다. 물론 뭉크 자신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고통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할 수는 없었겠지만, 뭉크의 주변에는 유난히 질병과 광증을 앓는 사람이 많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 누이, 아버지가 차례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고 살아남은 다른 누이와 그 자신도 병약했으며 우울증이 심각했다. 질병, 광기, 죽음은 항상 그의 가족 곁을 드리우고 있는 옅은 안개처럼 사라질 줄 몰랐지만, 그는 그 사라지지 않는 우울과 무기력의 안개를 뚫고 불굴의 의지로 수많은 걸작을 쏟아냈다.
   
   노르웨이의 1000크로네 지폐에도 새겨져 있는 뭉크의 실제 얼굴보다도 우리는 ‘절규’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통해 뭉크를 더욱 친근하게 느낀다.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얼굴인데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묘한 친근감이 들어 온갖 분장과 코스프레의 도구로도 잘 활용되는 ‘절규’의 얼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절규’는 마치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그 장소 자체의 아이콘이기 때문에 워낙 사람들이 많아 기념촬영을 하기조차 어렵다.
   
   나는 기념촬영 같은 것은 포기하고 ‘절규’ ‘마돈나’ ‘사춘기’ 등 뭉크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언제나 감상할 수 있는 오슬로 사람들의 행운을 마음껏 즐겨 보기로 했다. 책에서 볼 때마다 훨씬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살아 숨 쉬는 그림은 ‘절규’보다도 오히려 ‘마돈나’와 ‘사춘기’, 그리고 ‘생의 춤’ 등의 작품이었다. 성모 마리아를 인자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상이 아니라 도발적이고도 관능적인 여성으로 묘사한 ‘마돈나’,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눈부시게 포착해낸 ‘사춘기’,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춤을 추면서도 그 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군상들을 그린 ‘생의 춤’. 이 모든 작품들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한데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한 흥분감을 안겨주었다.
   
   뭉크는 자신을 시시각각 죄어오는 죽음과 우울의 그림자, 그리고 당시로서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던 독특한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견뎌야 했던 온갖 수모와 모욕감을 잘 참아내고 마침내 ‘예술가의 방’이라는 베이스캠프를 지켜냄으로써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내면의 공간을 창조해냈다. 그는 자신에게 걱정과 질병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온갖 걱정과 질병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치 사다리 없는 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고통은 그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하는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고통을 통해 그는 살아있음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을 통해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아프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우리 자신의 꾸밈없는 모습임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공포와 불안이라는 힘겨운 감정에 일찍이 이토록 몰입하고 집중하여 하나의 오롯한 세계를 구축한 작가는 없었다. 잠시 잠깐 작품의 주제가 될 수는 있지만 화가의 인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로서 공포와 불안이 테마가 된 것이야말로 뭉크의 기념비적 성격일 것이다. 그는 공포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했다. 불안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울 속에서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정직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반드시 인간의 마음과 몸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는 사실이었다.
   
   그 공포와 불안 밑바닥에는 삶에서 한 번도 ‘안정된 믿음의 진지’를 구축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들이 일찍 죽음으로 인해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편안함이나 안정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는데, 그는 연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마저도 안정감이나 평화로움보다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그의 첫사랑이었던 여인은 뭉크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고 끝없이 다른 연인을 찾았고, 두 번째 연인은 뭉크에게 심하게 집착하여 자살극까지 벌였으며 뭉크는 여인의 자살을 말리다가 자신 또한 손가락에 상처를 입기까지 한다. 아버지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이고, 아들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그에게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뭉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런 불행한 사건들의 연속이 뭉크에게 ‘지속적인 관계 맺음’에 대한 불신과 ‘사랑’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나는 뭉크의 ‘생의 춤’을 바라보며 그가 사랑에 대해 느낀 심각한 불안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뭉크는 색채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색채는 캔버스에 칠해지고 나서야 그 자신의 고유한 삶을 뚜렷하게 살기 시작한다.”
   
   뭉크는 캔버스에 칠해져 다른 색과 어우러지고 스며드는 색채, 캔버스에 칠해지며 뭉개지고 으깨지는 물감의 번짐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숨 쉬기 시작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뭉크는 색채 속에서 조화와 어우러짐을 보았다.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어떤 색채들은 그저 서로 충돌하고 부딪치기만 하지만, 어떤 색채들은 서로 대화를 하며 타협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뭉크는 공포와 불안으로 자기 안에 침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 공포와 불안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어우러짐의 창구를 발견한 것이다.
   
   
▲ 백조의 분수가 보이는 오슬로 시청사 앞.

▲ ‘인형의 집’의 작가 헨리 입센 동상

   예술가의 유토피아, 비겔란공원
   
   비겔란공원은 한 사람의 예술가가 만든 조각공원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조각공원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공원은 작가 비겔란의 유언에 따라 365일 전 세계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이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려 200개가 넘는 대형 조각상들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조각상 하나하나에 정겨운 이야기와 독특한 개성이 넘쳐흐르고 있어 하나하나 감상하는 몸짓이 마치 ‘내가 알고 싶은 진짜 사람’을 한 명 한 명 만나는 듯 반갑고 설렌다. 비겔란은 조각상만 만든 것이 아니라 공원의 디자인과 건축 설계에도 참여했다.
   
   구스타브 비겔란은 1924년에서 1943년 사이 무려 20년에 걸쳐 이 장대한 야외 조각 컬렉션을 완성해냈다. 한 사람에게 이토록 오랜 시간 이렇게 광활한 공간을 창조성의 실험공간으로 내어줄 수 있는 오슬로 사람들의 과감함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부러웠다. 한정된 돈과 짧은 시간을 선심 쓰듯 내어주면서 예술가들에게 ‘너의 창조성을 마음껏 펼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화가에게 최소한 20년은 주고 이 정도의 드넓은 대자연의 공간을 마음껏 쓰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잠재력을 그야말로 마음껏 검열 없이 쓸 수 있게 해주는 자세야말로 ‘빨리빨리’에 길들어버린 우리와는 다른 ‘느리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전략’이었다.
   
   원래 이곳의 정식 명칭은 프로그너공원(Frogner Park)이지만 워낙 비겔란의 작품이 지니는 중요성이 잘 알려지다 보니 비겔란공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화가 난 소년(The Angry Boy)’ 또는 ‘우는 소년’으로 알려진 비겔란공원의 마스코트는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손을 꼭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싶어하는 작품이다. 분명 짜증 내고 징징대는 얼굴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아이의 모습이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치는 터치로 실감나게 빚어져 있다. 이런 따뜻하고 정감 어린 작품을 보면 과연 이것이 청동처럼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나 싶어 다시 한 번 만져보고 싶어진다. 여느 미술관의 실내 전시물과 달리 이런 공원의 야외 전시물은 손을 잡을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있어 더욱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전체 공원에서 조각들이 차지하고 있는 넓이는 80에이커(32만㎡)를 초과하며 브론즈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212개의 작품이 자유롭게 전시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다리는 1940년 공원이 최초로 공개되었을 때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한창 만들어지고 있었던 비겔란의 다른 조각상을 대중들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거대한 다리 건너편에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8명의 조각상이 사람들을 반긴다.
   
▲ (좌) 비겔란공원의 조각상. (우) 뭉크의 ‘사춘기’

   알록달록한 식물들이 빚어내는 꽃그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갑자기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단 옆의 돌계단에 누운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이기에 나도 마음놓고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누워서 하염없이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가 조금 아파 보였는지 “아 유 오케이?”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매우 멀쩡하고 괜찮다며 씩 웃어 보이니 그녀도 안심하며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간다.
   
   문득 노르웨이의 의료제도가 궁금해 오슬로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주치의가 있다고 한다. 환자가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시간은 길지만 상담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주치의와는 자기 몸의 아주 사소한 이상까지 세밀하게 상담할 수 있으며 1시간 가까이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의사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그밖에도 ‘십일조’를 전혀 받지 않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월급만으로 충분히 여유롭게 살아가는 노르웨이 목사의 삶, 여름이면 블루베리가 지천에 열려 가족들과 삼삼오오 모여 블루베리를 따러 가는 오슬로 사람들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모습, 그리고 ‘자연’을 ‘관광자원’으로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여행객을 유치하기보다는 ‘자연’은 ‘이 모습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보호하고 사랑하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사고방식. 이 모든 모습들에 오슬로의 평화로운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절제와 공생의 지혜가 스며 있다. 다시 오슬로에 갈 수 있다면,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어슬렁어슬렁 오슬로의 골목길 곳곳을 산책하며 다정한 오슬로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LG V30

맨위로

2486호

2486호 표지

지난호보기 정기구독
유료안내 잡지구매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찾기
호르반
삼성전자 갤럭시 s8
창원시
부산엑스포
경기안전 대동여지도
조선토크 브로슈어 보기

주간조선 영상 more

이어령의 창조이력서 연재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