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메뉴 차돌박이
대표메뉴 차돌박이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3시 반. 지난 수십 년간 늘 그래왔듯 서울 삼각지에 있는 봉산집 주인장 양희성(93)씨가 차돌박이를 썰기 시작한다. 고령의 연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3㎏ 가까이 되는 차돌박이 여러 덩이를 계속 번갈아가며 냉동육절기에 넣고 1.3㎜ 남짓 얄팍한 두께로 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제가 좀 힘들어도 차돌박이는 얇게 썰어야 드시기 좋아요.”

차돌박이는 어떻게 써느냐에 따라 맛이 좌우된다. 소의 앞다리와 양지살 사이에 숨어 있는 단 한 덩이의 보석! 빨간 살코기 속에 하얀 지방이 차돌처럼 박혀 있는 모양이어서 ‘차돌박이’라고 불린다. 고소한 순백의 차돌박이 지방은 근육과 근육 사이에 있는 ‘근간지방’으로 식감이 단단하고 쫀득하다. 구워도 잘 녹지 않는 지방의 쫄깃함을 최대한 살리면서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씹히도록 하려면 얇게 써는 것이 관건인데, 바로 여기에 노하우와 정성이 필요하다.

고기가 너무 꽁꽁 언 상태로는 냉동육절기로도 얇게 썰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흐물거리게 녹아도 안 된다. 냉장실에 옮겨서 나무젓가락으로 눌러 보아 살짝 들어가는 정도로 마침맞게 녹여가며 썰어야 한다. 그런데 바깥쪽부터 녹고 가운데 부분은 쉬 녹지 않기 때문에 차갑고 무거운 냉동 고깃덩이를 계속 번갈아가며 써는 정성과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차돌박이는 썰자마자 녹지 않고 돌돌 말린 상태를 유지하도록 냉동고에 넣어두었다가 1인분에 130g씩 접시에 재빨리 나누어 담아 다시 냉동 상태를 유지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느라 보유하고 있는 냉동냉장고만 무려 10여대.

양씨가 한 차례 일을 마친 다음엔 아침 8시 반쯤 양씨의 손주사위인 임기호(38)씨가 차돌박이 써는 작업을 이어받는다. 기호씨는 숯불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 고기 써는 일까지 어느덧 7년째 양씨를 돕고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여기에 양씨의 넷째 딸 인영(50)씨, 손자 현우(30)씨까지 합세하고 있으니 3대가 똘똘 뭉쳐 봉산집을 꾸려가는 셈이다. 이들 가족은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면서 프랜차이즈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앞으로도 가족이 다함께 물 샐 틈 없는 관리를 이어가겠다고 한다.

대물림을 준비 중인 임기호씨.
대물림을 준비 중인 임기호씨.

마무리는 차돌막장찌개로

황해도가 고향인 양희성씨와 이갑순(84)씨 부부는 1950년대 후반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둥지를 틀었다. 삼각지 골목 안쪽에서 ‘황해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는데 처음부터 차돌박이로 유명한 집은 아니었다. 그때는 차돌박이 부위를 요즘처럼 구이로 먹는 일이 흔치 않았다고 한다. 비교적 값이 헐한 양, 곱창, 사태 등을 주로 팔다가 차돌박이 부위를 결 반대 방향으로 얇게 썰어 구워 먹게끔 내놓자 반응이 좋아 점차 주력 메뉴가 되었고 차돌박이로 장안을 평정할 만큼 명성을 쌓았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고향인 황해도 봉산군의 이름을 따서 ‘봉산집’이라는 상호를 걸었다. 그때가 한 40년 전쯤일 것이라고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 주인장에게 정확한 연도는 그닥 중요치 않아 보인다. 한자리에서 일 년을 하루같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문을 열고 손님들에게 변치 않는 맛을 제공하는 것만이 그에게 최고의 화두인 것만 같다.

봉산집 골목은 시간이 멈춘 듯하다. 이 집 외관도 수십 년 오래된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다. 실내도 마찬가지다. 긴 도마가 떡 버티고 있는 입구에 들어서서 테이블 몇 개 안 되는 홀을 지나면 방이 있는 구조. 전체를 통틀어도 테이블이 스무 개가 채 되지 않는다. 예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저녁시간이면 줄을 서기 일쑤. 밖에서 줄 서서 맡는 숯불 직화구이의 고소한 유혹이란!

메뉴는 차돌박이, 양, 사태 등이 있는데, 그중에 차돌박이가 대표메뉴다. 주문을 하면 양배추와 고추장, 파와 대파를 듬뿍 넣은 간장소스가 나온다. 양념소스는 간장에 식초와 설탕, 물을 비율 맞춰 섞어 두었다가 대파와 풋고추의 숨이 죽지 않도록 상에 낼 때 듬뿍 섞어준다. 이어서 올라온 숯불은 언뜻 보기에 좀 약하다 싶다. 이유인즉 차돌박이에서 기름이 빠지면서 화력이 강해지기 마련. 불이 너무 세면 고기가 까맣게 그을려버리기 때문에 타지 않고 맛있게 두세 접시 구울 수 있을 정도로 숯 양을 조절한 것이라고 한다. 오랜 내공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돌돌 말린 상태로 나오는 얇은 차돌박이는 뜨거운 석쇠에 올리자마자 춤을 추듯 지글거리며 고소한 향을 내뿜는다. 핏기가 가시고 거의 익으면 석쇠 가운데 불길이 직접 닿지 않는 곳으로 모아놓고 한 점씩 양념소스의 대파와 풋고추 썬 것을 싸서 먹는다. 채소로 고기를 싸먹는 것이 아니라 고기로 채소를 싸먹는 셈. 첫입부터 차돌박이 지방의 농후한 풍미와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지면서 꼬들한 식감에 매료되고 만다. 새콤한 간장에 버무려진 대파와 풋고추가 기름진 차돌박이를 느끼하지 않게 잡아주니 무한정 들어갈 것만 같다.

무심히 툭 자른 양배추 한 덩이는 한 장씩 떼어 차돌박이를 올려 먹어도 좋고, 고기 먹는 사이사이 양배추만 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아삭아삭, 달고 싱싱한 맛이 끝내준다. 이 역시 매일 시장에서 묵직하게 속이 꽉 찬 것을 골라 들여오는 주인장의 정성이 담겨 있다.

고기를 먹은 뒤엔 차돌막장찌개로 마무리하기를 권한다. 이 집 차돌막장찌개처럼 완벽한 맛을 내는 곳은 정말 드물다. 자그만 양은냄비에 양배추와 차돌박이를 잘게 썰어 넣고 막장을 풀어 끓여낸 차돌막장찌개는 옛날 어머니표 찌개처럼 구수함이 가득하다. 특히 숯불 위에 찌개 냄비를 올려놓고 밥을 푹 말아 한 술씩 뜨면 고소하고 달큰한 맛에 그 누구라도 반할 만하다. 가끔 이 찌개만 따로 먹으러 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고기를 먹은 손님만 주문할 수 있다.

차돌막장찌개의 비법은 이갑순씨가 보리와 메주를 섞어 간장을 띄우지 않고 담근 이북식 막장에 있다. 여기에 기름 2, 살코기 1의 비율로 넣는 차돌박이와 신선하고 달큰한 양배추 그리고 30년째 차돌막장찌개를 담당하고 있는 주방 이모의 손맛이 버무려져 언제나 변함없는 맛을 내고 있다.

봉산집의 맛은 일본까지 알려져 일본 언론에서도 취재를 오곤 한다. 봉산집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진도댁이다. 35년째 근무하는 진도댁은 30년 전 단골손님들의 이름을 지금도 줄줄 꿴다. 양씨의 아들이 강남에 번듯한 지점을 낸 지 오래지만, 정겨운 추억을 나누기엔 손님과 가게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곳, 본점이 제격이 아닐까.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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