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 ‘주주행동에 따른 주주 권익 신장’….

정부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주장들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대기업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고, 기업들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화려한 수사(修辭)만으로 판단해선 안 됩니다. ‘국민연금이나 자산운용사가 대기업 경영에 적극 관여할 수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대기업이란 특정 집단을 겨냥한 ‘징벌적’ 정책이란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책을 입안하면 해를 입는 쪽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반(反)시장 정책’이란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017년 현재 국민연금의 전체 기금 규모는 600조원이며 이 중 국내 대기업 주식에 투자한 자산의 가치는 85조원에 달합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꼬박꼬박 납부하는 돈에 이미 보유한 대기업 지분, 거기다 기업 경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간여할 수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까지 한 손에 쥐면 국민연금은 덩치뿐 아니라 권한도 막강해집니다. 지난 11월 23일 KB금융 임시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은 노동조합 추천 사외이사 도입에 찬성 의결권을 행사했습니다. 노조의 경영 참여의 길을 터주는 데에도 국민연금이 그 실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스튜어드십 코드가 외형상 ‘자율규범’이란 옷을 입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국민연금이나 자산운용사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강제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취재 중 만난 자산운용사 간부 A씨는 “스튜어드십 코드 태생 자체가 기업 경영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데, 그 제도 도입을 자율로 하겠다는 건 일종의 모순 아니냐”며 의아해 했습니다. “(국민연금 등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대기업 경영에 간섭한다고 기업의 일자리 창출이나 수출, 이윤 증대에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우려도 이어졌습니다. 사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자산운용사 입장에선 나쁠 게 없습니다. 국민연금으로부터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며 수수료를 챙기는 만큼 자산운용사는 국민연금만 잘 따라가면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 문제를 지난주 집중 조명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국민연금을 가리켜 ‘대기업 최대주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국민연금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정부뿐인데,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사실상 독려하는 분위기입니다. 정부가 ‘대기업 최대 단일주주’로 등극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건 지나친 기우(杞憂)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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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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