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왼쪽)과 에든버러(오른쪽)를 페스티벌 열기로 뜨겁게 만드는 것은 거리 공연자들이다. 오프와 프린지 공연은 이렇게 요란한 차림의 남녀 배우들이 하루 종일 골목을 누비며 손님을 끈다.
아비뇽(왼쪽)과 에든버러(오른쪽)를 페스티벌 열기로 뜨겁게 만드는 것은 거리 공연자들이다. 오프와 프린지 공연은 이렇게 요란한 차림의 남녀 배우들이 하루 종일 골목을 누비며 손님을 끈다.

3000개가 넘는 춤, 연극, 음악 공연이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펼쳐지는 곳. 주당에게는 수도꼭지를 틀면 시원한 맥주가 쏟아지는 곳이 천국일 테고,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이 흐르는 분수가 꿈속 낙원이겠지만, 공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아침 9시 첫 공연이 시작되고 밤 12시 그날 마지막 공연의 막이 오르는 곳이 파라다이스다. 세상에 그런 곳이 딱 두 곳 있다. 프랑스 남쪽의 중세도시 아비뇽과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도시 에든버러다.

7월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8월의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연예술 축제로 어깨를 겨루는 맞수다. 아비뇽은 뜨거운 태양과 미스트랄로 가득하고, 에든버러는 아침저녁에 두꺼운 파카로 한기를 막는다. 날씨 말고도 비교할 일이 많은 두 페스티벌은 올해 70세를 함께 기념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火)가 가신 지 2년 만에, 폐허나 다름없던 두 도시에서 동시에 공연 페스티벌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1947년 여름이었다. 연극 3편으로 시작했던 아비뇽 페스티벌은 프랑스와 전 세계에서 60개 작품을 초청하는 공식(In) 부문과 1200여개의 자유 참가작이 경쟁하는 오프(Off) 페스티벌로 성장했다. 에든버러 축제도 공식 부문에서 연극·무용·오페라·클래식 음악회가 100여개, 비공식 부문인 에든버러 프린지(Fringe)에 3300개 공연이 참가하는 사상 최고 기록으로 고희 잔치를 화려하게 치렀다.

(좌) 14세기에 지은 교황궁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심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 에든버러 축제극장에서는 음악회가 열린다.
(좌) 14세기에 지은 교황궁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심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 에든버러 축제극장에서는 음악회가 열린다.

아비뇽 경제효과 3000만유로

아비뇽 페스티벌은 7월 초 시작해서 3주간 계속된다. 2017년은 7월 6일 개막해 7월 26일 폐막했다. 유네스코문화유산이자 아비뇽의 ‘심장’인 교황궁 뜰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성당, 학교 강당, 체육관이 모두 극장으로 변한다. 올해 공식 부문 공연장 31개 가운데 정식 극장은 ‘베누아 12세 극장’ 한 곳뿐. 나머지는 모두 고등학교 체육관이나 대학 강당, 성당·수도원 안마당 같은 곳이었다. 오프 페스티벌 공연장은 127개로 성당, 전시장, 체육관, 술집이 소극장으로 변신한다. 교황궁 바로 뒤 역시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돔 성당도 극장으로 바뀌었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옛 도시는 4.3㎞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다. 서울의 올림픽공원 둘레가 약 5㎞이니 올림픽공원보다 조금 작은 셈인데 올림픽공원 안에 160개의 공연장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리퍼블리크 거리를 중심으로 수백 개의 골목이 페스티벌 내내 30만명 넘는 관객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2017년 예산은 1258만유로(약 161억6500만원)인데, 아비뇽시와 주변에서 창출되는 경제효과를 3000만유로로 예상했다.

골목마다 광장마다 추석 날 서울역만큼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아비뇽 중앙역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리퍼블리크 출입구(Porte de la Republique)를 통해 옛 도시의 심장부로 이어진다. 튼실한 몸피에 짙푸른 이파리를 잔뜩 거느린 플라타너스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골목마다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상큼한 멜론 냄새, 구수한 커피 향이 흘렀다. 공연 포스터가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거리 카페에는 느긋한 미소가 가득했다. 화살 꽂힌 빨간 사과를 머리에 얹은 미인이 윙크를 던지고, 2층 발코니에 앉아 낚싯줄에 전단지를 매달아 관객을 ‘낚는’ 어릿광대는 점잖게 차려입은 사람들만 골라서 머리통에 낚싯줄을 휘둘렀다. 이리저리 얽히고 이어진 골목마다 극장들이 있었다. 4월에 일찌감치 예약해둔 숙소는 30석짜리 소극장과 같은 건물이었다.

아비뇽 페스티벌의 간판은 ‘명예의 뜰’로 불리는 교황궁 안뜰에서 하는 공연이다. 올해는 일본 연출가 사토시 미야기의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와 스페인의 플라멩코 천재 이스라엘 갈반의 ‘라 피에스타’(축제), 시인이자 세네갈 초대 대통령이었던 생고르의 시 ‘펨므 느와르’를 바탕으로 한 공연 등 모두 3편이었다. 페스티벌 첫 관람 작품으로 ‘라 피에스타’를 예매했던 터라 거리 구경도 할 겸 일찌감치 교황궁으로 올라갔다. 아비뇽 제4대 교황 클레멘스 6세가 1348년 지은 현재의 교황궁은 성벽 높이가 50m, 두께 4m의 거대한 요새 같은 석조건물이다. 프랑스혁명 때 허물어질 뻔하다 겨우 살아남아 병영으로 쓰였고 아비뇽 페스티벌 덕분에 지금은 옛 ‘명예’를 되찾았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7월이면 700년 넘은 아비뇽 골목 골목의 성당과 공회당이 극장으로 변신한다. 공연 포스터가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거리 카페는 페스티벌의 최고 명소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7월이면 700년 넘은 아비뇽 골목 골목의 성당과 공회당이 극장으로 변신한다. 공연 포스터가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거리 카페는 페스티벌의 최고 명소다.

남유럽의 여름은 밤이 늦다. 공연 시작은 밤 10시. 어슴푸레하던 하늘이 짙푸른 잉크색으로 바뀌면서 안뜰에는 한바탕 삶과 죽음의 축제가 펼쳐졌다. 흔히 플라멩코라고 하면 정열적인 춤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춤보다 더 깊고 무거운 노래가 함께한다. 스페인 세비야 출신인 갈반은 플라멩코 명문가 출신. 그는 체조선수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춤을 추었다.

올해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는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특히 주목받았다. 영국 국립극장 연출가 케이티 미첼이 연출한 장 주네의 ‘하녀들’은 부르주아 중년 여성 역할을 남자 배우에게 맡겨 폭력성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이탈리아의 젊은 연출가 안토니오 라텔라가 아에스퀼로스와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만든 ‘산타 에스타시 아트리디: 8개 가족의 초상’은 1·2부 합쳐 17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아비뇽 오프의 그 많은 공연들은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밤 10시에 마지막 공연의 막을 올렸다. 저녁 9시쯤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골목 골목 몰려다니며 거리에서 밥을 먹고 식탁에서 노래를 불렀다. 페스티벌 도중 숙소를 바꿔야 했던 나는 모두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불금 밤에 돌덩이 같은 여행가방을 끌고 거기가 거기 같은 교황궁 뒷골목을 뱅뱅 돌았다. 새 숙소가 있는 아르망 드 퐁마르탱 거리는 곳곳에서 번지수가 끊겼다.(주소가 옥수수알처럼 고르게 연결되는 것은 현대도시뿐이다.) 잔뜩 취한 한 젊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어딜 찾아?” 카페 앞을 세 번째 지나가던 나에게 그는 “이 동네는 내 동네다. 나를 따르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푸들처럼 곱슬머리를 한 남자와 이두박근에 장미꽃을 그려 넣은 남자가 합류했다. 이 아가씨와 친구들을 믿어도 될까. 뭐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SAMSUNG’이라고 어깨끈에 새겨진 낡은 DSLR카메라와 오래된 노트북 컴퓨터 하나밖에 없었지만. 나에게서 불안을 읽은 그는 “여긴 다 내 친구들이니 걱정 마” 하고 부르짖듯 속삭였다. 번지수를 찾아주고 손키스를 날리며 가버렸던 그 친구, 부디 행복하기를.

에든버러 개막 첫주 34만명 찾아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은 8월 4일 개막해 8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에든버러는 아서왕의 전설과 저항의 역사와 문학이 한데 곰삭은 유서 깊은 문화도시다. ‘아이반호’ ‘나폴레옹전’ 같은 역사소설로 스코틀랜드 정신을 구축한 월터 스콧 경, ‘보물섬’의 로버트 스티븐슨, ‘올드 랭 사인’으로 이름 난 시인 로버트 번스 등이 모두 이곳 출신. 요즘은 ‘해리포터’의 조앤 롤링이 단연 최고 작가이다.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살던 싱글맘 롤링이 유모차를 밀고 와 ‘해리포터’를 썼던 엘리펀트 카페는 아침 8시에 문을 여는데 롤링이 앉았던 창가 자리(창밖으로 에든버러성의 위용을 볼 수 있다)는 줄 서서 기다려도 자리 얻기가 힘들다. 왜 롤링이 이 카페를 단골로 삼았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현장에 가보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카페 바로 길 건너에 국립스코틀랜드도서관이 있었다. 영국의 도서관은 박물관과 미술관, 사회복지관과 카페를 합친 공간이다. 가난한 작가 지망생은 이곳에서 주린 지식을 채우고 쉼을 얻었을 것이다.

아비뇽을 떠난 지 열흘도 안 됐는데, 에든버러는 완전 딴 세상이었다. 북위 55°56′58″ 북유럽 도시는 낮 최고기온이 섭씨 12도에서 25도로 널을 뛰었다. 비를 뿌리다 맑게 개고 한낮에는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하루에 사계절이 다 있다. 추울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 가게에서 질 좋은 양모·캐시미어 목도리를 싼값에 팔고 있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도 아침 9시에 연극 첫 공연이 시작되고 밤 11시에 소극장 뮤지컬이 막 오른다. 올해는 개막 첫주에 34만명이 에든버러를 찾았다고 현지 언론도 흥분했다. 페스티벌 본부인 더 허브(The Hub)와 페스티벌 극장은 아비뇽에 비해 훨씬 화려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갑도록 차분했다. 첫인상이 매우 기괴한 ‘스콧 기념탑’ 때문일 수도 있고 날씨 탓일 수도 있다. 축제 기분을 내려면 쌀쌀맞고 단정한 공식 부문 공연장 대신 프린지 공연장으로 가는 게 좋다. 에든버러 프린지는 페스티벌 첫해인 1947년 공식 페스티벌에 초청받지 못한 연극인들이 “어디 누가 더 잘하나 보자!” 하고 따로 만든 비공식 축제다. 프린지는 철저히 ‘적자생존’ 원리가 작동하는 공연 시장이다. 어셈블리, 길디드 벌룬, 플레전스, 언더벨리 등 4개 메이저 공연기획사가 에든버러 전역에 공연장을 마련하고 전 세계에서 참가 신청을 받는다. 시내 곳곳에 페스티벌 공원을 만들어 공연 티켓도 팔고 맥주와 가벼운 음식도 판다. 인조잔디에 철퍼덕 누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제법 들뜬 분위기다. 매표소 옆 칠판(때로는 전광판)에 ‘매진’ 작품 목록이 점점 길어지고, 입소문을 탄 작품 공연장 앞에는 말 그대로 장사진을 친다. 매진 끝에 밤 11시 특별공연을 추가하는 것이 참가 극단들의 꿈이다.

(좌)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의 심장부 로열 마일은 수십 명의 버스커가 색다른 거리공연을 펼친다. 사과를 입에 물고 저글링으로 칼을 던져 베어내는 위험천만 묘기로 박수와 동전을 그러모은 버스커가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우)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이 열린 플레전스센터. 마을회관과 옛 술창고를 모두 극장으로 꾸미고 작은 광장 한가운데 이정표를 세웠다.
(좌)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의 심장부 로열 마일은 수십 명의 버스커가 색다른 거리공연을 펼친다. 사과를 입에 물고 저글링으로 칼을 던져 베어내는 위험천만 묘기로 박수와 동전을 그러모은 버스커가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우)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이 열린 플레전스센터. 마을회관과 옛 술창고를 모두 극장으로 꾸미고 작은 광장 한가운데 이정표를 세웠다.

올해 공식 부문에서 가장 공들인 작품은 ‘디바이드’였다. 1~2부 합해 7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장황한 대사와 밋밋한 연출로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이오네스코의 ‘코뿔소’. 시리아 등 중동 난민의 유럽 유입에 대한 저항을 풍자한 대사들도 박수를 받았다. 유럽 코뿔소와 중동 코뿔소가 어떻게 다른지 옥신각신하는 장면이나 연인과 친구가 모두 코뿔소로 변해버리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보는 주인공의 절망이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자유 참가작이 뜨겁게 경쟁하는 프린지는 에든버러 곳곳의 대학 강당, 교회, 주민센터, 카페, 술집, 식당 등 무대로 쓸 만한 곳이면 모두 극장으로 차출한다. 프린지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은 ‘특별공연’을 추가하며 상당한 입장 수입을 올린다. 세계 여러 나라로 초청받아 갈 기회가 생기는 것은 덤이다. 올해 프린지 공연에서 작품성으로 가장 호평받은 공연은 마임극 ‘망각의 본질(the nature of forgetting)’이었다. 희미해지는 기억과 혼돈을 늘어진 녹음테이프 같은 음악과 슬로 모션, 고속 되감기 모션 같은 마임으로 기막히게 표현했다. 최대 흥행작은 소극장 뮤지컬 ‘왕좌의 게임(Thrones!)’으로 인기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 열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마치 초등학교 학예회하듯 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역할놀이를 하는 뮤지컬이다. 에든버러대 강의실을 이용한 300석 규모 공연장은 전 좌석 매진. 밤 11시 특별공연 역시 매진!

아비뇽 페스티벌과 에든버러 페스티벌 모두 세계 최고의 공연 축제를 자부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라이벌 의식과 서로에 대한 질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동갑내기 두 페스티벌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가 뚜렷하다. 지난 4월 티켓과 숙소 예약을 하면서 흔히 말하는 두 나라 국민성(?)을 생생하게 느꼈다. 지금 당장 두 페스티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라. 2018년 아비뇽 페스티벌 날짜는 아직 미정이다.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에 비해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https://www.eif.co.uk)은 8월 3일부터 8월 27일까지라고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티켓 예매 때도 그런 ‘준비성’의 차이를 겪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티켓은 4월부터 살 수 있었지만 거의 한 달 먼저 개막하는 아비뇽 페스티벌은 6월 하순에야 티켓 판매가 시작되었다.(그나마 첫날은 홈페이지 예매 기능이 거의 다운되어 다음날에야 살아났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기간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투(스코틀랜드식 군악대)대회가 에든버러성에서 열린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페스티벌도 함께 열린다. 다양한 내용을 즐기고 싶으면 에든버러가 제격이고 공연과 낭송, 참여 프로그램을 선호하면 아비뇽이 다채롭다. 비록 날짜는 오리무중이지만, 2018년 아비뇽 페스티벌은 이미 시작되었다. 홈페이지(http://www.festival-avignon.com)에 따르면, 내년 교황궁 안뜰에는 그리스 비극 ‘이피게니아’가 펼쳐질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달콤하고 신선한 멜론과 별빛 아래 연극 무대를 즐기고 싶다면 여러분도 겨울철인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곧 숙소를 예약하는 게 좋겠다. 공연 티켓? 공식 참가작 티켓도 웬만하면 현장에서 구할 수 있다. 오프나 프린지는 얼마든지!

박선이 동서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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