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화가가 자신의 작품 ‘내숭: 나를 움직이는 당신’을 들고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김현정 화가가 자신의 작품 ‘내숭: 나를 움직이는 당신’을 들고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왕릉 하면 뭐가 생각나세요? 저는 태릉갈비, 광릉불고기 같은 먹는 게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청중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소가 귀했잖아요. 아무 때나 소를 잡을 순 없었어요. 왕릉에서 제를 지내는 날이 거의 유일하게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능 이름 뒤에 소고기 요리가 붙은 거예요.”

지난 12월 5일 저녁 7시 서울 노원구의 노원평생교육원. 강당에 청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김현정(29) 화가가 강연을 시작한 참이었다. 주제는 ‘한국화가 김현정의 조선왕릉 산책’. 화려한 한복을 둘러 입은 김 화가는 듣기만 해도 유쾌해지는 어투로 왕릉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친한 지인들에게 말하듯 조곤조곤 설명하는 게 한두 번 해본 모양새가 아니었다.

김 화가는 소위 가장 ‘핫한’ 화가다. 한국 화단을 넘어 젊은 화가 그룹 중에서 봐도 그렇다. 지난 4월 포브스가 발표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30 Under 30 2017 Asia)’에 들기도 했다. 김 화가의 특장점은 활동한 지 5년도 안 되어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내숭’ 시리즈다. 그중 한 장면. 한복을 입고 쭈그려 앉아 라면을 먹는 젊은 여성, 그녀의 시선 끝엔 루이비통 가방이 놓여 있다. 가방 위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 안에서 커피가 막 흘러내렸다. 젊은 한국 여성이라면 낯설지 않은 장면들을 매력 있게 포착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맥이 닿아 있다. 여성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고급스럽게 표현했다는 차이가 있다. “내숭의 핵심은 시선이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부리는 게 내숭이지 않나. 외국에서 전시할 때 ‘내숭’을 번역하려 해봤다. 좋지 않은 뉘앙스의 단어뿐이더라. 이젠 ‘21세기 서울 여성들의 풍속화’라 소개한다.”

작품은 여러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먼저 구도를 구상한다. 구상한 그림을 작가가 직접 실제 모습으로 재현해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보고 밑그림을 그린다. 한지 콜라주 방식으로 인물에 한복을 입힌다. 어느 작품이든 한복 치마는 먹색이다. “여인의 치마 속에서 생명이 탄생한다. 먹은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재로 만든다. 치마를 표현하기엔 먹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김 화가의 트레이드마크는 아름다운 한복이다. 작품 속 여인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 작가 본인도 전시든 강연이든 한복 차림으로 등장한다. 이날도 비단 조각을 패치워크처럼 이어붙인 치마를 입었다. 박술녀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한복을 좋아했다. 친척 결혼식 때문에 옷을 사는데, 저는 한복으로 사달라고 해서 입고 갈 정도였다. 한복디자인 분야엔 존경스러운 여성 디자이너 선생님이 많더라. 차이킴 김영진 선생님이나 박술녀 선생님 한복을 즐겨 입는다.”

김 화가는 서울대에서 동양화와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대생이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경우다. “경영학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더라. 원래도 카페를 가면 어떻게 꾸며놨는지보다는 매출이나 회전율이 궁금하긴 했다. 경영학을 택한 건 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화가는 가난하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지 알고 싶었다.” 경영학을 공부하며 정작 배운 건 ‘악바리 근성’이란다. “수업이 너무 어려웠다. ‘맨앞에서 강의를 들어봐야겠다’ 10분 일찍 갔는데 맨 뒷자리더라. 결국 1시간 전에 가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공부하면 뭘해도 성공하겠다 깨달았다.”

화가로서의 길을 계속 갈 건지 확신이 필요했다. 김 화가는 선배 화가들을 찾아다녔다. “유명한 화가들을 찾아다녔다. ‘얼마 버셨어요? 화가는 정말 배고픈가요?’ 화가 모임에까지 가서 여쭤보고 다녔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꽤 계시더라. 진지하게 인생을 걸어보자 생각하게 된 건 대학 4학년 때였다. 한국교원대의 조인호 교수가 어느 날 이렇게 묻더라. ‘회사원처럼 그림을 그려본 적 있어?’ 생각해 보니 회사 다니듯 성실하게 그림에 온 시간을 투자한 적이 없더라. 그때 마음을 굳혔다.”

5년 차 프로작가가 본 한국 예술계는 어떨까. “필드에 나오기 전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왜 그림을 안 사지? 왜 미술에 관심이 없지?’ 나와 보니 그게 아니더라. 미술을 알고 싶은데 장벽을 느끼고 있더라. 화랑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보단 먼저 관객들에게 다가가야겠다, 결심했다.”

지난해 4월에 연 개인전 ‘내숭놀이공원’이 그 시도의 결과다. 단순히 그림을 걸어놓는 게 아니라 놀러가기 좋은 공간으로 꾸몄다. 결과는 대성공, 줄을 서서 관람할 정도였다. 6만7000명 이상이 다녀갔다. 배경엔 ‘집단의 힘’이 있다. ‘김현정아트센터’다. “처음엔 혼자였는데 기업에서 콜라보 요청이 점점 많이 들어오더라.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모두 다른 전공을 한 직원 10명가량이 팀으로 일한다. 디자인 회사이기도 하고 캐릭터 회사이기도 하다. 이번처럼 강연이 들어오면 팀이 함께 준비한다. 어찌 보면 저는 그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대변할 뿐이다. 화가 김현정의 매니지먼트사 역할도 한다. 13개 채널에 SNS를 운영 중이다. 회사의 미션이 있다. ‘사회와 호흡하는 미술을 꿈꾼다’. 장기적으론 미술계의 ‘JYP’ ‘SM엔터테인먼트’가 목표다. 미술사를 공부해 보니 화가 한 사람으론 역사를 못 바꾸더라. 같은 방향을 꿈꾸는 그룹이 있어야 한다. 회사 안에 노하우도 많이 쌓였다. 김현정만 매니지먼트하기 아깝다. 다른 좋은 화가들도 발굴하는 게 장기 목표다.”

김 화가를 만나 보니 왜 ‘한국화의 아이돌’로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중에게 상품화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왕릉’을 만났다. 계기는 ‘조선왕릉 문화벨트’ 프로젝트(이하 왕릉벨트)다.

지난 12월 5일 노원평생교육원에서 열린 김현정 화가의 왕릉 강연.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2월 5일 노원평생교육원에서 열린 김현정 화가의 왕릉 강연.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자연과 우주의 합일 보여주는 조선왕릉

왕릉벨트는 경기도 구리시가 주관하고 남양주시, 노원구, 성북구가 참여하는 사업이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한다. 이번 조선토크 행사는 그 일환이다. 구리시와 조선뉴스프레스가 함께 열었다. 12월 5일엔 노원평생교육원, 12월 9일엔 구리아트홀에서 열렸다. 왕릉벨트 사업에 참여하는 4개 지역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유릉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의 처음과 끝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한 장례 전통을 보여준다는 점, 한국과 동아시아 무덤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준다는 점, 규범화된 의식을 통한 제례의 살아 있는 전통과 직접 관련된다는 점이다. 42기 모두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 42기 중 2기는 북한에 있다. 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의 제릉(齊陵)과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이다. 나머지 40기 중 9기는 구리시에 있다. 동구릉이다. 태조의 건원릉부터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영조의 원릉, 현종과 명성황후의 숭릉, 경종의 혜릉, 헌종의 경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추존 문조의 수릉이 있다.

조선왕릉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동양학자 조용헌씨의 설명이다. “세계의 왕릉과 비교했을 때 우선 보존 상태가 좋다. 위치도 좋다. 풍수는 조선의 종교였다. 왕실에서 고용한 지관이 터를 잡았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갖춰진 명당에 왕릉이 있는 까닭이다.”

궁이 이승의 삶이라면, 왕릉은 죽음 이후의 삶이다. 500년간 조선의 최고권력자는 왕릉을 바라보며 권력의 유한함과 무상함을 새겼으리라. 궁궐뿐 아니라 종묘와 왕릉까지 돌아봐야 역사의 실루엣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이유다. 기자는 서울 근교의 왕릉을 종종 찾는다. 지난 11월 18일엔 김포에 있는 장릉에 갔다. 골프장과 갈비집에 둘러싸여 있지만 특유의 고아(古雅)한 매력이 살아 있는 능이었다. 왕릉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일본 ‘레키조(歷女)’들 사이에서 ‘왕조 투어’가 유행했을 정도다. 레키조는 역사의 역(歷)과 여(女)를 합친 말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란 뜻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엔 왕릉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더 늘었다.

김현정 화가의 왕릉 강연은 예정했던 시간을 넘겨가며 이어졌다. 역사가가 아닌 아티스트의 시각에서 하는 설명이라 그런지 새롭고 흥미로웠다. 청중들의 집중도도 높았다. 김 화가는 “왕릉 강연을 준비하며 역사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 기도 도굴당하지 않고 보존했다니,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소중히 지켰구나’ 싶더라. 왕릉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다. 스스로 소중히 해야 외국인에게도 당당히 알릴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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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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