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우) ‘고백록’
(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우) ‘고백록’

인간은 고도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그에 대한 답, 즉 진리를 갈구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인생이란 ‘나’를 찾아 헤매는 구도(求道) 여행인 것이다.

이 기나긴 여행은 결코 순탄치 않다. 주저앉고 넘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온갖 좌절을 훌훌 털고 우뚝 일어선 감동적인 경우도 어쩌다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는 그의 굴곡진 삶을 ‘고백록(Confessiones)’에 오롯이 담았다. 그의 고백은 솔직하고 절절(切切)한 것으로 으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이다. 그가 북아프리카 히포(Hyppo)의 대주교(大主敎)로 취임하자 반대자들은 그의 이교(異敎) 전력을 문제 삼았다. 그는 젊어서 9년 동안 동방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회중(會衆)에 자신이 걸어온 길과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밝히고자 했다. 그는 주교가 된 이듬해(397년)부터 3~4년 동안 틈틈이 ‘고백록’을 쓴 것으로 짐작된다.

‘고백록’은 헛된 가치에 얽매여 방황하던 한 인간이 간절한 탐구와 통회(痛悔)를 통해 종교적 구원이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고백이 배척받은 적은 결코 없다. 거기에는 ‘나는 누구인가’로 몸부림치는 인간의 실존적 갈등이 진솔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를 떠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투쟁인 것이다.

그의 고향은 로마의 속령(屬領)인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 소재)였다. 그는 17세 때 북아프리카 제1의 도시 카르타고로 유학을 떠났다. 이 혈기방자한 젊은이는 낮에는 수사학(修辭學), 고전, 철학 등을 공부하고 밤에는 대도시의 향락을 만끽했다. 금세 한 여인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는 수사학에 재능을 보여 곧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그곳에는 마니교가 유행했다. 그것은 선악을 주관하는 신이 각각 따로 있다고 가르쳤다. 즉 악도 인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악의 신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성애와 향락을 탐닉하며 죄의 문제로 괴로워하던 그는 마니교의 선악이원론에서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는 방탕에 빠진 아들의 회심을 위해 평생을 기도와 눈물로 보냈다.

그는 수사학에 이어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이를 통해 그의 안목이 문학적 감성에서 철학적 지성으로 확장되었다. 28세 때 그는 야망과 호기심을 가지고 제국의 수도 로마로 향했다. 거기서 당대를 풍미하던 신플라톤학파와 교류했다. 플라톤은 이성의 눈으로 불변의 이데아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런 영웅적 그리스 정신은 이미 후퇴하고 있었다.

신플라톤학파는 인간이 감각에 의해 판단하므로, 지식이 상대적이고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당시의 철학은 대부분 어느 정도 회의주의로 기울면서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종교적 계시가 수용될 만한 정신적 토대가 조성되었다.

마니교는 이 세상이 물질이고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을 규명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합리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 철학을 통해 물질을 초월하는 영혼이 존재하며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니교 최고지도자를 만나 자신의 의문을 풀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실망만 하고 말았다. 그는 지적인 차원에서 마니교와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수사학 교사 자리를 얻어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리스 철학의 인식 방식으로 기독교적 믿음을 설명하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탐닉했던 마니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15년 동안 동거해왔던 여인과도 헤어졌다. 이처럼 그는 먼저 앎(knowledge)을 통해 회심을 이룩한 바 이를 흔히 ‘지적 회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머니의 주선으로 양가집 소녀와 정혼했다 파혼하기도 했고, 또 다른 여인을 만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육체적 정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식으로 몸부림쳤다. ‘이리하여 내 영혼의 질병은 악습의 노예가 된 탓으로 더욱 심해져 갈 뿐’이라고 탄식했다.

그가 괴로워하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으로부터 ‘집어라, 읽어라’라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는 닥치는 대로 성경을 펼쳐들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마라.”(로마서 13:13~14) 순간 놀랍게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의심이 사라졌다. 드디어 ‘영적 회심’에 이른 것이다.

그는 기나긴 지적·영적 순례 끝에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답을 발견하였다. 오로지 ‘진리의 빛’에 비춰 보아야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고 깨달았다. “그 빛이 나를 만들었으므로 내 위에 있고 나는 그 빛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그 아래에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그는 곧바로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고(33세) 귀향하여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얼마 후 히포 주교의 권유로 사제가 되었다가, 42세 때 주교직을 이어받았다. 그 이후 36년간 정력적으로 직분을 수행하며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을 남겼다. 로마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북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430년 8월 반달족에 의해 히포가 포위된 와중에 76세로 영면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신은 우리가 이성 없이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가 신앙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라고 가르쳤다. ‘지적 회심’을 앞세웠던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이를 통해 그는 신학의 기틀을 다졌고 나아가 서양사상의 주춧돌을 놓았다. 따라서 그를 가르켜 ‘서양사상의 두물머리’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 ‘두물’은 물론 헬라이즘과 히브리즘이다.

‘고백록’은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앎과 믿음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시대를 통해 탄생한 서양사상은 중세에는 신앙으로 기울었다가 근대에는 이성으로 기울었다. 어느 쪽으로든 균형이 일그러지면 예외 없이 병리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 그간의 냉엄한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만큼 앎과 믿음의 균형은 중요한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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