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경력이지만 기자라는 직업이 좋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날것 그대로 듣고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2017년 송년호 커버스토리를 쓰기 위해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와 만났습니다. 이미 여러 미디어가 조명한 인물인 만큼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그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외상외과 전문의인 그가 초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 일을 견뎌내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외상외과는 험한 진료 분야입니다. 피칠갑을 하고 똥물을 뒤집어쓴 채 환자의 내장을 뒤적이는 것이 생업(生業)입니다. 관찰자 입장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볼 수 있는 분야일 수 있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보람, 의사로서의 사명감 등의 대답이 나오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이 교수의 대답은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린다는 생각을 하면 회의감이 들어 하루도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외상외과를 찾는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도 영구적 손상을 입고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교수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김훈의 ‘칼의 노래’를 꼽습니다. 병원 방에 책을 두고 틈날 때마다 읽는다고 합니다.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을 다룬 다른 책들과 달리 ‘칼의 노래’를 관통하는 의식은 인간으로서의 절망감과 무력감입니다. “기대가 없어야 산다”는 이 교수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책에서 이순신은 아무런 희망 없이 마지막 전투를 담담히 마주합니다.

이 교수를 취재하며 그가 매일 스스로의 ‘노량해전’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칼의 노래’에 담긴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외상센터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이국종이 기여한 역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덴만 여명 작전’을 통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지가 7년, 그가 외상외과에 몸담은 지가 16년입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키워드

#취재 뒷담화
배용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