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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1호]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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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이란 무엇일까?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pcsun21@daum.net

▲ (좌) 아리스토텔레스. (우) 니코마코스 윤리학
누구나 행복한 삶을 욕망한다. 하지만 정작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선뜻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일찍이 이 곤란한 문제에 끈질기게 천착한 고전 중의 고전이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이다. 니코마코스는 그의 아들이다. 이 책은 그가 아버지의 강의 자료를 정리해 펴낸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의사(醫師) 가문 출신이다. 이로 인해 그는 플라톤의 수제자임에도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아의 책임자가 되지 못했다. 한때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알렉산더 왕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알렉산더 측근의 후원으로 리키온이라는 학당을 설립하고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이 지역의 패권국가였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원정 중에 급서(急逝)하자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바람이 일어났다. 그 여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들이닥쳤다. 그는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되자 재판을 피해 아테네를 떠났다. 이때 그가 ‘아테네인들이 철학을 두 번 죽이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죄목 중 하나가 바로 불경죄였던 것이다. 그는 아테네를 떠난 이듬해 죽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욕망한다. 그런데 좋은 것에는 위계(位階)가 있다.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 행복을 누린다고 하자. 좋은 직장, 돈, 행복은 모두 좋은 것이다. 하지만 좋은 직장은 돈의 수단이고, 돈은 행복의 수단이다. 반면 행복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따라서 행복은 좋은 것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행복이 ‘기능’과 관계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에는 각각 고유한 기능이 있고 그것을 탁월하게 수행하면 가장 좋은 상태, 곧 행복에 도달한다. 어떤 피리 연주자가 탁월한 기량을 갖추고 그것을 마음껏 발휘한다면 그는 피리 연주자로서 행복한 것이다. 이처럼 행복이란 자신에게 고유한 ‘탁월성(아레테·arete)’을 발휘하는 일이다. 이 아레테가 윤리적 문맥에서 종종 ‘덕’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인간으로서 탁월성 또는 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탐색해 가는 것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주제인 것이다. 물론 인간이 생존하려면 여러 가지 기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영양섭취, 생식, 운동, 감각 등은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 그런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로지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 또는 탁월성을 10여가지 제시한다. 이것들은 ‘품성적’ 탁월성과 ‘지성적’ 탁월성으로 대별된다.
   
   ‘품성적’ 탁월성은 말 그대로 품성에 관련한 것이다. 품성이란, 타고난 성격을 습관을 통해 일정한 습성으로 갈고닦은 결과이다. 이러한 품성은 평소 그 사람의 행동방식을 결정하고, 행동방식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결정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품성을 탁월하게 연마하고 발휘하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여기에는 용기, 절제, 관대함, 자부심, 사교성, 온화함, 재치, 정의, 친애 등이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탁월한 품성들이 ‘중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용기는 두려움에 대해 비굴하지도 않고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 중간적 대응방식, 즉 중용이다. 중용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때,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목적을 위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처럼 중용은 결코 평균적 절충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최선’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지성적’ 탁월성은 지성적 작용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좋고 나쁨을 인식하는 ‘지혜’이다. 지식은 맞고 틀림을 가려내는 법칙적·필연적 영역을 다룬다. 반면 지혜는 좋고 나쁨을 선택해 삶을 가꾸어 나가는 실천적 영역을 관장한다.
   
   ‘지혜’란 좋음 또는 탁월함을 분별하는 능력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을 숙고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리한 사기꾼은 있어도 지혜로운 사기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지혜가 없다면 중용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부터 불가능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혜는 어떤 불변의 법칙을 찾는 지식과는 다르다. 오히려 법칙을 벗어나는 가변적인 틈새를 섬세하게 포착·판단·대응하는 기능이다. 지혜 역시 품성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실천적으로 갈고닦아 함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적’ 탁월함과 ‘지성적’ 탁월함(특히 지혜)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행복론이 끝나는가 싶다가 그는 마지막으로 ‘지식’에 대해 논한다. 지식은 법칙적 영역을 다루는 이론적 지성이다. 그는 지혜보다 지식이 행복을 위한 최고의 탁월함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강의를 서둘러 끝낸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소 당황하게 된다. ‘지혜’에 대해 자세히 논하다가 불쑥 ‘지식’의 우월성을 툭 던졌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동물도 생존에 필수적인 좋고 나쁨은 인식한다. 비록 초보적이나마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식은 순전히 인간에게만 고유한 기능이다. 따라서 지식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현실적 삶에 일절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불변의 진리만 탐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건강, 돈, 편리함 등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활동에 연연하는 동물적 행복론일 따름이다. 영화 ‘한나 아렌트’에는 한나 아렌트(주간조선 제2441호 참조)가 의사에게 금연을 권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그가 무심코 내뱉은 항변이 뇌리를 맴돈다. “나는 건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까. 정초(正初)에 누구나 한 번쯤 되뇌어 봄 직한 물음이다. 바로 그 ‘무엇’에 행복의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으로서 고유한 기능인 품성과 지성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 최고의 선, 곧 행복이라고 설파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런 가르침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만큼 우리는 너무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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