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윌리엄그랜트앤선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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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小寒), 대한(大寒)을 보내고도 추위가 여전하다. 영하 10도 안팎의 한파가 계속되는 이즈음이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던 한 시절을 떠올린다. 겨울의 문턱, 유라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로 향하던 열차의 좁은 객실. 네 명이 함께 쓰는 좁은 방에서 카스피해 서안 바쿠(아제르바이잔의 수도) 태생의 한 사내와 사흘간 숙식을 같이했다. 아침부터 맥주를 들이켜며 술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한국의 소주를 비웃었다.

“그 정도면 칵테일이네. ‘사마곤’이나 ‘차차’ 정도는 마셔줘야지!”

“사마곤? 차차? 그렇게 대단한 술이야?”

설명 대신 사내는 병째로 술을 마신 뒤 가슴이 타는 동작을 취했다. 얼마나 독하길래…. 나는 처음 들어보는 독주(毒酒)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차피 말은 잘 통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따로 알아봤다. 사마곤과 차차는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밀주(密酒)에 가까웠다. 사마곤은 감자로 담는다 했고, 차차는 포도의 찌꺼기를 이용했다. 둘 다 알코올 농도가 최소 40도란다. 막걸리나 와인처럼 그냥 발효만 시킨 술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70도의 알코올 농도를 말하기도 했는데, 과장은 아니었다.

사내의 이름은 즈알렐. 그는 하바로프스크 교외에서 벌목을 한다고 했다. 맨몸으로 시베리아의 바람, 눈발과 싸워야 하는 즈알렐에게 사마곤과 차차는 술이면서, 추위를 이겨내게 해주는 약(藥)이었다. 나는 매년 12월과 2월 사이,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한반도로 몰려들 무렵이면 즈알렐이 자랑하던 사마곤과 차차 생각이 간절하다. 사마곤과 차차 한 잔이면, 소한과 대한 추위 정도는 거뜬할 텐데…. 하지만 즈알렐이 혹한과 싸우며 마셨고, 오늘도 마시고 있을 시베리아 또는 우크라이나 또는 카스피해산(産) 밀주를 서울에서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인가?

시간의 술, 불의 술

맛보지 못한 사마곤과 차차의 유혹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대안이라도 찾고 싶었다. 혹한 속, 즈알렐의 힘겨운 벌목 노동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사마곤과 차차는 대체 어떤 술일까. 어떤 술이길래시베리아의 추위에 맞설 힘을 주었을까.

술에 대한 ‘원론적’ 설명이 필요하겠다.

그 종류가 다양하다 한들 이 세상의 술은 두 가지다. 양조주(발효주)와 증류주. 사람의 도움 없이 자연에서도 스스로 만들어지는 양조주의 재료는 세 가지다. 물과 당분과 효모.

당분이 발효되면 알코올이 되는데, 발효를 위해선 효모라는 미생물이 필수다. 물은 발효의 과정에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주입하기도 한다. 당분의 재료가 곡류라면 막걸리나 청주·맥주, 과일이면 와인이 된다. 그러나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는 화학적 반응은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술은 서서히 만들어진다. 시간이야말로 술의 마지막,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재료다. 술이 시간을 잊게 하는 건, 이 세상 모든 술에 잠재한 시간 때문이다.

그러나 양조주는 도수에 한계를 갖는다. 14~15도 정도가 최고다. 도수가 높아지면 효모가 활동을 못 한다. 이때 증류가 등장한다. 아라비아의 연금술사들이 고안한 방법이다. 독한 술 만들어 먹자고 창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액체를 끓여 만들어낸 기체를 다시 액체로 모아내는 게 증류다. 모든 술은 물과 알코올의 혼합이다. 이걸 끓인다고 치자.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지만, 알코올은 78도만 되면 끓는다. 물에서 빠져나온 알코올 기체는, 찬 무언가에 부딪힐 때 방울방울 맺힌다. 이걸 모으면 순도 높은 알코올이다. 막걸리나 청주를 끓이면 소주, 맥주를 끓이면 위스키, 와인을 끓이면 브랜디가 나온다. 고량주, 보드카도 같은 식이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약한 술(양조주)에 열을 가해 고농도의 알코올, 즉 증류주를 얻는 것이다. 독주의 공식 명칭이 바로 증류주다. 양조주가 ‘시간의 술’이라면, 증류주는 ‘불의 술’이다. 한겨울 추위를 물리치는 것은 바로 독주 안에 잠재한 불이다.

즈알렐이 자랑한 술 중 사마곤은 보드카, 차차는 브랜디에 해당한다. 그러니 사마곤과 차차를 구하지 못하면 보드카와 브랜디를 마시면 된다. 그러면 우리도 즈알렐처럼 시베리아의 추위를 이길 수 있다. 소한·대한이 지나고 꽃샘추위가 닥쳐도 겁날 게 없다.

‘오크의 향’ 위스키와 브랜디

사마곤(보드카), 차차(브랜디)에 앞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증류주인 위스키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위스키는 보리나 감자·옥수수 그러니까 곡류를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해 만든다. 증류 과정을 거친다 해도 위스키엔 곡물의 향과 맛이 남는다. 그런데 이런 과정만으로 우리가 스트레이트 또는 온더락(on the rocks)으로 즐기는 발렌타인, 시바스리갈, 커티삭, 조니워커, 제이앤비 등의 위스키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숙성의 과정에서 제3의 재료가 개입한다. 오크(oak), 즉 참나무로 만든 통에서 우러나온 향과 색이 없으면 빛나는 갈색의 위스키는 없다. 위스키는 그러니까 물·당분·효모·시간·불에 오크라는 또 하나의 재료가 가세하면서 만들어진다.

현란한 조합과 깊은 숙성의 이 술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전통적인 스트레이트와 온더락 외에 다양한 칵테일이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잊지 못하는 위스키의 추억이 있다. 지인이 알려준 방법이다. 주전자에 물을 펄펄 끓인다. 위스키를 적당량 채운 글라스에 이 물을 쏟아붓는다. 데운 청주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은은한 위스키의 향과 맛을 뜨끈하게 즐기다 보면 한기가 달아난다.

위스키와 더불어 유럽 증류주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게 브랜디다. 곡류 대신 과일을 발효시켜 얻은 술을 증류하면 브랜디다. 이런 술을 우리는 대개 코냑이라 부른다. 그러나 코냑은 브랜디의 한 종류다. 포도로 만든 양조주를 증류해 얻은 술의 통칭이 브랜디이고, 그 중 대표주자가 코냑이다.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만들어져서 코냑인데, 그 탄생의 사연이 드라마틱하다.

코냑 지방의 와인은 그보다 남쪽이면서 바다에 가까운 보르도 지방의 와인에 비해 질이 한참 떨어졌다. 원재료인 포도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신맛이 강했다. 그런데 신맛의 주범인 산(酸)이 증류 과정에서 매력적인 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코냑 지방 사람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브랜디 역시 위스키처럼 오크의 도움으로 완성되는데, 코냑 지역이 질 좋은 오크를 확보하게 된 사연이 재밌다. 17세기 후반 루이 14세 때 콜베르란 정치가가 있었다. 이 사람이 대서양 쪽 프랑스 해군기지에 공급할 선박을 만들려고 코냑 부근에 대규모의 참나무 숲을 조성했다. 이게 최고의 브랜디 코냑을 탄생시킨 오크통의 재료가 된다.

카뮈, 헤네시 등 코냑, 아니 브랜디는 증류주 가운데 가장 비싸다. 비싼 만큼 귀해서 칵테일로 먹거나 하진 않는다. 후식용으로, 혀로 천천히 굴려가며 음미한다. 카스피해의 사내 즈알렐은 물론 카스피해 특산의 값싼 브랜디 차차를 그렇게 마시고 있진 않을 것이다.

즈알렐이 자랑한 또 하나의 독주 사마곤은 보드카다. 과일로 만든 차차와 달리 곡류로 만든 술을 증류해 얻기 때문에 보드카로 부르는 것일 게다. 그럼 보드카는 위스키, 브랜디와 어떻게 다를까. 위스키이든 브랜디이든 오크의 도움으로 특유의 색과 향을 얻는다. 그런데 보드카는 무색·무향·무취를 내세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높은 앱솔루트 보드카를 생각해 보라. 투명한 원형 병에 담긴, 병보다 더 투명한 술. 얼마나 순수한가. 그러나 모든 순수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시베리아 전역엔 하얀 거죽의 자작나무가 흔하다. 보드카를 만든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태워 까만 숯을 얻었다. 그리고 밀·보리·호밀·감자 등으로 만든 술을 증류시키면서, 숯을 채워 넣은 탑을 통과시켰다. 자작나무 숯이, 탁한 발효주의 향과 색을 흡착하고 나서야 절대 순수의 알코올이 얻어진다.

압생트, 그리고 영혼의 피폐

보드카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서기 1000년을 즈음해 러시아가 종교를 들여올 때 얘기다. 요즘 식으로 말해 ‘종교 마케팅’ 같은 게 있었다. 당시 유력한 종교라 할 만한 게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이었다. 러시아는 그중 동방정교를 채택해 러시아정교로 정착시켰는데, 와중에 이슬람 마케팅 사절단을 물린 사연이 재미있다. 이슬람 사절단이 그랬단다.

“이슬람은 모든 술을 금지합니다.”

“그건 좀….”

연중 대부분이 겨울인 러시아 사람들에게 술은, 기호를 넘어 추위를 견디는 필수품이었다. 술 없는 종교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1000년 전 이슬람을 물리치게 만든 술은, 우리가 앱솔루트 병을 앞에 두고 감탄하는 무색·무취의 투명 보드카였을까. 아마도 즈알렐이 벌목의 틈새에 마시고 있을 사마곤에 가까울 것이다.

독주를 얘기하면서 진과 압생트를 빼놓을 수 없다. 진과 압생트는 그냥 증류주와는 좀 다르다. 증류 과정에서 새로운 재료가 들어간다. 진을 코에 대보면 소나무 비슷한 향이 나는데, 주니퍼 베리(juniper berry·노간주나무 열매) 냄새다. 노간주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한다. 압생트는 고농도의 알코올에 향쑥의 줄기와 잎을 잘게 썰어 넣고 다시 증류한다.

압생트는 특히 조심해야 할 술이다. 19세기 후반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뭉근한 초록빛의 독주에 중독돼 건강을 잃었다. 시신경을 해치는 물질이 들어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현란하면서도 일상적이지 않은 색감이 압생트 중독 때문이란 설(說)이 있다.

그러나 어디 압생트뿐이겠는가.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에 고량주, 소주까지 세상의 모든 독주는 추위를 떨쳐 몸을 보호하지만, 과하면 독(毒)이다. 증류를 통해 얻어지는 농도 95~96%의 순수 알코올을 주정(酒精), 그러니까 ‘술의 영혼’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부른다. 미국의 위스키 ‘에버클리어’나 폴란드의 보드카 ‘스피리터스’는 심하게 독해 주정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디, 술의 영혼을 취하려다 개인의 영혼이 피폐해지는 일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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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형 작가·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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