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하고 바삭한 돈가스.
향긋하고 바삭한 돈가스.

아기자기한 산책로와 근사한 전망으로 연인들을 유혹해온 서울 남산! 데이트족이 많은 남산엔 유서 깊은 돈가스 맛집들이 즐비하다. 요즘이야 분위기 좋은 전문 레스토랑이 많지만 양식이라곤 경양식집이 대부분이었던 1970~1980년대엔 데이트나 특별한 날의 외식으로 돈가스가 최고 인기였다.

‘남산돈가스’라는 말을 고유명사처럼 불리게 한 이곳의 식당들 중 ‘촛불1978’은 41년 역사를 자랑하는, 남산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대로변, 다른 돈가스집들 사이에 고풍스럽고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 이곳은 1978년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를 파는 경양식집으로 출발했다. 그후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초원의 집’ 상무였던 현일성씨가 2대 사장을 맡았고, 3대 김성덕씨를 거쳐 1993년 장경순(51) 대표가 인수해 현재는 남산의 대표적인 프러포즈 레스토랑으로 변모했다.

장 대표가 인수할 당시엔 테이블이라야 8개 남짓, 어둑어둑한 백열등과 올드팝이 흐르던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사업 실패 후 친구의 가게였던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장 대표는 ‘내가 사장이라면 ‘촛불’을 기가 막히게 운영할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이곳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다. 그리고 2년 후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그토록 원하던 ‘촛불’의 대표가 되었다. “첫 1년 동안 주방 아주머니 한 분과 둘이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열심히 뛰었죠!” 그 결과 1년 만에 빚을 다 갚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국내산 신선한 냉장육만 사용

‘촛불1978’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차츰 주변의 가게를 인수해 조금씩 넓히던 중 건물이 노후되어 2014년엔 1년이 넘도록 과감히 문을 닫고 아예 4층 규모의 건물로 새로 지었다. 새 건물은 층별로 테마를 달리한다. 지하 1층은 와인과 육류 저장고, 꽃 장식을 만드는 공간이 멋스럽게 자리 잡았다. 1층은 예전 건물에 쓰이던 벽돌과 간판 등으로 테라스를 꾸미고 앤티크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장식해 운치 있고 따스한 정감이 넘친다. 천장이 높은 데다가 햇살이 가득 들어와 점심엔 밝고 환한 분위기, 저녁엔 차분한 조명으로 한껏 은은하다. 메뉴는 피자, 파스타, 샐러드 등 이탈리안 비스트로의 가벼운 메뉴들이 있지만 메인은 역시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온 돈가스다.

이 집 돈가스는 대부분의 남산 돈가스집처럼 어른 손바닥만 하게 큼직한 왕돈가스이다. 그렇다고 종잇장처럼 얇지는 않다. 초창기보다 좀 더 도톰해진 두께에 윤기 좔좔 흐르는 소스를 듬뿍 끼얹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곁들이로 살짝 양념한 밥과 한식 양념으로 매콤달콤하게 버무린 양배추샐러드, 감자튀김을 옆옆이 담아 한눈에도 푸짐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돈가스를 잘라 입에 넣으면 오! 촉촉한 소스 옷을 입은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1970~1980년대 경양식집 돈가스의 향수가 떠오르는, 바로 그 맛이랄까! 특별한 날 부모님과 함께 별미로 맛보았던 소중한 기억, 사랑하는 이와 다소곳이 즐기던 연애의 추억까지 불러온다. 그렇다고 요즘 옛날식 돈가스집에서 흔히 내놓는 밋밋하고 색깔 없는 흔한 맛이 아니다. 이 집만의 향긋함과 깔끔함, 바삭한 튀김옷과 잡내 없이 부드러운 고기가 어우러져 마지막 한입까지 맛깔스럽다.

이곳 돈가스의 맛을 17년 동안 책임져온 조남곤 실장은 “옛날 돈가스 맛을 그대로 유지해 역사성은 챙기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밀가루를 버터에 볶아 쓰는 루 대신 사과, 배, 파인애플, 바나나, 토마토, 당근, 양파, 마늘, 대파 등 과일과 채소를 듬뿍 갈아 끓인 다음 숙성시켜 만든 건강 소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루를 쓰지 않으면 소스 맛 내기가 어렵고 과일과 채소가 많이 들어가 재료비 단가가 훨씬 높아지지만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튀김기름도 매일 한두 번씩 갈아서 항상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고, 고기는 돼지고기 등심 부위로 국내산의 신선한 냉장육만 사용한다. 장경순 대표는 밀가루와 쌀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 이탈리아에서 품질 좋은 유기농 밀가루를 직접 수입해 피자 반죽과 파스타 생면을 만들고 있다. 쌀도 갓 도정한 것을 들여와 5일 안에 소비하고 있다.

1층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아 돈가스와 파스타, 피자, 음료 등을 2인, 3인에 따라 실속 있게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세트메뉴를 구성해 놓고 있다.

4대 대표 장경순씨
4대 대표 장경순씨

“우리집은 20대부터 60대까지 손님들 연령층이 다양해요. 연인들은 로맨틱하게 데이트를 즐길 수 있어야 하고, 30~40년 전 이곳에서 옛 추억을 지닌 많은 분들은 이제 몸에 좋고 소화도 잘되는 건강한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다 해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 대표. 그의 목표는 고객이 추억할 수 있는 맛과 공간을 함께 책임지는 것이다.

옛 고객들과 추억을 되새기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개방형으로 디자인한 1층과 달리 2층은 연인들의 이벤트를 도와주는 공간이다. ‘촛불1978’은 연인들을 위한 장소로 명성을 지켜온 프러포즈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탄생한 커플이 100만쌍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 야구선수 이승엽, 연예인 션과 정혜영 부부도 이곳에서 프러포즈 시간을 가져 화제가 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흐뭇하게 기억하는 특별한 순간은 따로 있다. “이곳에서 프러포즈를 받아 결혼한 한 어머니께서 사위가 될 분에게 ‘딸에게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대신 예약한 적이 있어요. 우리집 공간에서 대를 이어 사랑을 이루는 모습에 그동안의 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아 정말 기뻤어요.”

칸막이나 룸으로 각기 공간이 서로 독립되도록 꾸민 2층은 아늑한 조명과 촛불들, 앞쪽은 남산, 뒤쪽은 명동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인테리어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선 시드니 출신의 유명 셰프가 핸드메이드로 내놓는 최고 퀄리티의 음식들을 경험할 수 있다.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꽃과 풍선장식, 즉석사진, 영상편지 상영 등 다양한 옵션도 준비하고 있다. 실내 모든 조명을 끄고 15분간 오직 촛불로만 실내를 밝히는 ‘촛불 타임’의 전통도 유지되고 있는데, 이 시간을 활용해 다양한 이벤트를 커플들이 주고받기도 한다.

3층은 기업의 단체모임, 생일파티, 약혼식, 송년회 등 단체 고객들이 예약을 하고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데 2층과 3층은 워낙 인기가 높아 꼭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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