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설특집 1] 과거 제사상에는 ‘性차별’이 없었다
  • facebook twiter
  • 검색
  1. 문화
[2495호] 2018.02.12
관련 연재물

[설특집 1] 과거 제사상에는 ‘性차별’이 없었다

▲ 경북 안동 의성김씨 학봉 종가의 불천위 제사 모습. 종부가 주부로서 제사에 참여하고 있다. photo 김미영
명절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몇 가지 풍경이 있다. 주방에서는 집안 여자들이 모여 쉴 새 없이 차례음식을 만들고 남자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술잔을 비우는 모습. 가끔 ‘안주가 떨어졌다’ ‘과일 좀 깎아오라’는 주문이 떨어지면 주방에 서 있던 며느리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이 명확히 구분되다 보니 명절을 수차례 보내도 며느리와 시댁 어른 간에 말 섞을 일이 별로 없다.
   
   명절 당일에도 남녀유별(男女有別)은 계속된다. 많은 가정에서 명절 차례를 지낼 때 여자들은 제사상 앞에 서지 않는다. 부엌에서 제사음식을 데우고 정리하고 나르다가 제사가 끝나면 재빨리 움직여 상을 정리한다. 남자들이 거실에 둘러앉아 ‘수고 많으셨다’고 인사를 나눌 때에도 여자들은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을 다듬어 차려내는 데 여념이 없다. 명절이란 오랜만에 친지 가족이 모여앉아 정(情)을 나누는 날이라고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명절 때마다 ‘명절증후군’에 대한 보도가 쏟아지고 ‘명절 후 이혼’ 건수가 실제로 늘어난다.
   
   정연순(65)씨는 40년 가까이 계속했던 이 ‘악습(惡習)’을 올해부터 끊기로 했다. 7남매의 장남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은 정씨에게 명절이란 허리 빠지는 노동의 시간일 뿐이었다.
   
   “젊을 때는 꼭 해야만 하는 줄 알고 무작정 명절을 보냈어요. 녹두전에 생선전, 각종 전을 부치고 산적도 만들고 조기도 굽고 갖가지 나물을 하고 시아버지 좋아하시는 갈비찜 해 올리고 탕도 끓이고 약밥도 만들고 식혜도 만들고 나면 내 몸이 내 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죠.”
   
   아들 둘이 결혼하고도 정씨 가족들은 정씨의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예전에 비해서는 간소해졌다고 해도 전 3가지에 나물, 생선, 고기 반찬은 꼬박 들어가니 명절 전날부터 며느리들이 저희 집 거실에서 이불 펴 놓고 자면서 음식을 만들곤 했어요.” 그러다가 지난해 추석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집 밖에서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며느리가 ‘내가 시댁 일하는 몸종이냐’면서 따지더군요. 아들이 미안하다며 이틀만 참으라고 달래는 소리를 듣고, 죽은 귀신 챙기다 산 자식들 못 챙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격이었죠.”
   
   올해 설날부터 정씨 가족들은 아예 모이지 않을 예정이다. 여행을 가라고 아들 내외의 등을 떠밀었다. “섭섭하고 서운하지만 제사를 안 지내려면 아예 안 모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에 따르면 정씨 가족처럼 아예 친지 가족들과 모임을 갖지 않을 예정인 사람은 19%에 달한다.
   
   문제는 명절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의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프랑스의 투생(Toussaint), 중국의 춘절과 국경절에는 으레 가족이 한데 모여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다. 일상에서 여성이 가사노동의 의무를 지고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제사상 앞에서는 다르다. 힘들고 고된 일은 여성이 다 하고 제사상 앞에서 절하고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은 남성 몫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런 제사란 노동 이외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없애자’고 말하는 가정이 늘어나는 것이다. 제사란 정말 악습인 것일까.
   
   
   달라진 차례와 제사 모습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김미영 위원은 오랫동안 유교문화에서 여성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연구해온 한국 유교와 종가(宗家) 문화의 권위자다. 그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명절 차례는 본래의 것과 멀어진 지 한참이다. 원래의 제사는 이렇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性理學)에서 기본 예법서로 여기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면 제사에는 주부(主婦)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주부란 제사를 지내는 주인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다. 장남의 집에서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면 맏며느리가 주부가 되는 셈이다. “제사에는 집안 여자들도 모두 참여합니다. 주부는 주인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데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것이 모두 주부의 역할입니다.”
   
   ‘주자가례’를 보면 사당에서 신주를 가져오는 출주(出主)부터 주부는 주인의 뒤를 따른다. 제사음식, 제물(祭物)을 진설할 때도 주부는 주인과 함께 고기와 전을 올린다. 그리고 첫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는 초헌(初獻)에 이어 아헌(亞獻)에 이르면 주부가 주인과 같이 잔을 올리고 절한다. 옛날 책에 나오는 내용인 것만은 아니다. 영남 지방의 종갓집에 가면 여전히 종부(宗婦)가 종손(宗孫)의 옆에 서서 아헌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경북 안동 의성김씨 학봉 종가에서는 불천위(不遷位·영구히 모시는 신주) 제사를 지낼 때 종부가 주부로서 아헌을 한다. 김미영 위원은 “여전히 많은 종갓집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주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보통 생각하듯 여성의 역할이 부엌에 한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남자들도 부엌 일에 적극 참여한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의 재유사(齋有司)로 안동 지역 종갓집 제사에 많이 참여한 60대 남성의 증언을 들어보자.
   
   “부인들이 완전히 전담하는 것은 밥을 짓고 국과 탕을 끓이고 나물을 다듬는 일입니다. 과일 같은 것을 사오는 장보기는 남자의 몫입니다. 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일고임, 떡고임 같은 것은 남자들이 알아서 합니다. 준비된 음식을 나르고 정리하는 일도 남자의 몫이죠. 지금 웬만한 가정에서 하는 것처럼 여자들이 제수 준비를 전담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보통 명절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만 사실 이때 지내는 것은 기일에 지내는 제사, 즉 기제사(忌祭祀)가 아니라 차례(茶禮)다. 차례는 제사와 다르다. 김미영 위원의 설명이다.
   
   “차례는 이름에 차(茶)가 들어간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차만 올리는’ 간단한 제례(祭禮)입니다. 설날을 예로 들면 온 가족이 모여서 떡국을 나눠 먹을 텐데 이걸 몇 가지 과일과 함께 차례상에 올리는 겁니다. 많은 요즘 가정에서 하듯이 전을 부치고 고기와 생선을 굽는 건 제사 때 하는 것이지 명절 차례상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따르면 차례상을 차린다고 거창하게 음식을 만들고 절을 할 때 남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원래 제례 형식에 비춰 보면 지금 차례와 제사는 과장돼 있고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제사와 차례의 본래 모습에 대해 알고 나면 저절로 의문이 생긴다. 왜 지금은 예전과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왜 조선 후기에 들어서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 잡게 됐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조선 초기에만 하더라도 여성의 지위가 조선 후기와는 달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조선시대 사회사(史) 전문가인 이남희 원광대 역사문화학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흔히 생각하듯 장자(長子)와 남아(男兒)가 우선이던 풍속은 조선 후기에 생긴 것이다. 이남희 교수는 현재 전해지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와 156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를 분석해 봤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족보를 보면 아들을 먼저 적고 딸을 적습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태어난 순서대로 적었습니다. 양반 부녀자의 재가(再嫁)에도 비교적 관대했던 것으로 보이는 게 두 족보에 보면 딸이 재가했던 사실을 그대로 적어뒀습니다.”
   
   이 두 족보에는 외손(外孫)도 기록돼 있다. 퇴계 이황은 문화유씨의 외손인데 문화유씨 족보를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남희 교수는 “사위와 외손을 친손(親孫)과 다름 없이 대우했다는 것, 딸과 아들의 지위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인 일이었고 윤회봉사(輪廻奉祀), 외손봉사(外孫奉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남귀여가혼이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자녀들이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처가에 머물렀던 방식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남귀여가혼은 흔한 혼례 방식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남귀여가혼이 성행해서 사람들이 친가보다 외가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가 내도록 올라옵니다.” 이에 따르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도 조선 후기에나 생긴 말이다.
   
   김미영 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윤회봉사와 외손봉사도 상당수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윤회봉사란 아들 딸이 번갈아가며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다. 의무가 동일했으니 재산 상속도 균등하게 이뤄졌다. 경국대전을 보면 노비와 토지가 적자녀(嫡子女)에게 균등하게 분배됐다. 이남희 교수는 “딸이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명의의 재산이 있을 정도로 여성의 독립성이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외손봉사란 외손이 외가의 조상제사를 이어 받는 것이다. 율곡 이이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유명한 강원도 강릉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다. 원래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외증조부인 최응현의 소유였는데 최응현이 둘째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줬고 이사온은 외동딸과 결혼한 신명화에게 이를 물려줬다. 신명화는 둘째 딸 신사임당의 아들, 즉 외손자 율곡 이이에게 집안의 제사를 부탁했다. 김 미영 위원은 “외손봉사에서는 장녀(長女), 차녀(次女)를 가리지 않고 형편이 되는 사람이 물려받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지금 제사는 거품이 너무 많다”
   
   변화는 전쟁에서 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걸 바로잡기 위해 조선에서 활용한 것이 성리학적 질서였다. 국가는 왕에서 양반과 평민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가정은 종갓집에서 가장과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안정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다. 고려 말에 유입된 성리학이 17~18세기에 이르며이론적으로 심화됐다는 것도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조선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는 데 한몫을 했다.
   
   “여성의 정절(貞節)을 강조하고 가부장과 장자 중심의 가정이 만들어진 것이 이때쯤입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여성의 역할은 결코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김미영 연구위원은 조선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중군자(女中君子)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대개 유교 질서에서 남편은 바깥일, 부인은 집안일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자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여자가 이를 수행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여중군자는 정부인안동장씨(貞夫人安東張氏), 장계향인데 이분은 대개 군자가 행한다고 생각하는 유교적인 삶을 실천함으로써 여중군자로 칭송받았던 겁니다.”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회는 대동(大同)사회다. 서로 어울리는 사회를 의미하는 대동사회에서는 남녀가 조화를 이루면서 산다는 게 기본 이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이상적인 가치는 차츰 옅어지고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유교가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여성의 역할을 축소되고 여성의 존재는 남성에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신분제가 무너지고 모두가 양반이 되기를 희구(希求)하게 됐다. 김미영 연구위원은 “원래 제례가 구성됐던 뜻과 가치보다 제례의 형식을 따라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면서 왜곡된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가정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의 제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 지배계층의 필요에 맞게 변형되기 시작한 가부장적 이념 때문에 생겨난 모습이다. 그것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리 잡게 됐다.
   
   심지어 명절의 차례 모습은 최근 들어와서 거창하게 변했다는 의견도 있다. 1950~1960년대만 하더라도 설날에 지내는 차례는 간단한 것으로 제례보다 조상에게 세배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농(離農)으로 모두가 도시에 살게 된 요즘에 와서 제사에 버금가게 거창한 것으로 치러졌다는 얘기다. 김미영 연구위원 역시 “지금의 명절 제사, 차례라고 부르는 것에는 거품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동네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고 간단히 조상에게 인사를 하는 차례상을 올리는 것을 현대식으로 바꿔 보자. 온 가족이 명절에 한자리에 모여 떡국이나 송편 같은 전통 음식을 나눠 먹는 것으로도 ‘차례’의 의미는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과일 조금, 떡국 한 그릇에 온 가족이 함께 절을 올리는 것으로도 차례상을 차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여성이 배제될 필요도 없다.
   
   제사도 마찬가지다. 대개 여성들의 명절증후군을 줄이기 위해 “남자도 제사 준비를 도우라”는 충고를 많이 하지만 ‘돕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제사 방식에 따르면 남자들이 제사에서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 제사의 규모도 그렇다. 김미영 위원은 “원래 ‘주자가례’, 도암 이재가 쓴 예법서 ‘사례편람(四禮便覽)’ 같은 원전에 비춰 봐도 우리 제사는 무척 화려하다”고 지적했다.
   
   “흔히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원래 차례와 제사의 모습이 어땠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고 과장돼 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될 겁니다. 온 가족이 모여 새해 첫날을 맞는 그 의미 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리고 자손들을 격려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간조선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