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학전 대표가 연극 ‘지하철 1호선’의 재개를 알리고 있다. ⓒphoto 학전
김민기 학전 대표가 연극 ‘지하철 1호선’의 재개를 알리고 있다. ⓒphoto 학전

얼마 만일까, 타인들의 잔치를 끝까지 지켜본 게 말이다. 지난 2월 26일 서울 혜화동 학전소극장. 극단 학전의 신년회 자리였다. 대학로 연극계 터줏대감인 그 학전이다. 200명 가까운 관객이 작은 극장에 둘러앉았다. 김민기(67) 학전 대표가 등장했다. 구깃한 면바지에 매일 신는 듯한 주름 깊이 잡힌 로퍼 차림이었다.

학전의 대표작 ‘지하철 1호선’의 운행 재개를 알리는 자리기도 했다. 1994년 초연 이후 2008년 12월 31일 막을 내릴 때까지 15년간 4000회 공연한 작품이다. 독일 원작을 한국 실정에 맞게 번안했다. IMF 사태 후 한국 사회를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담았다. 거쳐간 배우와 연주자만 300여명, 70만명 넘는 관객이 ‘탑승’했다. 10년 만에 왜 다시 ‘지하철 1호선’일까. 김 대표가 느릿한 어조로 설명했다. “학전이 올린 작품 15편 중 9개 작품을 다듬으려 한다. 모두 정리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2〜3년은 신작 대신 이 9개 작품을 총정리할 계획이다. ‘지하철 1호선’이 시작이다.”

사실, 이날 눈에 띈 건 무대가 아닌 관객석이었다. 1000회 넘게 학전 무대에 선 배우부터 15년 전에 잠깐 일했던 직원까지 학전과 길고 짧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김민기와 신정동 야학을 함께 꾸려나갔던 지인들, 사비로 구룡마을 아이들에게 학전표 아동극을 보여준 경기고 동창, 극단에 음향 콘솔을 기증한 치과의사 같은 이들이었다. 가수 김광석의 형 김광복씨와 김광석 노래를 작곡한 강승원(‘서른 즈음에’)·한동준(‘사랑했지만’)씨도 보였다. 김광석은 학전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학전 뮤지컬 ‘개똥이’ 음반 작업에 참여하면서였다. 관객의 면면에 김민기와 학전의 지난 궤적이 담겨 있었다. 김 대표는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되뇌며 나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김 대표는 학전이 제작한 작품을 하나씩 소개했다. 아동극이 많은 게 눈에 띄었다. 15편 중 13편이 아동과 청소년 얘기를 다뤘다. 왜 아동극에 천착할까. 김 대표의 설명은 이렇다. “한국엔 아동을 위한 제대로 된 문화 콘텐츠가 없다. 어른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해 아이들을 웃기는 건 나쁜 감정과 생각을 아이들에게 주는 거다. 어른이 뭐 하나라도 아이보다 나아야 하지 않나.”

출연배우들이 무대로 나왔다. 학전과 김 대표에 대한 에피소드를 제각기 털어놨다. 갑자기 김 대표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배우들이 극단을 위해 돈을 모아서 주기도 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배우와 스태프들이 아예 학전을 위한 모금 통장을 하나 개설했다고 한다. 제작비까진 아니더라도 식대라도 보태고 싶어서라고 했다. 연극계에서 학전은 조금 독특한 곳이다. 학전 연출부에서 일하기도 한 이황의 배우의 말이다. “연출부로 일하면서 학전 정직원이 됐다. 4대보험이 되니 전세자금대출이 되더라. 직원에게 4대보험을 가입시켜주는 곳은 국립·시립 극단 빼곤 연극계에선 학전밖에 없다. 출연 계약도 마찬가지다. 다른 극단들이 구두로 출연 계약을 할 때, 학전은 반드시 서면 계약을 했다.”

행사가 끝난 후 극장 3층에서 단출한 술자리가 열렸다. 과묵한 걸로 알려진 김 대표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신년회의 여운이 남은 듯했다.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미투’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김 대표는 “더러운 얘기 꺼내지도 말라”며 일갈했다. 몇 자리 건너에선 김 대표의 아내가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언이란 걸 하기 힘든 시대지만, 이날의 학전은 ‘미투 청정 지대’로 보였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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