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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여울의 예술기행] 고흐의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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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499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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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예술기행]고흐의 아를

뜨거운 햇빛 광기의 달빛에서 자신만의 빛을 끌어내다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저자  / 사진 이승원    

01 고흐의 걸작 ‘밤의 카페 테라스’의 실제 배경이 된 반 고흐 카페에는 고흐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온 여행자들이 북적거린다.
02 아를의 엽서가게에서 판매 중인 고흐의 그림엽서. ‘밤의 카페 테라스’라는 고흐의 그림 그대로, 그 옛날 카페는 타오르는 듯한 고흐 특유의 노란색으로 단장하고 있다.
03 반 고흐 카페에서 메뉴판을 열심히 보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 어린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여행이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가가 태어난 고향, 그가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글을 쓴 장소들, 그가 사랑에 빠지거나 가족을 일구거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한 장소들, 그가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가꾸어나가고, 텃밭이나 정원을 일구며 생의 찰나성과 예술의 영원성을 사유하던 곳들. 그 모든 ‘예술사적 사건’의 장소를 탐험하는 여행은 아무리 떠나고 또 떠나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런 여행은 필연적으로 ‘공부’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공부란 철저히 자발적인 것이기에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다. 내가 사랑한 작품들, 내가 동경하는 예술가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은 단지 ‘장소에 대한 사랑’을 넘어 작가에 대한 사랑,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 깊고 향기로워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괴테,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등의 작가들뿐 아니라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등 화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그리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레드릭 쇼팽 등의 음악과 연관된 장소들을 여행하다 보면,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들이 마치 우리 곁에서 아직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는 듯한 행복한 환청이 느껴진다. 예술가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성찰과 배움의 여행, 그 첫 번째 여행은 빈센트 반 고흐가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낸 장소이자 그가 가장 쓰라린 좌절의 시기를 경험한 곳, 프랑스 아를이다.
   
   아를에서 고흐는 인생에서 최고의 나날들과 최악의 나날들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최고의 나날들’은 고흐의 화풍과 색채가 절정에 다다른 곳이 바로 아를이었기 때문이고, ‘최악의 나날들’은 고갱과의 악연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든 곳도 바로 아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나날들 속에서도 고흐는 변함없이 뼈저린 외로움을 경험하며 ‘나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절망을 느껴야 했고, 최악의 나날들 속에서도 그는 최고의 작품들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나는 고흐가 그토록 예찬했던 아를의 색채가 특히 궁금했다. 아를의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빛, 나무들과 꽃들이 저마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빛을 뿜어내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들이 뿜어내는 살아있는 광채. 그 모든 것들이 궁금했다. 첫 번째 아를을 방문했을 때는 날씨가 내내 흐려서 ‘이럴 수가, 내가 생각했던 그 고흐스러운 금빛 노랑과 타는 듯한 파랑은 어디 있을까’라고 투덜거리며 실망했지만, 두 번째 아를을 방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고흐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를의 색채를 느낄 수 있었다. 1년에 300일 이상이 맑고 화창하다는 축복받은 땅 프로방스의 중심, 아를의 색채. 그것은 길가의 해바라기들마저 ‘고흐빛 노랑’으로 보이는 행복한 착시였고, 밤하늘의 별마저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의 해맑은 군청색으로 보이는 즐거운 환상이었다.
   
   아를을 걷다 보면 ‘아, 저 사람 고흐 같은데’ 싶은 그림자의 실루엣이 그려진 안내판이 많다. 화구를 둘러멘 고흐의 그림자를 그린 안내판이 아를 곳곳에서 그의 발자취를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뭐가 좀 잘 안 보인다 싶으면, 고흐의 실루엣을 그린 그 현판을 찾으면 된다. 또한 아를에는 유난히 해바라기가 많은데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금빛으로 타오르는 해바라기 또한 아를의 트레이드마크다.
   
   
   연간 300일 이상 맑고 화창
   
   고흐는 ‘미친 화가’라는 이유로 아를에서 핍박받고 마침내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났지만, 고흐는 아를 사람들조차 모르는 아를의 아름다운 색채를 새롭게 발견해냈고, 고흐의 예술세계 자체가 지금 아를을 기념비적인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고흐는 아를의 풍경조차 바꾸었다. 고흐가 밝은 색채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묘사한 기념비적인 작품 ‘랑글루아다리’는 고흐 때문에 새롭게 복원되었다. 고흐가 보고 그렸던 바로 그 다리는 사라졌지만, 고흐의 랑글루아다리를 보고 싶어하는 여행자들 때문에 오히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새롭게 복원한 랑글루아다리가 오늘날 또 다른 관광 스폿이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흐가 묘사했던 아를의 모든 풍경들은 아를 사람들에게는 그저 늘 바라보는 일상이었지만 예술가의 눈을 통해 아를의 풍경은 새로운 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고흐가 고갱과 함께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노란집’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아를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시내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노란집을 그린 고흐의 아를 시절을 안내하는 현판이 보인다. 고흐에게 엄청난 하숙비를 청구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린 아를의 첫 번째 집주인이 고흐를 좀 더 친절하고 공정하게 대해주었더라면 고흐가 귀를 자르고 고갱과 헤어졌을 때 거의 모든 아를 주민들이 들고일어나서 ‘고흐를 추방하자’는 끔찍한 한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아를 사람들이 조금만 더 고흐를 이해해주었더라면, 조금만 더 그에게 친절과 배려의 몸짓을 보여주었더라면, 고흐는 그토록 절망한 채로 생레미 요양원으로 떠나지는 않았을 것만 같았다.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르고 자발적으로 들어갔던 아를의 요양소에서 나는 비로소 고흐가 그토록 강렬한 색채로 그려냈던 해바라기의 향연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고흐의 ‘노란집’은 없어졌지만 이 요양원만은 아직 ‘살아있는 노란집’이 되어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곳 또한 지금은 ‘고흐가 그렸던 그 풍경’ 그대로 새롭게 복원되어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고흐가 아니었더라면 용도변경이 되었거나 철거될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었다.
   
   고흐의 엽서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는 아를의 명물 중 하나다. 워낙 엽서가게가 많아 차별화가 될 것 같지 않지만, 매번 걸음을 멈춰 서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고흐 엽서는 없나’ 하고 꼭 들여다보고 한두 장씩은 쟁여두게 된다. 엽서만이 지닌 매력이 있다. 바로 ‘만질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이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흐의 그림은 결코 만질 수 없지만, 고흐의 엽서들은 이렇게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으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아있는 고흐 컬렉션인 셈이다. 엽서를 만져보면 고흐의 따스한 열정과 아를에 대한 사랑이 더욱 친밀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종이로 만든 엽서만의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뒤 들어간 아를의 정신병원은 고흐의 발자취를 찾는 사람들의 명소가 됐다.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시선으로…
   
   아를의 원형경기장은 로마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역사적 장소다.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보존 상태가 훨씬 좋은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이기 때문이다. 아를의 도심으로 걸어 들어가면 웅장한 위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원형경기장의 스펙터클을 만날 수 있다. 8월에 아를을 방문했더니 놀라운 규모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축제는 바로 ‘말들과 함께하는 아를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서커스처럼 보여주는 행사였다. 사람들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말들과 인간의 역동적인 어우러짐을 바라보았다. 무료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부담 없는 마음으로 들어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말들을 보았다. 수백 마리의 젊고 씩씩한 말들은 때로는 인간과 함께, 때로는 자기들끼리 멋진 포즈를 취하며 ‘달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고흐는 상처 입은 내면아이의 표정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자주, 더 깊이 마음의 내상을 입곤 했다. 시엔과 함께한 나날들은 고흐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지만, 가족들과는 극복할 수 없는 갈등의 골을 만든 시기이기도 했다. 고흐로서는 시엔이 창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들이 그녀와의 동거를 반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시엔과 함께 살아가며 느낀 삶의 충만함, 그것은 고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행복이었다.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흐는 행복을 느꼈다. 그만큼 그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시엔을 어떻게든 고흐에게서 떼어놓으려 했고, 그전까지만 해도 형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던 테오마저도 강하게 반발하며 고흐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놓으려 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항변한다. 그럼 추위와 외로움에 떨고 있는 그 여자를 그렇게 길거리에 내버려두어야겠냐고. 아기까지 가진 그녀가 (그 아이는 고흐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토록 공포와 외로움에 떨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냐고. 이렇게 아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행복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마저 슬프고 우울하게 다가오곤 했다. 그는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이었으므로.
   
   아를에 머물렀던 시절은 고흐의 광증이 심각하게 진행된 시기였지만 고흐의 광기가 그로 하여금 더 위대한 작품을 그리게 했다는 세간의 평가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를 치료했던 의사도 고흐가 완치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했고, 오베르쉬르 우아즈에 도착한 직후 몇 주간의 몸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무엇보다도 한여름의 아를과 생레미를 걸어 보니 더더욱 고흐의 광기와 쇠약함이 오히려 더 나은 작품을 그리게 했다는 세간의 평가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일단 아를과 생레미의 여름은 길고 뜨겁고 힘겹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이젤에 말뚝을 박아 지표면에 캔버스를 고정시켜놓고 맹렬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고흐의 열정은 결코 나약한 정신과 신체로는 해내기 어려운 고강도의 작업이다.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야외작업을 고집했던 고흐의 몸과 마음 상태가 강인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놀랍도록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흐로 하여금 ‘밝은 색채의 힘’을 발견하도록 이끈 장소도 바로 아를이다. 고흐는 아를 이전에는 어두운 색채를 향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두운 색채 안에 숨은 다채로운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이 고흐의 재능이자 동시에 고흐의 작품이 팔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흐의 재능을 알고 있던 테오는 형이 어두운 색채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당시 컬렉터들의 취향을 반영한 판단이기도 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흐는 아를의 밝은 색채에 진심으로 감복했고 드디어 밝은 색채가 지닌 고유의 힘을 자신의 캔버스에 마치 춤을 추듯 흩뿌리기 시작했다. ‘랑글루아다리’ ‘아를의 여인’ ‘라크로의 추수’ 등 걸작이 쏟아진 곳도 바로 이 아를이었다. 아를이 뿜어내는 눈부신 색채의 마법이 고흐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밝은 색채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씻어냈다.
   
   고흐는 그림자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 일하면서도 그늘을 찾지 않았다. 오직 그 순간 그 하늘, 그 밀밭, 그 타오름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으니까. 한 번뿐인 빛, 한 번뿐인 색채의 아우라를 그려야 했으니까. 그는 편안한 휴식처가 아니라 더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극을 원했다. 오로지 더 많은 캔버스, 더 많은 물감,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표정을 지닌 모델들을 필요로 했다.
   
   
▲ 고대 로마시대의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아를 시내 한복판에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광기? 고흐 안의 빛!
   
   내가 고흐의 작품을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가 육체의 병마와 정신의 고통 속에서도 날마다 더 나아지고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가 결국 테오의 품에 안겨 영면한 오베르쉬르 우아즈에서도 처음 몇 달 동안은 최고의 컨디션으로 작업을 했고, 주치의이자 멘토의 역할을 했던 가셰 박사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버린 이후에도 끊임없이 걸작을 쏟아냈다.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르는 채. 그가 현대 회화사에 얼마나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는지도 모르는 채.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작업에 열중했다. 나는 ‘광기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광기에도 불구하고 걸작을 남긴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고흐의 광기는 그의 일부이거나 일시적인 질병이지 결코 그의 페르소나나 정체성이 아니다. 그는 광기의 도움을 받아 걸작을 쏟아낸 것이 아니라 광기의 달빛 아래서도 자기 안의 햇빛을 끌어내어, 내면의 고통을 예술의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나의 이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아를 여행이었다. 아를의 따가운 햇빛, 그러나 바로 그 따가운 햇빛 아래서만 비로소 ‘고흐다운 빛’을 발하는 수많은 꽃들과 나무들과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고흐가 발견하고 창조해낸 새로운 예술의 색채였으므로. 고흐의 걸작을 만든 진정한 내면의 힘은 광기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고흐 안의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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