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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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넘게 살면서 한 번도, 30년째 글밥을 먹으면서 눈꼽만큼도 의심해본 일이 없다. ‘세종은 성군(聖君)이다’라는 명제를.

이영훈(67)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을 접하면서 모든 게 무너져내렸다. 책장을 넘기면서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실증 자료 앞에 반석 같았던 ‘성군 세종’이라는 통념은 맥을 추지 못했다.

실증사학자인 이 교수는 지난해 서울대에서 정년을 했다. 그는 한국 노비 2000년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다. 지난 3월 20일 오전 서울 관악구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영훈 이사장을 만났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노비와 기생이다. 17세기 중엽 조선 인구 1200만명 중 30~40%가 노비였다. 또한 1663년 한성부(현 서울) 호적을 보면 73%가 노비였다.

- 한 사회에서 노비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인간 예종(隷從)이 심했다는 거죠. 조선시대 인간은 자유인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양반 사대부와 중인들이 모두 노비를 소유했죠. 다른 인간을 노예로 부리면 그들 역시 자유인이 아니죠.”

- 17세기 중엽에 한성부의 노비가 73%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군요. “그만큼 노비적 종속이 심각했다는 얘깁니다.”

1442년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한 노비고소금지법을 만들었다. 또한 세종 때인 1432년 만들어진 종모법은 노비제의 기틀을 놓은 법이다.

- 그 시대에는 누구나 인간의 의식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 아닌가요. “고려시대에도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노비는 주인에 대해 법적 권리를 갖고 있었죠.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어떤가요. 송의 황제는 노비제를 폐지했죠. 그런 시대 상황에서 세종은 노비의 법적 권리를 박탈한 겁니다. 노비를 짐승의 반열로 내쳤던 겁니다.”

-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등으로 백성을 어여삐 여긴 임금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환상인 거죠. 세종 때에 이르러 노비 인구가 당초 10% 미만에서 30~40%까지 증가했어요. 이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들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죠. 이를 무시한 채 세종은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류를 이룬다, 인권을 고양했다 등의 얘기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 노비 연구 권위자로서 삼국시대 노비와 조선의 노비는 무슨 차이가 있었나요. “삼국시대 노비는 조선시대 노비처럼 사고 팔리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힘이 약한 사람이 힘 센 상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당신의 노(奴)가 되겠다고 했죠. 자유의지에 의한 엄연한 계약관계였어요. 하지만 조선시대 노비는 그런 계약관계가 아니었어요.”

- ‘기생제는 한국사의 개성적 특질’이라고 썼던데요. 무슨 말인가요. “특정한 여인들에게 춤·노래와 함께 성접대의 역(役)을 지게 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어요. 중국에도 기생이 있었어요. 하지만 특정 여인에게 성접대의 역을 부여하고 기생의 신분을 그 딸에게 세습하는 제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성접대의 역을 부여하고 영원히 세습시킨 나라가 세계사에 또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인간 특정 부류에 대한 인간 예종의 관념이 깊었습니다.”

세종은 1431년 관비(官婢)가 양인 남성과 낳은 자식 중 딸은 기생, 아들은 관노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한다. 또 1437년에 국경지대의 군사를 위로할 목적으로 기생을 두라는 지시도 내렸다.

- 그게 세종만의 사고방식이었을까요. “시대적 추세는 있었겠죠. 그런 추세를 이어받아서 세종이 법제화를 결정한 거죠.”

- 역사학에서 경제사적 관점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현실정치를 보면 정치 분쟁이 일어나는 문제가 결국 전부 경제 문제 아닙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3분의 2 이상 되지 않나요. 그걸 빼놓고 역사를 얘기하면 올바른 역사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죠.”

- 그러고 보니 기존의 세종 관련 책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기술한 게 기억에 없네요. “과학기술을 장려했고 음악을 만들고 한글을 창제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예제(禮制)와 형식을 강조했을 뿐이죠. 세종이 얼마나 학문이 깊었고 글씨를 잘 썼고 그림을 잘 그렸는지만 묘사했죠. 그 경제적 배경에 어떤 게 있었는지에는 눈을 감았죠.”

- 역사 이해에서 정치사적·문화사적 관점을 중시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 수가 있나요. “관념적으로 과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구의 30~40%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정치 체제와 경제적 기초를 무시하고 세종과 양반의 관계만을 주목해 본다면 민주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죠. 그것만 보면서 세종이 얼마나 양반을 우대하고 사대부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을 존중했는지 얘기합니다.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양반 밑에 다수의 백성이 인간으로 취급당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로마 사회가 민주주의를 했지만 그 사회는 분명히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잖아요. 로마 사회를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보지 않잖아요. 우리는 왜 조선시대를 얘기하면서 경제적 기초는 보지 않고 국왕과 양반의 관계로만 보느냐는 겁니다.”

- 정치사와 문화사로 경도된 이유가 뭐라고 보나요. “한국의 민족주의죠.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민족인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우수한가. 이런 것을 적절한 수준에서 강조하는 건 필요하지만 과장해서는 안 되지요.”

- 고려에서는 천제(天祭)를 지냈지만 세종에 이르러 천제를 폐했고, 이것이 사대주의를 강화했다고 했는데요. “고려가 나라는 작고 힘이 약했지만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존재였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왕은 천명을 직접 받는 존재, 정신적으로는 세상의 주인이었죠. 고려의 왕은 제(帝)였어요. 하지만 세종에 이르러 천제를 없애면서 조선의 왕은 황제국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중계받는 제후(諸侯)국이 되었던 겁니다. 조선의 왕은 제후였습니다.”

이 책은 그가 기획하고 있는 ‘환상의 나라’ 시리즈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 환상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집단심리라고 했는데요. “어릴 때부터도 내게 세종은 성군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한양가(歌)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세종은 대왕으로 칭했어요. 조선조의 양반들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관념이죠. 조선의 양반들에게 세종은 참으로 지극한 성군이었어요. 오래된 관념이죠. 세종 재위 36년간 양반들은 단 한 명도 처형되지 않았어요. 양반들에게 세종은 너그럽고 자애로운 왕이었죠. 그 의식이 지금까지 쭉 내려오는 겁니다. 대신 양인과 노비는 엄격하게 처형했어요. 세종 때 법집행이 엄해졌다고 하죠. 신분 법치를 한 거죠.”

- 무엇이 잘못돼 이렇게 되었나요. “근대사회가 성립하려면 실증의 토대 위에서 해체할 것은 해체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으로서 지녀야 할 역사적 기억을 재편성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과정이 빠졌죠. 그 결과 조선조 양반들이 가졌던 관념을 그대로 계승한 겁니다.”

- 조선조 국왕 중에서 어느 임금을 성군이라고 평가하나요. “단연코 영조 임금이죠. 서민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 정책을 펼친 국왕이었습니다. 노비제를 해체한 사람이 바로 영조잖아요. 영조 이후에 노비 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져요. 사도세자 건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가정사일 뿐이죠.”

- 주변에서 왜 세종의 잘못한 점을 굳이 드러내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웃음) 많죠. 하지만 역사학자는 어떠한 터부도 해부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읽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의 지성이죠. 저는 실증사학자로서 본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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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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