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의 뮌스터 광장에 서 있는 베토벤 동상.
독일 본의 뮌스터 광장에 서 있는 베토벤 동상.

천재 피아니스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영화 ‘샤인’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헬프갓.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안녕 데이비드’에서 이런 대사를 만났다. “세상에는 외톨이가 필요해요. 세상엔 똑같은 장단에 맞장구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보다 독창적이고 덜 겸손하며 규율이나 규칙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요.”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데이비드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였다. 데이비드는 언뜻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인다. 마치 6살쯤에서 정신적 성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어른스러움’이나 ‘절제’ 같은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의사는 ‘데이비드는 무슨 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부인의 고민도 들어주고, 두 사람과 식사도 같이 하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함께 상의한다. 그는 약을 처방하거나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환자와 함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데이비드는 남의 집에서도 뭔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면 자기 주머니에 몰래 넣기도 하고, 공식석상에서 연주를 할 때도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콜라를 아내가 못 먹게 할까봐 옷 속에 몰래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여준다. 그는 단지 혼자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들 중 누구도 그를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끝없는 사랑과 배려와 기다림 속에 그의 재능이 훨훨 타오른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꾸만 평생 고독과 불안 속에 살았던 베토벤이 떠올랐다. 베토벤에게 저렇게 다정한 친구들과 의사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외톨이이자 패배자

요새는 이렇게 ‘외톨이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베토벤의 시대에 외톨이는 곧 패배자였던 것 같다. 베토벤은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불편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세계와 자아의 불협화음’ 속에서 베토벤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베토벤의 생애’를 쓴 역사학자 로망 롤랭은 이렇게 말한다. ‘베토벤의 생애’는 학문적 목적을 위해서 쓴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이것은 상처 입은 영혼에서 태어난 하나의 노래라고. 실의에 빠져 있던 로망 롤랭은 베토벤의 슬픔과 고뇌와 환희를 담은 음악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치유했고, 무릎 꿇고 있던 자신의 마음은 어느새 베토벤의 억센 손에 이끌려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힘찬 손에 이끌려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베토벤의 음악만큼이나 그의 굴곡 많았던 생애가 나를 위로해주던 순간도 많았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 잠시 체류 중이던 나는 베토벤의 고향 독일 본으로 가기 위해 우선 쾰른에 들렀다. 본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교통의 요지인 쾰른에 먼저 들러 그 유명한 쾰른대성당을 잠시나마 눈에 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쾰른은 물론 하루에 다 보기에는 큰 도시였지만 부지런히 답사를 한 덕분에 쾰른대성당과 박물관, 강을 끼고 도는 공원 광장 등을 충분히 관람하고 본으로 갈 수 있었다. 유레일패스를 이용한 자유로운 기차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이렇게 중간에 어느 역에서든 내려 잠시 산책을 하고 몇 시간 뒤든 당일에만 다시 목적지가 같은 다른 기차를 타면 된다는 점이다. 때로는 이렇게 잠깐씩 내린 경유지에서 보석 같은 여행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파리에서 쾰른까지는 기차로 3시간이 좀 넘게 걸리는 반면 쾰른에서 본까지는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된다면 쾰른과 본에서 각각 사흘 정도씩 머무르면서 작은 장소들도 샅샅이 찾아보고 싶어졌다.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는 기차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다. 나는 조금 헤매더라도 기차역에서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웅장한 대성당이 시야를 압도하는 쾰른을 보고 와서 그런지, 한적한 본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하고 고적하게 느껴졌다. 베토벤하우스에 도착하니 우선 주변 건물들과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소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지금은 그나마 베토벤의 생가라는 이유로 특별하게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라 말쑥하게 단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베토벤이 태어난 당시에는 매우 초라하고 외진 곳이었다고 한다. 베토벤 생가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쉽지만 정원에서만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소리 또한 정겹게 느껴졌다.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 마당.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 마당.

상처 입고 머물던 다락방

베토벤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대중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했다.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며, 바이올린 하나 달랑 든 채 골방에 갇혀 지내기도 했던 어린 베토벤의 상처를 생각하며 집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워낙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런 우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세심하게 가꾸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가난과 비참의 흔적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린 베토벤이 주로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2층 다락방은 아주 비좁고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다. 생가 곳곳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나지막이 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음악을 들으며 걷느라 발걸음이 느려지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미소를 머금게 했다.

베토벤하우스의 명물 중 하나는 정원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다채로운 베토벤 두상들이다. 온갖 예술가들이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로 빚어낸 베토벤의 조각상은 베토벤의 고독과 불안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토벤 두상을 수없이 관찰해 보았다. 새삼 남아 있는 베토벤의 얼굴 중에는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토벤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웃을 때조차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웃음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의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보이고 있던 표정은 바로 우울과 고뇌의 표정, 사라질 줄 모르는 슬픔의 표정이었다.

약혼까지 했던 연인 테레제와 헤어진 뒤, 베토벤은 엄청난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자신을 가엾은 베토벤이라 칭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너를 위한 행복은 없다. 이상의 나라에서만 너는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을 탄식할 때조차도 베토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보았다. “너는 이미 너 자신을 위해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너에게 남아 있는 오직 너의 예술 속에 있을 뿐이다.”

베토벤하우스를 나와 시청 광장 쪽으로 걸어가니 우체국이 보이고, 멀리서부터 커다란 베토벤 동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베토벤의 동상 앞에 있는 카페에 앉아 저물녘의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해 저무는 거리에서 어린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천재적인 음악가가 되고 싶은 꿈’을, 나아가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펼쳐 보일 꿈을 꾸지 않았을까.

오스트리아 빈의 광장에서는 민속춤을 추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광장에서는 민속춤을 추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빈 음악박물관에서의 체험

‘베토벤으로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모차르트로 가는 길’ 위에서였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잘츠부르크는 여기도 모차르트 카페, 저기도 모차르트 음악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빈에서도 가장 많이 파는 초콜릿이 바로 메추리알만 한 크기의 모차르트 초콜릿이다. 빈에서도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의 의상을 입고 공연을 광고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베토벤은 이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못 받는 걸까’ 하는 아쉬움이 자리 잡았다. 아마도 ‘돈 조반니’ 등 다양한 오페라로도 발을 뻗었던 모차르트의 대중적 친근함이 베토벤의 고뇌하고 침잠하는 음악보다는 훨씬 편안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빈에서 베토벤의 흔적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소가 하나 있다. 바로 ‘빈 음악박물관’이다. 빈 음악박물관에 가면 베토벤뿐 아니라 바흐, 헨델, 슈베르트, 멘델스존은 물론 말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빈 음악박물관(Haus der Musik)은 빈 중앙역에서 도보로 30분, 택시로는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여행객들이라면 시내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대여용 자전거를 타고 가도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라 부담이 없다. 빈 음악박물관에 가면 누구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멋진 경험을 해볼 수 있는데, 가상의 오케스트라를 디지털 지휘봉에 연결하여 음악을 지휘하는 체험이 아주 재미있었다. 지휘자 주빈 메타가 화면 속에 등장하여 지휘의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음악뿐 아니라 ‘소리’ 자체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클래식 음반을 무료로 들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 오케스트라의 명연주 실황, 기념비적인 오페라 공연 등을 커다란 화면과 최고의 사운드로 들어볼 수 있는 극장도 박물관 내부에 있다. 나는 이곳에서 베토벤의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 베토벤의 얼굴을 직접 본뜬 데드마스크를 볼 수 있었다. 물론 하일리겐슈타트로 직접 가서 베토벤의 흔적을 찾아본다면 더욱 좋겠지만 다른 취재 일정이 밀려 있어서 하일리겐슈타트에는 가볼 수 없었다. 그 아쉬움을 이곳에서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

빈 교외에 있는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나기 전, 베토벤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젊었을 때부터 앓아오던 귓병이 점점 심해져 거의 청각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간 누구에게도 그 고통을 말하지 못했다. 사교생활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더욱 외톨이가 되어버린 베토벤은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벌써 2년째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네. 사교생활 일체를 멈춰버렸다네. 사람들에게 ‘나는 귀머거리요’ 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네.”

빈 음악박물관에서 만난 베토벤 뮤직박스.
빈 음악박물관에서 만난 베토벤 뮤직박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그는 청각을 잃어버리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 때문에 공포를 느꼈다. “내 귀가 안 들리는 것을 그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 수많은 적들이 말일세.” 하지만 의사의 권유로 한적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게 된 베토벤은 죽음을 각오한 채 유서를 남기게 되고, 오히려 그 유서를 쓴 뒤에 예전보다 훨씬 폭발적인 창조력으로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우리는 음악가 베토벤을 넘어 인간 베토벤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음악가로서 청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절망한 나머지 죽음까지 생각하지만, 예술에 대한 갈망 때문에 차마 죽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 글의 형태는 동생에게 남기는 ‘유서’이지만, 오히려 이 글은 베토벤 스스로가 죽을 각오로 살아남아 반드시 위대한 음악을 창조하겠다는 출사표로 다가온다. 그는 무덤 속에서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은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설령 일찍 죽게 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펼쳐 보인다.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이여, 올 테면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를 용감히 맞아들이리라.”

로망 롤랭은 자신이 베토벤의 인생을 통해 구원의 힘을 얻었듯, 독자들도 베토벤의 삶과 음악에서 희망을 발견하길 바랐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러므로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인류의 위대한 사람들이 그대들 곁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 우리 자신을 북돋우자. 그리고 우리가 너무 연약할 때는 그들의 무릎 위에 잠시 머리를 고이고 쉬자. 그들은 우리를 위로해줄 것이다.” 베토벤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불행한 사람들은 한낱 자기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현실의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고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얻으라.”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되는 음악, 그것이 베토벤이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빈은 베토벤에게 애증의 도시였다. 분명 베토벤이 청각을 거의 상실했을 때 피땀 흘려 작곡한 제9교향곡으로 음악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베토벤에게 들어온 수입은 한 푼도 없었다고 한다. 세속적인 빈의 청중들조차도 제9교향곡 ‘합창’의 압도적인 웅장함 앞에서는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로시니 유의 가벼운 오페라로 유행을 따라가고 말았다. 빈의 세속성과 유행의 덧없음에 절망한 베토벤은 영국으로 가서 제9교향곡을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굴욕과 슬픔이 베토벤의 우울을 더욱 심화시켰다. 하지만 그 어떤 권력자도 베토벤의 음악에 굴레를 씌울 수는 없었다. 베토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성격으로도 유명했는데, 그는 정부사람이든 경찰이든 귀족계급이든 가리지 않고 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곤 했다. 베토벤은 지상에는 자신의 나라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나라는 오직 하늘에 있다고도 말했다. 때로는 어느 하늘 아래 내 몸을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그 어떤 지상의 땅덩어리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만 희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위로를 받곤 했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배운다. 마치 불행과 고뇌라는 흙으로 빚어진 것 같은 사람, 이 세상에서 어떤 안락한 보금자리도 갖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스스로 행복을 창조할 힘이 있음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슬픔이 아닌 희열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오늘도 베토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음악이라는 용광로에서 구워내어 눈부신 환희의 송가를 연주해낸다.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저자 /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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