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의 붕괴로 40여년의 냉전이 종식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포착한 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1992)이다. 역사의 종말이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역사는 정반합(正反合)의 발전을 멈췄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역사가 마침내 종착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종말론은 서구의 가치가 지구상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세계는 보편성에 따라 일체와 평화를 누릴 것인가. 이에 대해 정치학적인 측면에서 단호하게 ‘노(No)’라고 외친 것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1927~2008)의 도전적 논문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1993)이다.

이 논문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헌팅턴은 그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이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편’(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1996)이다. 그의 주장은 흔히 문명충돌론으로 불렸다. 이 말이 워낙 널리 회자되다 보니 우리말 번역(1997)은 제목을 아예 ‘문명의 충돌’이라고만 붙였다.

냉전시대에는 정체성이 동서 이념 중 택일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나는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문명이나 종교와 관련되는 물음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눌려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문명이 강렬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충분히 답할 만한 문명권은 대략 여덟 개 정도 존재한다. 그것은 서구 기독교권(미국·유럽), 중화유교권(중국 등), 이슬람권, 정교회권(러시아 등), 힌두권(인도), 일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이다. 서너 개의 상위 문명권은 예외 없이 종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냉전 이후 세계정치는 역사상 처음으로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

사실 서구의 부상(浮上)은 불과 5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사상·가치·종교의 우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요 종교는 모두 비서구에서 발전되었다. 서구의 부상은 오히려 기술적·폭력적 우위를 통해 강제적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서구문화는 물질적 성공을 앞세워 오랫동안 지구상의 지배적 가치로 군림했다.

그러나 서구의 물질적 성공은 더 이상 독점적이지 못하다. 특히 동아시아의 경제적 발전이 눈부시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자신들의 발전 요인을 유교적 가치 속에서 찾으며 동질성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권은 인구 성장과 사회적 동원력을 앞세워 자신의 정체성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핵확산·테러·이민 등을 둘러싸고 서구와 갈등하고 있다.

대체로 서구는 오만하고 이슬람은 편협하고 중화는 자존심이 강하다. 이런 이질적 문명들은 항상 충돌의 위험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다. 오늘날에도 이슬람은 서구를 오만하고 탐욕적이라고 비난한다. 서구는 이슬람을 테러리즘과 골치 아픈 이민 문제의 본거지로 지목한다. 실제로 두 문명의 단층선에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핵심국가가 없어 정치적 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중국의 부상은 서구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한마디로 ‘문명의 가마솥’이다. 중화의 핵심국 중국, 서구의 핵심국 미국, 정교권의 핵심국 러시아, 단일 문명 일본이 직접 머리를 맞대고 있다. 특히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이 대치 중이다. 세계 1, 2위 제국 간 대결은 곧바로 패권 대결로 비화할 소지가 있다.

지난 세기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 이전은 양국 간 문화적 유대감으로 말미암아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격돌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국, 일본 등 주변국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미·중의 힘을 견주어 보며 견제냐 편승이냐를 선택할 것이다.

만약 미국과 중국·일본·동아시아 국가들이 점차 갈등관계에 빠져들고 미국이 중국의 패권화를 저지하려고 개입할 경우 대규모 군사적 충돌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때 유교권과 이슬람권은 자연스럽게 결속을 강화하며 공동으로 서구에 대항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이미 하향세로 접어든 서구의 고립과 위축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서구문명은 보편적이지 않다

서구가 이런 위험을 극복하고 서구의 우위를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서구문명이 보편적이라는 착각과 오만을 버려야 한다. 서구문명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다만 독특할 뿐이다. 특히 기독교, 다원주의, 개인주의, 법치주의, 자유민주주의 등이야말로 서구의 독특한 가치이자 제도다. 서구는 이런 장점들을 굳게 견지하고 수호하고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

또한 특이하게도 서구문명의 핵심국은 둘(미국·유럽)이다. 유럽이 다소 주춤하자, 미국이 곧바로 뒤를 받쳐 서구문명을 유지·발전시켰다. 이처럼 서구문명은 투톱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앞으로도 미국과 유럽 간의 긴밀한 협력과 정체성 확인은 서구문명의 우위에 핵심적 전제조건이다.

헌팅턴은 이슬람을 적대시하고 서구의 공격성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미국 내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에 대한 추모기사에서 “그가 세계적 분쟁의 원인으로 문화를 강조한 것은 9·11 테러 이후 더욱 신뢰를 얻었다”라고 적었다. 다소 논쟁적인 비평이지만 그것이 미국 주류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헨리 키신저도 그의 책이 ‘냉전 이후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했다.

냉전은 40여년 만에 해체되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과감하게 서구문명의 가치와 제도를 수용하여 오늘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통적인 유교문명을 완전히 탈출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우리는 복잡한 갈등구조 속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선택의 폭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그런 선택을 성공적으로 행사해 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또 다른 질서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대체로 서구의 주도로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제국의 부상으로 촉발된 동아시아의 격랑은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런 와중에 돌출된 북핵 문제는 국제질서 재편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다시 결정지을 각축(角逐)이 불을 뿜고 있다. 어느 때보다 탁월한 외교적 역량이 절실한 순간이다.

요즘 우리 외교는 안팎에서 ‘이상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결코 칭찬이 아니다. 외교야말로 무엇보다 ‘현실적’이어야 한다. 헌팅턴은 스스로를 애국자이자 학자라고 불렀다. 그가 쓴 ‘문명의 충돌’은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적나라한 시각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다소 낡긴 했어도 여전히 미국의 유수한 생존전략 중 하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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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전 한국공항공사 상임감사.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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