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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호]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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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한겨울 설중매가 보내온 초여름의 선물, 매실

이지형  작가·푸드칼럼니스트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광양, 하동, 장흥, 고흥, 해남…. 매실 예약을 서두르라는 남도발(發) 메시지들이 올라온 지도 제법 여러 날이다. 5월 중순이니 이제 곧 풋풋한 청매실과 화사한 황매실이 남도 마을들을 플랫폼 삼아 전국 각지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입가심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벌써 혀에 신맛 돌지 않으세요?” 물으면 “실없기는…” 핀잔들 하시려나.
   
   핀잔할 일 아니다.
   
   2000년 전 삼국지 시대의 짧은 에피소드다. 조조가 남쪽으로 군사를 이끌어 가는데, 그때가 여름이었나 보다. 군사들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전쟁은 고사하고 전장까지 행군도 못하게 생겼다. 그때 조조가 외쳤다. “언덕 하나만 넘으면 매실 숲이다. 거기서 매실을 따먹으며 모두 쉬도록 하라!” 매실을 떠올리자마자 군사들의 입에는 침이 돌았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언덕을 가뿐하게 넘을 수 있었고, 매실을 따먹은 뒤엔 행군의 피로까지 단박에 풀었다. 전투에서도 당연히 이겼겠지만, 어느 전투인지는 모르겠다. ‘삼국지’가 아니라 5세기 중국의 콩트 모음집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간략한 일화라서.
   
   매실의 강한 산미(酸味)는 그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을 돌게 한다. 맛보지 않아도 신, 산미의 절대강자 매실. 조조 이전과 이후, 매실의 신맛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올해 예약을 알리는 광고에 붙은 매실 사진만을 보고 입맛 돌았다고, 과장을 나무라는 건 좀…. 그보다 심각한 갈증과 피로를 한번에 없애주는 매실의 톡 쏘는 맛과 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해답을 알기 위해 우리는 매화 얘기부터 해야 한다. 5월의 매실을 논하기 전에 지난 겨울의 매화를 떠올린다. 맑고 찬 달이 구름 사이에서 가까스로 빛을 내던 날, 흐린 하늘 가득 채우며 내리던 눈. 새하얀 달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매화를 향해 달려들면 어디가 꽃이고 어디가 눈인가. 설중매(雪中梅)의 진경이다.
   
   설중매. 차고 맑은 세 글자는 매화의 처연함과 고고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흩뿌리는 겨울 눈 속에서 꽃송이들을 기어이 터뜨리는 매화에 사람들은 반하고 또 반했다. 산중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크지 않은 몸, 이미 시들어 죽은 듯 마르고 꺾인 줄기에서 하얗고(백매) 빨갛게(홍매) 솟아오른 매화는 꽃이라기보다 탄식이었다.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엮이고, 소나무·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엮이는 것은 매화의 한(恨)과 사무침 때문이다. 따뜻한 여름에 화려한 꽃을 토해내는 나무들과는 다르다. 사군자의 고고와 세한삼우의 처연을 몸 깊숙이 아로새긴 채, 매화는 찬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낸다.
   
   여린 꽃잎 안으로 은밀하게 숨긴 그 지독함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아득하게 한 매화 향의 근원이다. 겉으로 드러내고 유혹하는 여름 꽃들의 향기와 달리 은은히 퍼지는 매화의 향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사람을 감싸는 듯하더니 이내 뼛속까지 스며들고 마는 매화 향에 마음 설렌 이는 조선의 실학자 홍만선(‘산림경제’)이었다. 눈 내리는 광야에서 홀로 아득한 매화 향에 거칠고 막연한 미래를 위탁한 이는 시인 이육사(‘광야’)였다.
   
   
   구연산의 화신
   
   암향(暗香),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야말로 매향(梅香)의 다른 이름이다. 찬 공기를 타고 그윽하게 소리 없이 퍼지는 꽃의 향기. 사람들은 영하의 세월 속에서도 절대 떨지 않는 매화를 보며 “혹한의 추위에 얼어 죽을지라도 향기는 결코 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독종이라 해야 할까. 가녀린 몸 하나로 엄동설한을 뚫고 나가는 매화의 그 지독함. 그게 어디로 사라지겠는가. 계절을 넘기고도 그 지독함은 여전히 남아, 초여름의 나뭇가지 끝에 강렬한 맛과 향으로 또롱또롱 맺힌다. 그게 지금 저 멀리 남도에서 우리들의 예약을 기다리고 있는 매실들이다. 꽃 진 뒤 한참을 매달리고도 여태 설익은 초록 매실은 그러니까 지난 겨울 내내 처연하고 고고했던 설중매의 후신(後身)이며 화신(化身)이다.
   
   그런데 매실은 설중매의 화신이기도 하지만 구연산의 화신이기도 하다. 더운 남쪽 지방을 찾은 조조의 군사들이 매실 숲을 지나자마자 원기를 회복했던 건 바로 매실에 풍부한 구연산 덕이었다. 매실 특유의 톡 쏘는 향과 맛 역시, 어쩌면 혹한 속 설중매의 잔향(殘香) 때문이라기보다 구연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주 가끔이지만 옛이야기에 담긴 시적 상상보다 건조한 화학이 진실에 더 근접할 때도 있고….
   
   어떤 과일이든 신맛을 낸다 싶으면 그건 대개 과일 속에 담긴 구연산 때문이다. 레몬, 오렌지, 감귤 모두 그렇다. 새콤달콤한 청량음료의 라벨에서도 ‘구연산’ 석 자는 예외 없다. 매실 역시 구연산의 강자(强者)다. 구연산의 화학을 알면 수천 년 동안 시들지 않는 매실의 인기 이유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다. 식사를 통해 당을 섭취한 뒤 그걸 포도당으로 바꿔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젖산이 나온다. 젖산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과 결합하면서 세포를 굳게 한다. 그게 노화다. 에너지를 얻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늙는다. 사는 건, 매번 늙는 거다.
   
   그런데 구연산이 그러니까 매실이 젖산 생성을 억제한다.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젖산도 분해해 몸 밖으로 내보낸다. 운동을 심하게 할 때 근육에 피로를 느끼게 하는 것도 젖산이다. 구연산, 아니 매실은 노화와 피로를 동시에 잡는다. 수천 년을 이어온 매실의 인기는 아무래도 계속될 것 같다.
   
   매실은 세 가지 독(毒)을 없애준다고도 한다. 음식물의 독, 피 속의 독, 물의 독, 그렇게 셋이다. ‘삼독 제거’ 효능을 들어 매실이 식중독·배탈에도 효과적이란 얘기들을 하지만 ‘식품’의 보조적 효능 정도로 이해해야 함은 물론이다. 어쨌든 ‘화학’의 맥락에선, 피크린산(酸) 성분의 항균작용으로 매실의 해독 능력을 설명한다.
   
   약간의 가공을 거쳐 약으로 쓰이는 건 사실이다. 매실은 오래된 한약재다. 자연 상태의 청매·황매 외에 매실을 부르는 이름으로 오매가 있다. 까마귀 오(烏)를 써서 오매다. 검정 매실을 뜻한다. 청매의 껍질을 얇게 벗기고 짚불의 연기에 그슬린 후 말리면 오매다. 기침과 갈증, 속을 다스려주고 간에도 좋다고 동의보감이 전하는 전통의 명약이다.
   
   오매 말고 금매·백매도 있다. 청매를 쪄서 말리면 금매, 소금물에 절여 말리면 백매다. 백매의 경우 소금물에 열흘쯤 담가 두었다가 건져내 말리는데 그러면 표면으로 가루가 하얗게 올라온다. 오매에 비할 건 아니지만 백매도 속을 다스리는 약재로 쓴다. 약효를 떠나 꽃(매화)도, 열매(매실)도 가히 색의 향연을 펼친다.
   
   
   약과 독
   
   약(藥)과 독(毒) 사이는 멀지 않다. 매실의 싱싱함과 풋풋함은 매실이 품고 있는 ‘독’ 때문에 가능하다. 해충들이 건드릴 엄두를 못 내니 그리도 건강하게 열매를 보존한다. 그런데 매실의 독이 벌레와 사람을 구별해가며 작용할 리 없다. 벌레한테 안 좋으면, 사람한테도 안 좋다. 매실에는 ‘아미그달린’이란 성분이 있는데 이게 청산(靑酸)으로 분해되면서 독이 된다. 벌레 아닌 사람도 청매실을 날로 마구 집어 먹으면 안 되는 이유다. 물론 열매가 충분히 익으면 아미그달린 성분도 줄어들지만 유통·보관의 편의를 위해 우리가 주로 쓰는 게 청매실이니 주의해야 한다.
   
다행히 매실을 날로 먹는 경우는 드물다. 매실청이 가장 일반적인 레시피다. 매실과 설탕을 반반 섞어 충분히 숙성시킨 뒤 매실에서 빠져나온 엑기스, 그러니까 진액을 먹는다. 그리고 이때 아미그달린 성분을 날리기 위해 숙성 기간을 대부분 100일 정도로 잡는다. 독성을 날리기 위한 민간요법인 셈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릴 적, 어머니의 매실청 숙성 기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100일은 고사하고 3~4주도 안 됐던 기억이다. 궁금해서 직접 물어봤다. 매실에 독성분 있는 거 모르셨느냐고…. 미심쩍어하는 아들의 우문(愚問)에 대한 어머니의 답은 현명하고도 간결한 매실청 레시피였다.
   
   “독성분이 주로 씨에 몰려 있다더라. 그래서 숙성시키기 전에 씨를 아예 뺐지. 꼭지를 따고 매실을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내서 칼등 같은 걸로 두드리면 쉽게 갈라져. 그럼 씨를 빼고, 설탕과 일대일로 재두는 거지. 나중에 진액 빼고 남은 매실 열매는 씨도 없으니까 그대로 고추장에 버무려 놓았다가 장아찌로 먹는 거고.”
   
   새콤하고 달콤한 매실청은 여름 내내 피로와 갈증을 풀어주는 주스의 원액이었고, 숙성 후에도 아삭아삭한 매실장아찌는 계절을 타지 않는 밑반찬이었다. 그 밖에 매실식초·매실잼·매실정과·매실차까지, 매실의 쓰임새는 천변만화하는 매화·매실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하다. 일본 요리에 감초로 등장하는 일본식 장아찌 우메보시(梅干し) 또한 빼놓을 수 없겠고…. 아, 매실주를 깜빡했다. 사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매실 1㎏ 기준으로 소주 3~4L를 들이붓고 밀봉해두면 끝이다. 설탕은 취향에 따라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다.
   
   매화와 술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매화음(梅花飮)’ 에피소드가 있다. 조선의 화가 김홍도의 술 인연에 얽힌 얘기다. 누군가 김홍도에게 매화나무를 팔러 왔는데 돈이 없어 사지를 못했다. 속상하던 차에 누군가 그림을 그려달라 해서 그려줬더니 3000냥을 사례한다. 김홍도는 당장에 2000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나머지 돈으론 술을 사 친구들과 밤새 마셨다. 뜰에 막 옮겨 심은 매화 향에 취해 김홍도 무리가 마셨을 술 역시, 황금빛으로 숙성된 매실주 아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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