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공인 세종대왕 어진
정부 공인 세종대왕 어진

1 15~17세기 전체 인구의 30~40%는 노비였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으로서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다. 노비에게는 주인을 고소할 법 능력이 없었다. 이에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조선왕조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노비의 상당 부분이 노예인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범주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대조적으로 고려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범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노비는 전체 인구의 5% 전후였으며, 많이 잡아도 10%를 넘지 않았다. 고려의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재산이 아니었다. 고려 노비의 가격은 조선 노비의 5분의 1에 불과하였다. 이에 고려의 노비는 쉽게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 능력을 보유하였다.

졸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백년동안·2017)에서 나는 조선시대에 들어 노비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노비 인구가 크게 증가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으며 고소하면 목매달아 죽인다는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을 제정하였다. 또한 세종은 비(婢)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출생한 아이의 신분을 노비로 돌리는 종모종천법(從母從賤法)을 제정하였다.

2 이 같은 졸저의 주장에 대해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의 박현모 교수가 ‘주간조선’ 2510호의 지상을 통해 비판을 제기하였다. 세종은 신하들이 건의한 노비고소금지법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그 법을 제정한 사람은 상왕인 태종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내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난하였다. 우선 그에 대해 대답한다. ‘세종실록’에서 관련 기록은 1420년 9월 13일, 1421년 12월 26일, 1422년 2월 3일의 셋이다. 순서대로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 등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하며, 군현의 백성이 수령이나 감사를 고소하면 반역죄와 살인죄를 제외하곤 논하지 말고 무겁게 처벌하자는 두 법을 건의했는데,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전자가 노비고소금지법이고 후자가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다. 1421년 12월 예조판서 허조가 비부(婢夫)와 노처(奴妻)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참형이 아니라 1등 감하여 처벌하자고 건의했는데, 세종이 대명률(大明律)의 해당 율을 잘 살피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1422년 2월, 형조에서 건의하기를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않고 교형에 처하며, 비부와 노처가 고소할 경우는 1등 감하여 장(杖) 100과 유(流) 3000리이며, 백성이 수령과 감사를 고소할 경우 반역과 살인의 죄를 제외하곤 수리하지 말고 장 100과 유 3000리로 다스리자고 했는데,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를 관철한 노비고소금지법과 부민고소금지법이 확정되었다.

연후에 ‘세종실록’의 사관(史官)은 1년 3개월에 걸친 그간의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초 허조가 두 법을 제기하자 임금 또한 옳다고 여겨(上亦以爲然) 의정부에 내렸으며 6조가 이를 의논하였다. 영의정 유정현 등이 반대하기를 “이같이 하면 수령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에 대해 허조는 “수령의 하는 짓은 여러 사람의 이목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백성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반론하였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자 허조는 죽기 몇 달 전인 상왕 태종을 찾아가 이 법이 통과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태종이 그 말에 감동하여 허조의 건의에 따랐다는 것이다.

이제 박 교수에게 묻는다. 첫째 1420년 9월 노비고소금지법이 처음 제기되자 세종이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가. 둘째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결국 허조가 상왕을 끌어들여 결론을 본 것은, 백성과 수령의 관계를 둘러싼 부민고소금지법이 아닌가. 노비고소금지법은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주인을 고소한 노비를 참형에 처한다고 했다가 뒤늦게 대명률에 해당 율이 있음을 알고선 그에 맞추어 교형으로 조정했을 뿐이다.

요컨대 노비고소금지법을 둘러싸고 어떠한 논쟁도 없었으며 세종은 신하들의 과격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였을 뿐이라는 졸저의 서술은 여전히 옳다. 박 교수는 해당 사료를 정확하게 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나를 사실을 왜곡한 사람으로 몰았다. 나는 평생 철저한 실증주의자라는 평판을 쌓아왔으며, 그것 하나로 온갖 비난을 버텨왔다. 나는 박 교수의 그런 비난에 침묵하기 힘들다. 그래서 공개리에 묻는다. 내가 못 본 다른 사료가 있는가. 아니면 사료를 제대로 읽지 않은 박 교수의 부주의나 무능력으로 빚어진 실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세종의 리더십을 홍보하는 직업인으로서 그에 불리한 학설을 지우기 위한 고의적 폄훼인가. 박 교수는 대답해주길 바란다.

주간조선 2510호에서 박현모 교수가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해 비판한 기사를 실었다.
주간조선 2510호에서 박현모 교수가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해 비판한 기사를 실었다.

3 졸저에서 나는 조선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노비제의 전성기인 16〜17세기엔 완벽하게 타당하다. 박 교수는 세종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세종은 노비도 하늘이 낸 백성이며, 이에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그 같은 정신에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했으며, ‘노비구살(毆殺)금지법’을 제정하여 관철했다고 주장한다. 노비고소금지법 이후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증가한 것은 세종이 한탄했던 그대로이다. 그래서 몇 차례 그를 금하고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 또한 사실이다. 나는 박 교수가 언급하는 ‘노비구살금지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느 법전에 실려 있는 무슨 법인가. 가르쳐주길 바란다.

실은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조선왕조는 대명률을 형률로 빌려 썼다. 거기에 노비를 관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죽일 경우 노비에게 죄가 있으면 장 100이고, 죄가 없으면 장 60에 도(徒) 1년에 처한다는 율이 있다. 세종과 신하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그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세종이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한 사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세하게 읽으면 관료의 직첩을 회수하거나 벌금을 내게 하거나 고향으로 쫓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졸저에서 “세종은 노비를 함부로 죽인 양반을 유배형에 처하긴 했지만 금방 풀어주기를 반복했다”고 적었다. 이 말은 주석을 달진 않았지만 ‘성종실록’에 나오는 말로서 당대인의 세종에 대한 기억을 전하고 있다. 그렇게 세종은 양반 관료에 관대하였다. 어느 연구자에 의하면 양반 관료로서 세종에게 처형을 당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세종의 치세 36년은 그러한 세월이었다. 그 사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풍조가 정착하였다. 박 교수에게 묻는다. 세종이 노비를 함부로 죽인 양반을 대명률에 따라 장 60이나 100을 치고 1년간 유형을 보낸 사례가 있는가. 알려주면 고맙겠다.

4 1432년 세종은 비가 양인 남자와 출생한 아이의 신분을 노비로 돌리는 종모종천법을 제정하였다. 그전까지는 태종이 만든 종부종량법(從父從良法)에 따라 아이의 신분은 양인이었다. 그 법이 세종의 발의와 신하들의 호응으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법을 발의한 세종의 문제의식은 천한 비가 남편을 자주 갈아 그 자식이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구분하기 힘든 패륜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호응한 것도 마찬가지 취지에서였다. 졸저에서 나는 이 사실을 소개한 다음, 종모종천법의 제정을 통해 고려왕조 이래 조선왕조 초기까지 이어져온 양천금혼(良賤禁婚)의 빗장이 풀렸으며, 그에 따라 노비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박 교수는 내가 세종이 그 법을 제정한 것은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쓴 것처럼 비난하고 있는데, 졸저 어느 대목에 그런 서술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박 교수의 지적대로 세종과 신하들은 인륜을 바로잡을 목적에서 그 법을 제정하였다. 나는 그것을 두고 세종과 신하들은 노비를 이류(異類)나 금수로 간주했으며, 그러한 편견에서 비의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박 교수는 나의 이 같은 해석을 거부하고, 세종과 신하들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인륜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는 취지로 반론하고 있다. 졸저의 다른 대목에서 썼지만 나는 정조는 여성의 본성이라고 믿는다. 아무 데나 씨를 뿌리고 다니는 것은 남성의 본성이다. 그러한 현대 진화론적 생물학의 설명도 있고 해서 나는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이 그러한 편견에서 비의 성을 마음껏 유린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세종과 신하들의 행위를 인륜을 밝히기 위한 순수 취지였다고 옹호하고 있다. 나는 박 교수가 15세기의 양반 신분인지 21세기의 자유 시민인지 헷갈린다.

5 박 교수는 세종조에 걸쳐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용한 정책이나 법률이 취해진 적은 없으며, 세종은 비와 양인의 결혼을 시종 금지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세상에 어느 임금이 양인과 천인의 결혼을 공공연히 허용한단 말인가. 문제는 양인과 천인의 결혼을 엄하게 단속하거나 당사자나 혼주를 처벌했는가 여부이다. 태종까지만 해도 그러하였다. 양인과 천인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그 소생을 양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세종은 처벌은커녕 그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비 주인의 재산을 불리는 유인을 제공하였다. 가령 오늘날의 부동산투기와 관련하여 정부가 그것을 해도 좋다는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투기 수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상 투기를 용인한 꼴이다. 세종이 바로 그러하였다. 양인과 비의 소생을 비 주인의 재산으로 삼게 했으니 양천교혼을 유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것을 두고 나는 고려왕조 이래 오랫동안 걸려온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었다고 한 것이다.

박 교수는 종모종천법의 제정 이후 노비 인구가 증가했다고 볼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과연 그러했는지는 장래의 연구과제라고 그럴듯하게 제안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인간은 유인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경제학은 그것을 경제인의 행위를 설명하는 공리(公理)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비를 양인과 결혼을 시키면 큰 덕을 보는데 비 주인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둘째 단편적이나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관련해서는 박 교수도 알고 있는 1998년의 졸고를 다시 참조해주기 바란다. 함경도 길주 최씨 양반가의 노비는 1417년에 2명에 불과했지만, 양천교혼 덕분으로 1457년까지 35명으로 증식하였다. 셋째 노비 신분의 세습률에 관해 지난 50년간에 이루어진 제반 연구가 공통으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관련하여 나는 지승종 교수의 ‘조선전기 노비신분 연구’(일조각·1995)를 높이 평가하며 크게 의존하고 있다. 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양인과 노비의 자식을 모두 노비로 돌린 법은 “노비 상혼(相婚)에서 얻어지는 노비 인구의 단순한 자연적 증가를 넘어 양천 상혼의 소생까지 노비화함으로써 노비 인구를 크게 늘리고 그럼으로써 노비 소유의 안정화는 물론 그 규모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지승종 교수의 위의 책, 59쪽)

6 주인이 노비를 돌로 짓이겨 죽이거나 발바닥을 도려내 죽이는 등 잔혹하게 살해할 경우, 대명률은 노비의 가족을 양인으로 해방하라고 명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세종의 관심은 인색하였다. 세종은 노비의 가족을 관노비로 옮기라고 명했을 뿐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나는 조선 경제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을 사숙하였다. 이에 관한 김석형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기막힌 비극과 지옥보다 더한 인종(忍從)의 가혹함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노비는 그의 부모·형제가 그의 면전에서 상전에 의하여 맞아 죽어도, 그의 부모·형제를 찍어 죽이고 코를 자르고 귀를 잘라 죽이더라도 그는 계속 그 상전의 집에서 그 상전의 종살이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세종의 리더십 연구자이다. 그도 좋지만 이 같은 당대 노비들의 처참한 인권 실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졸저는 노비제만이 아니라 세종이 만들어낸 기생제와 사대주의 체제도 다루었다. 졸저에서 지적한 대로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 체제는 한 가지로 얽혀 있다. 그 점을 밝힌 데에 졸저 나름의 학술적 기여가 있다고 자부한다. 남의 연구서를 비평하는 사람은 우선 그 전체적 구성과 논리의 흐름을 파악하고 소개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나는 박 교수가 그런 수준의 논문을 작성하여 학술지에 게재해주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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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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