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야마를 상징하는 대나무숲 ‘지쿠린’.
아라시야마를 상징하는 대나무숲 ‘지쿠린’.

갑자기 나선 길, 만만하긴 역시 일본이다. 거리도 가까운데다, 항공 요금도 내렸다. 저가항공사가 늘어난 덕이다. 인천~오사카 구간이라면, 6월 중순 기준으로 10만원 초반대에도 살 수 있다. 항공 시간대도 다양하다. 소나기가 온다는 기상 예보를 눈여겨보며 교토로 떠났다. 인천~오사카 비행시간은 1시간40분.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1시간이면 교토에 닿으니, 인천에서 대략 3시간이면 교토에 닿는 셈이다.

간사이공항에서 교토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보통 ‘하루카’라는 특급열차를 이용한다. 공항에서 교토역까지 한 번에 간다. 교토 숙소가 리무진 정류장과 가깝다면 리무진 버스도 좋은 선택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외국어로 표를 살 자신이 없다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할 수도 있다. 하루카 표에서 버스 1일권까지 모두 한국에서 사갈 수 있다.

숙소를 미처 정하지 않았지만 별 걱정은 안 된다. 교토를 포함한 오사카 지역 전체엔 숙소가 그야말로 널려 있다. 가격대도 다양하다. 5분이면 그날 밤 묵을 곳을 찾을 수 있다. 숙박 예약 앱을 이용하면 편하다. 게다가 6월은 교토 여행으로선 비수기다. 언제 가도 볼거리가 있다는 교토지만 역시 여행객이 몰리는 건 4월과 11월이다. 벚꽃과 단풍 때문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호텔 예약 시 호텔 측이 숙박 예약 앱에 나눠주는 수수료가 꽤 높다. 30%쯤이라고 한다. 여행 고수들은 호텔에 직접 연락해 ‘딜’을 하기도 한다. ‘숙박 앱에 나온 이 가격을 호텔에 직접 지불할 테니 부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 식이다.

교토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지도를 들여다봤다. 교토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 버스, 전철 모두 편리하다. 버스로 다닌다면 600엔짜리 1일권을 구입하는 편이 좋다. 여행안내소나 버스기사에게서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지인 터라 일본어를 몰라도 문제없다. 웬만한 영어나 보디랭귀지라면 다 통한다. 버스를 타면 전광판에 영어나 한국어로 정류장 안내가 나온다. 기차역 안에도 버젓이 한국어로 길안내가 다 되어 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아라시야마’. 교토역을 기준으로 서쪽 외곽에 있는 관광지구다. ‘아라시야마’ 자체는 산의 이름이다. ‘바람의 산’이란 뜻이다. 교토역에서 아라시야마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소요시간으론 JR이 가장 빠르다. 이번엔 란덴(嵐電)열차를 타보기로 했다. 란덴열차는 게이후쿠(京福) 전차의 애칭이다. 차량 한 칸짜리 노면 열차다. 트램을 떠올리면 된다. 주택가 사이를 지난다. 교토 시내와 아라시야마와 료안지 등 외곽 관광지구를 잇는다. 메이지 43년, 1910년에 개통됐다. 108년째 교토 시내를 달려온 셈이다. 아라시야마선과 기타 노선 두 개가 ‘ㅗ 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다. 한 번 탈 때마다 어른 기준 220엔의 요금을 받는다. 500엔짜리 1일권을 사면 마음 편하게 탈 수 있다. 현지 일본인에게 란덴 열차를 타고 아라시야마에 간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한다. 가면서 거리 구경을 하고 싶다 하면 그제서야 끄덕거린다.

시조오미야역에서 기차에 올라 아라시야마역에서 내린다. 작은 거리처럼 꾸민 한나리 홋코리 스퀘어가 반긴다. 그 옆엔 갖가지 천으로 장식한 기둥들이 서 있다. ‘기모노의 숲’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행로를 정할 순간이다. 여행 후기를 보면 아라시야마를 ‘반나절짜리’ 코스로 여기고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실 제대로 보자면 하루이틀도 모자라다. 헤이안시대(794~1185) 때부터 수도인 교토 귀족들의 나들이 장소였던 덕일까, 잘 꾸며진 명소가 많다. 가쓰라강에서 뱃놀이도 할 수 있다. 가쓰라강은 아라시야마를 감싸고 흐르는 강이다. 신사나 정원 같은 관광지는 보통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여러 곳을 보려면 시간을 감안해 움직여야 한다. 아라시야마는 처음인 만큼 가장 유명한 명소인 두 군데를 가보기로 했다. ‘지쿠린’과 ‘덴류지’다. 두 군데 모두 란덴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지쿠린, 즉 대나무 숲은 아라시야마를 대표하는 명소다. 끝이 안 보이게 높이 뻗은 대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다. 약 200m 구간.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한 바로 그 길이다. 영화에선 주인공 장쯔이가 차를 타고 지나는 장면으로 나온다. 비오는 평일이어서일까, 관광객이 아주 많진 않다. 듣기론 주말이면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려온다고 한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여긴 어딘가, 단양 대나무축제에 와버린 게 아닐까’ 헛갈렸다는 후기도 봤다. 단체여행에서 반드시 들르는 코스여서다. 이날도 패키지여행 일정상 어쩔 수 없이 ‘비오는 아라시야마’에 당첨된 사람들만 보였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미리 준비한 우비를 입고 한산한 지쿠린을 걸으니 아라시야마의 푸른 민낯이 보였다. 물기를 머금은 대나무 숲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30년 가꾼 별장이 문화재로

길을 따라가면 산장 입구가 보인다. 오코치(大河內) 산장이다. 오코치 덴지로(1896~1962)라는 배우의 개인 별장이었던 곳이다. 주로 사무라이 역할을 맡았던 유명 배우다. 쇼와시대 ‘시대극 6대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약 6만6000㎡의 땅을 사들여 30년 동안 조금씩 가꾼 정원이 바로 오코치 산장이다. 지금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입장료 1000엔을 내야 하기 때문인지, 내부를 둘러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명한 절도 입장료는 대개 500엔이다. 표시해놓은 길을 따라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지대가 높은 탓에, 걷다 보면 아라시야마 전경과 멀리 교토 시내가 보인다. 왜 개인의 별장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지 느끼게 된다. 산책 중간중간 오코치가 살았던 건물과 정자와 다실 등 여러 채의 건물에서 쉴 수도 있다. 산책을 마친 후엔 다실로 들어가 마차를 마신다. 입장료에 포함된 음료다.

오코치 산장에선 정원을 둘러본 후 다실에서 마차를 즐길 수 있다.
오코치 산장에선 정원을 둘러본 후 다실에서 마차를 즐길 수 있다.

오코치 산장을 나서니 출출해졌다. 아라시야마엔 유명 ‘맛집’이 여러 군데 있다. 미쉐린가이드에 소개된 ‘히로카와’와 소고기 맛집 ‘오츠카’가 대표적이다. 히로카와는 장어덮밥을 판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역시 히로카와와 오츠카엔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대기줄까지 마감한 탓이다. 발길을 돌려 찾은 곳은 ‘하나나’. 도미 요리 집이다. 이곳도 보통 날엔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다. 비오는 날의 특권으로 바로 들어갔다. 대표음식으로 자랑하는 런치세트 ‘도미오차즈케’를 주문했다. 얇게 썬 도미회가 차가운 된장국에 담긴 채 나온다. 녹찻물에 밥을 말아 된장국에서 건져낸 도미회와 먹는 식이다.

너무 느긋했나, 자책하며 덴류지로 향했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절이다. 1339년에 창건됐으니 680년간 아라시야마를 지켜온 셈이다. 덴류지는 임제종 사찰이다. 임제종은 9세기 중국 당나라의 임제 스님이 만든 종파다. 불교의 다섯 가지 선종 중 하나다. 교토엔 다섯 개의 대표적인 임제종 사찰이 있는데, 덴류지가 그중 하나다. 덴류지의 심장은 소겐치 정원이다. 선승 무소 소세키의 작품이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일본의 전통 정원은 그저 꽃이나 물고기를 보는 곳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자 가치관이다. 전통 정원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첫째, 가레산스이(枯山水)다. 물이 없이 돌과 모래로만 꾸민 정원을 떠올리면 된다. 물 없이 자연을 표현했다. 모래 위에 물결 무늬를 만들어 놓으면 그게 바로 강이자 바다이다. ‘미니멀리즘’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교토 료안지가 대표적이다. 둘째, 이케이즈미(池泉回遊式)다. 한자의 음을 따 지천회유식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연못으로 꾸민 정원이다. 연못을 꾸미고 그 안엔 작은 섬을 만든다. 다리와 돌도 배치한다. 소겐치 정원과 금각사가 대표적인 이케이즈미 정원이다. 세 번째는 로지(露地)다. 료칸이나 호텔에서 볼 수 있는 정원이 바로 로지 양식이다. 손을 씻는 곳을 지나 땅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다실에 닿는 식으로 꾸민다. 배치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잡념을 씻어버리고 걷는 순간에만 집중해 다실로 들어서란 의도라고 할까. 세 양식의 공통점은 사계절 혹은 밤낮 언제 들러도 풍취를 느낄 수 있게 꾸민다는 점이다. 밤엔 달빛이 반사되도록 흰 모래에 줄무늬를 새겨놓는 식이다.

란덴열차 역에 있는 ‘기모노의 숲’. 갖가지 무늬 천으로 감싼 기둥을 세워놨다.
란덴열차 역에 있는 ‘기모노의 숲’. 갖가지 무늬 천으로 감싼 기둥을 세워놨다.

소겐치 정원도 마찬가지다. 아라시야마를 축소해 형상화해 놨다. 봄이면 꽃, 여름이면 푸른 잎, 가을이면 단풍, 겨울엔 눈꽃. 소겐치 정원만 들여다봐도 아라시야마의 사계를 볼 수 있다. 덴류지를 둘러보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다 돼간다. 거리는 벌써 한산해졌다. 관광지구에선 식당과 상점도 5시가 넘으면 문 닫을 준비를 한다. 다시 란덴열차에 올랐다. 교토 시내로 향하는 관광객들과 퇴근하는 일본인들이 사이좋게 자리를 나눠 앉는다. 어느 틈엔가 여름 모기도 동승했다. 일본 시인 이싸의 하이쿠가 떠올랐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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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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