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가하라의 새벽은 동 트기 전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제가하라의 새벽은 동 트기 전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난해 말까지 월간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부부여행 삼아 갔다온 트레킹 코스가 몇 곳 있었다. 1995년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푼힐(3200m) 트레킹이 처음이었고, 1996년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4101m)가 두 번째였다. 아내는 매번 고산병 증세로 힘들어했지만 웅장하고도 신비감 넘치는 정상의 조망 덕분에 둘 다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2004년 가을에는 일본 북알프스(3190m) 종주산행에도 도전했다. 그때는 아내뿐 아니라 초딩 막둥이까지 데리고 나섰다. 하지만 절정의 단풍을 기대했던 여행은 완전 실패였다. 아내로부터 “이렇게 험한 산을? 이참에 나를 아예 보내려고!” 하는 반발만 샀다. 2010년 일본 오제 트레킹 때도 아내는 ‘혹시 또 험산을?’ 하며 의심했다. 하지만 오제는 100점 만점이었다. 함께 나선 선배와 친구의 아내들도 산행을 마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번에 오제 트레킹에 다시 나선 것도 그때의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일본 혼슈 중앙에 위치한 오제(尾瀨)국립공원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한 곳이다. 군마(群馬)·후쿠시마(福島)·니가타(新潟)·도치기(栃木) 4개 현(縣)에 걸쳐 있는 이곳은 1934년에 국립공원으로, 1960년에는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후 닛코(日光)국립공원에 속해 있다가 자연의 독특함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7년부터 독립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오제국립공원은 일본 최대의 고산습윤지(高山濕潤地)로 2005년 람사르협약에 등재됐다. 이곳의 특이한 자연경관은 5만여년 전 공원 내 최고봉인 히우치가다케(燧ヶ岳·2356m)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린 용암과 토사가 다다미강(只見川) 물줄기를 막으면서 형성된 것이라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제국립공원은 해발 1400~1600m 높이의 산허리를 따라 크고 작은 늪(沼)이 띠를 이루며 독특한 풍광을 자아낸다. 그중 오제를 대표하는 산중호수 오제누마(尾瀨沼·1665m)가 히우치가다케와 어우러져 순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반면 최대 습원(濕原)인 오제가하라(尾瀨ケ原·1423m)는 수채화 같은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새벽 물안개 자욱한 오제가하라 일원의 풍경과 해 질 녘 시부츠산(至仙山·2228m) 뒤편에서 불꽃처럼 번지는 붉은 노을은 한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이다.

오제누마의 목도를 따르는 산객들.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오제누마의 목도를 따르는 산객들.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히우치가다케 정상 가는 길. 습원 보호를 위해 목도가 놓여 있다.
히우치가다케 정상 가는 길. 습원 보호를 위해 목도가 놓여 있다.

호숫가 따라 나뭇길 걷다 보면

지난 6월 7~8일 이틀간의 오제 트레킹은 2009, 2010년에 이어 세 번째였다. 앞서 두 차례는 모두 북쪽 후쿠시마현 쪽에서 진입했다. 이번에는 남쪽 군마현 쪽 산길(大淸水登山口·1180m)로 들어섰다. 오제누마 가는 길(6.3㎞)은 참나무, 삼나무, 낙엽송 등 여러 수종이 빼곡하게 우거진 임도를 지나야 한다. 그렇게 40여분 정도 걷다가 중간 쉼터를 지나면서 계곡 숲길로 바뀐다. 울창한 숲속 계곡을 따라 콸콸 소리내며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듯했고, 물소리와 새소리, 매미소리는 깊은 자연의 멋을 돋웠다. 양지꽃 비슷한 모습의 들꽃들은 오제 가는 일행을 반겨주는 듯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가사처럼 사람도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의 얼굴도 환하게 빛났고, 하산길에 접어든 일본인들 또한 검버섯 핀 얼굴에 허리가 살짝 굽어 있어도 미소는 길가의 들꽃만큼이나 환했다.

완경사 둔덕 같은 산페이도게(三平峙·1762m)를 넘어서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내원의 심연(深淵) 오제누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다. 바람에는 숲의 향도 담겨 있다. 고개 바깥 외원에선 매미들 합창이 정신을 산만하게 했는데 내원에 들어서자 두꺼비 울음소리와 먼산의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며 꿈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제누마 호숫가 쵸조고야(長藏小屋)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호숫가 목도(木道)를 걷는다. 그러자 기대했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습지에 뿌리내린 물파초(앉은부채류)들은 면사포 쓴 새색시처럼 청초한 자태로 눈길을 붙잡고, 호수 건너편에 솟구친 히우치가다케는 이국적인 풍광으로 발길을 붙잡는다. 습지 보호를 위해 깔아놓은 목도도 그림이다. 그 목도를 걷다가 꽃 한 송이 눈에 띄면 허리 숙여 눈 맞추며 스마트폰을 바짝 갖다 대고 버튼을 눌러본다. 좁은 목도를 스쳐 지나가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 예쁜 꽃이 눈에 띄면 허리 숙인 채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고, 뒤를 따르던 이들은 이 모습을 꽃 보듯 바라본다.

오제는 일본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로 불린다. 1903년 일본 정부는 거대한 분지를 이룬 오제 일원의 물줄기를 막아 수력발전용 댐을 건설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1890년부터 오제에 오두막을 짓고 살고 있던 ‘일본 자연보호운동의 대부’ 히라노 조조(1870~1930)는 “댐이 생기면 혼슈 최대 습원이 수몰되고 자연환경이 파괴된다”며 반대운동을 펼쳤다. 여기에 일본 식물학자 등 학자와 예술가들이 힘을 보탰다. 히라노 사망 뒤에는 그의 아들이 댐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1950년대 댐 건설 계획이 무산된 뒤 1960년대 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이번에는 손자가 도로 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1년 일본 정부는 결국 공사 중지를 결정한다. 3대에 이은 자연보호운동의 결실이 오제인 셈이다.

이후에도 오제는 자연훼손의 위기를 맞았다. 1960~1970년대 이뤄진 경제 고속성장 덕분에 탐승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습지 일원은 급속도로 훼손됐다. 이에 일본 정부는 습지 내 산길 전 구간(약 65㎞)에 목도를 깔기로 결정했다. 자재비용에 헬기 운송비, 공사 비용을 합치면 1m당 30만엔이라는 비용이 들어간 대역사였다.

아카타시로 습원을 탐승하는 사이 구름이 걷히면서 빼곡히 우거진 너도밤나무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타시로 습원을 탐승하는 사이 구름이 걷히면서 빼곡히 우거진 너도밤나무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는 야생화, 밤에는 별꽃

히우치가다케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두 곳을 건너고 야트막한 둔덕을 넘어선 다음 호숫가 나루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이미 도착한 젊은 연인은 오제누마를 배경으로 사랑 얘기를 나누고, 뒤이어 도착한 중년 남성들도 배낭을 내려놓고 호수를 바라보며 편안한 시간을 갖는다. 때묻지 않은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도시에선 누릴 수 없는 여유를 주었다. 오제는 느림보 트레킹의 전형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나루터 쉼터를 지나 울창한 산길로 들어선다. 오제누마 목도와 달리 거친 길이다. 폭우에 파인 곳이 많고 목도가 주저앉은 구간도 많다. 그래도 좋다. 원시림 같은 길은 몸속 깊이 숨어 있는 원시성을 끄집어낸다. 그 때문인지 마음이 편해진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숲길을 벗어나 오제가하라로 내려선다. 산장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는 마하라시(見晴)이다. 오후 5시, 이미 트레킹을 끝낸 사람들은 산장 앞마당 탁자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오제가하라의 풍광에 푹 젖어 있다.

동서 6㎞, 남북 8㎞ 넓이의 습원인 오제가하라는 6월 초 물파초를 시작으로 여름을 거쳐 가을에 접어들 때까지 야생화들이 앞다퉈 꽃을 피우는 천상화원이다. 천상 오르는 길처럼 느껴지는 목도가 균형을 잡아주고 맞은편에 시부츠산이 자작나무 숲으로 허리띠를 두른 채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그 몽환적 풍광 속을 걸어가는 이들이 자아내는 풍광은 또한 그림이다 싶다.

마하라시에서 일행의 숙소인 온센고야(溫泉小屋)까지는 2㎞, 20분 남짓 거리. 하지만 ‘그냥 가지 말고 날 좀 봐달라’는 듯 앙증맞은 야생화를 보며 걷노라니 순간순간 발목이 붙잡혀 예상보다 늦어진다. 산장에 도착, 저녁식사에 이어 온천수로 몸을 씻고 산장 밖에 나오자 밤하늘에는 별이 촘촘하다. 북두칠성은 물론 전갈자리, 황소자리에 이어 은하수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한낮에는 야생화와 사람 꽃, 한밤에는 별 꽃이 화려한 곳이 오제인가 싶다.

2009년 7월 트레킹 때에는 후쿠시마 쪽 오제미이케(御池·1500m)에서 출발, 너도밤나무 울창한 히우치가다케 산허리를 끼고 돌며 오제가하라와 오제누마를 탐승한 다음 누마야마도게(沼山峙·1784m)를 넘어 오제미이케 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20㎞ 코스를 걸었다.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하루에 완주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었다. 당시 너도밤나무 숲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란 풀이 곱게 깔린 습지가 나타났다.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꽃들이 잔잔하게 피어 있고 새소리가 들려오자 꿈을 꾸는 듯했다. 작고 귀엽다 하여 히메다시로(姬田代)라 불리는 습지였다. 취나물에 포도가 매달린 것 같다는 산카요우(山荷葉)는 꽃이 지고 씨만 달려 있고 긴코우카(金黃花)는 쭉 뻗은 채 끄트머리에 노란 꽃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묘한 나무도 많았다. 오카메노키(大龜の木)는 하나의 뿌리에 굵은 나무를 열 가닥이나 뻗고 있어 기묘했다. 예술작품처럼 땅바닥에 바짝 기댄 채 옆으로 자라고 있는 다케캄바(岳樺), 수백 년 묵은 주목을 연상케 하는 구로히노키(黑ヶ檜), 뿌리 하나에 십여 가닥 나무줄기를 뻗어올린 오카메노키 등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의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동행한 일본 가이드는 숲 바깥쪽 멀리 산봉을 가리키며 “오제누마와 오제가하라를 배경으로 솟아오른 3개의 일본백명산(日本百名山) 또한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자랑했다. 히우치가다케 산록은 너도밤나무가 산림의 주종을 이루고, 편백나무 역시 많은 산이었다. 그는 “오제 일원은 겨우내 내린 깊은 눈이 서서히 녹아내려 물이 풍부하고 그 덕분에 부드러운 식물이 많이 자라고 사슴과 토끼는 물론 곰도 산다”며 “6월부터 8월까지 피는 야생화도 아름답지만 10월 가을 단풍철에도 정말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고 했다.

2010년 6월 말 두 번째 방문 때는 선배와 친구, 필자 세 부부가 탐승에 나섰다. 한 해 전 못 이뤄 아쉬웠던 히우치가다케 산행과 오제가하라 숙박이 더해진 멋진 트레킹이었다. 6월 말 히우치가다케 산행은 예상과 달리 많은 눈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우리나라로선 더위가 시작되는 6월 말 눈을 밟는 산행을 한다는 것은 호사였다. 여기에 오제국립공원은 물론 닛코국립공원 일원의 산봉까지 한눈에 조망하는 즐거움을 맛봤고, 오제가하라 산막에서 온천욕에 밤하늘의 멋진 별 잔치를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튿날 느림보 트레킹을 하며 오제누마를 한 바퀴 도는 탐승까지 즐긴 후 산을 빠져나왔으니 아내들로부터 후한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름꽃 만발한 오제누마. 매년 6월 초 물파초를 시작으로 습원의 야생화와 단풍으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는 대자연이다.
여름꽃 만발한 오제누마. 매년 6월 초 물파초를 시작으로 습원의 야생화와 단풍으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는 대자연이다.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바깥세상으로

다시 이번 세 번째 방문 얘기다. 온센고야에서 하룻밤 묵은 일행은 새벽 5시부터 산행을 서둘렀다. 오후 예정돼 있는 다니가와다케(谷川岳·1977m) 산행을 하려면 오전 10시까지 하도마치도게(鳩待峙·1591m) 주차장까지 가야 하는데 동행한 휘산회 회원 한 명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행보다 한 시간 반 빨리 출발해야 했다.

다시 오제가하라 목도를 따라 20분쯤 걸어가자 숲속 산장 도덴고야(東電小屋)가 반긴다. 산장을 지나 다리(東電弔橋)를 건너자 어제 지나친 오제가하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이 걷히자 안개가 피어오르고 먼산에선 뻐꾸기가 뻐꾹댔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다른 산새도 지저귀고 습원 곳곳의 야생화도 고개를 치켜세우며 꽃잎을 펼쳤다. 여기에 시부츠산 기슭의 자작나무 숲은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꿈속의 무릉도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짐승들도 이런 풍광을 밤새 기다렸는지 목도에 배변 흔적이 간간이 나타났다.

오전 7시 반을 넘어서자 오제가하라 곳곳에 자리 잡은 산장에서 나온 탐승객들이 목도를 따라 길게 줄을 이었다. 일본 트레커들의 표정은 참으로 다양하다. 대부분 안내인을 앞세우며 길을 걷는데 안내인이 작은 꽃이나 풀에 대해 설명하면 누구든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다.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서둘러 산행하는 우리나라 트레커들에 비하면 정말로 여유롭고 정감 넘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산장이 위치한 야마노하라(山の鼻)에 도착할 즈음 남녀노소 트레커 행렬은 점점 늘어났다. 고교생들도 보인다. 오제는 노인들에서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감동을 주는 자연이다 싶었다.

오전 8시30분, 이제 오제가하라에서 벗어나 산을 빠져나가야 할 시간. 계곡 숲길을 따르는 사이 간간이 물파초가 모습을 드러내고 노란 꽃, 하얀 꽃이 활짝 핀 야생화들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우리를 스쳐 거꾸로 산으로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표정도 밝다. 우리는 오제에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있고, 일본인들은 도시에서 찌든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오제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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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pshan@haecho.com /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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