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의 인베이더 모자이크들. ⓒphoto twelvmag.com
세계 곳곳의 인베이더 모자이크들. ⓒphoto twelvmag.com

최근 프랑스 파리 시내를 걷다가 ‘인베이더(Invader)’와 또 마주쳤다. 이제 나이가 50대라 벽에 새겨진 인베이더가 어떤 모양인지, 진짜 인베이더인지 아닌지 흐릿하다. 인베이더가 새겨진 벽에 눈을 바짝 붙이고 자세히 들여다본 후에야 정확히 모양을 알아차렸다. 역시 작은 타일을 이어붙인 인베이더 모자이크다. 양손과 양발을 X자로 뻗은, 머리에 뿔이 달린 외계인 캐릭터다. 15년 전 파리에서 처음 마주쳤던 추억의 그 캐릭터다.

2030세대가 들으면 꼰대라 무시하겠지만, 인베이더는 20세기 인류가 창조해낸 디지털 게임의 원조다. 인터넷 탄생 16년 전인 1978년 혜성처럼 나타나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준 최첨단 8비트 그래픽 게임이다. 당시 인베이더 게임은 ‘뿅뿅’ 소리로 요란했던 전자오락실에서 즐겼다. 우주에서 지구로 침략해 내려오는 외계인을 조준하는 왼손과, 외계인과 외계우주선을 파괴하는 미사일 버튼용 오른손을 움직여서 인베이더를 무찔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가 나온 것은 1982년. 외계인과 지구인의 평화적 공존을 역설한 최초의 영화다. 인베이더 게임은 ET가 나오기 4년 전에 등장했다. 인베이더 게임이 유행하던 당시 외계인과 인간의 관계는 평화나 사랑이 아니었다. 정복, 점령과 같은 제로섬 게임이 당연시됐다. 외계인은 지구를 점령하려는 악당일 뿐이었다. 오른손 중지를 1초에 얼마나 많이 움직이느냐가 지구 수호의 기본 조건이었다. 인베이더 게임은 이후 ‘갤럭시’란 이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21세기 파리 뒷골목에서 만난 인베이더 모자이크는 한 세대 이전에 펼쳐진 아스라한 시대의 부활로 와닿는다.

전 세계 30여국으로 확산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인베이더는 파리를 상징하는 21세기 거리예술의 대명사가 됐다. 지하철 음악가나 전위적인 거리예술과 더불어 인베이더 모자이크가 파리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인베이더 모자이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이다. 수많은 파리 거리예술 중 하나였지만, 2011년 6월 갑자기 화제가 됐다. 파리 전위예술가들이 인베이더 모자이크 1000호가 등장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거리예술의 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는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파리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 31개 도시로 확산됐고, 22개 유럽도시로도 퍼져나갔다. 2018년 현재는 미국, 일본, 홍콩 등 전 세계 30여개국에서 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고 인베이더가 등장했다는 뉴스도 없었지만, 거리 어딘가에 이미 새겨져 있을지 모른다.

아직도 비밀인 창시자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베이더 모자이크를 갖고 있는 도시는 출발지인 파리다.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새롭게 등장하기에 얼마나 많이 새겨져 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대략 5000개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와 타일의 재질, 캐릭터의 모습도 다양하다. 보통 가로 세로 50㎝ 정도의 크기지만, 10㎝ 이하의 초소형과 1m 이상의 초대형도 있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를 새기는 타일 한 장의 크기는 가로 세로 1㎝부터 20㎝까지 다채롭다. 불에 구운 컬러 세라믹 타일을 사용하지만, 표면 재질은 캐릭터 내용에 따라 다르다. 주목할 점은 거리의 벽에 새겨지는 타일 모자이크가 이제 인베이더 캐릭터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확인했지만 수퍼마리오, 스타워즈, 스파이더맨, 아톰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 얼굴 모자이크도 등장했다. 물론 공통점은 타일이 소재란 것이다. 파리지앵들에 따르면, 타일 모자이크가 처음 등장했던 때는 인베이더 캐릭터로 한정돼 있었지만 이후 모자이크가 늘어나면서 다른 캐릭터로 영역이 확장됐다고 한다.

파리의 진수는 도보여행에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도 좋지만, 그냥 정처 없이 하루 종일 걷는 것이 파리를 체감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파리 곳곳에는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파는 물건들과 수제 전문 가게가 넘친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는 발품을 파는 여행자들한테나 보이는 파리의 색다른 눈요깃거리다. 개인적 체험이지만 의도적으로 찾으려 하면 또 잘 나타나지 않는다. 목적이 아니라 뭔가의 부수적 행위의 결과로 ‘돌연’ 인베이더가 나타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사방팔방 눈요깃감으로 넘치는 환상의 도시가 파리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란 존재 자체도 모른 채 파리 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필자만의 시각이지만, 파리에서 직접 눈으로 본 수백 가지 인베이더 모자이크를 통해서 발견한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똑같은 모자이크가 없다. 과거 게임에 등장했던 인베이더 캐릭터는 파리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것도 크기나 색깔, 배경이 제각각이다. 캐릭터를 반드시 사각형 타일 프레임 안에 넣어 만들지도 않는다. 배경 없이 캐릭터만 단독으로 새기는 경우도 있고, 캐릭터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는 작품이 들어선 높이다. 이것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들어선 곳은 건물 2층 벽면이다. 손에 닿는 높이도 아니고, 머리를 들어 멀리 쳐다봐야 할 거리도 아닌 아주 적당한 위치다.

흥미로운 것은 인베이더 모자이크의 창시자다. 베일에 싸인 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타일을 빌딩 벽면에 붙이는 작업은 심야에 이뤄진다. 미리 물색해둔 장소에 와서 준비한 타일을 붙인 뒤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람들의 눈에 띈다 해도 안경, 마스크, 모자로 무장해 있기에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미디어를 통해 뜨려는 싸구려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아니다. 신비로움은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신문 방송에서 인베이더 창시자의 정체를 묻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주인공인지는 지금도 비밀이다. ‘1969년생 파리예술대학(cole des Beaux-Arts) 출신 남성’이란 점만 알려져 있다. 2013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인베이더 창시자는 자신의 부모조차도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의 직업이 타일공인 줄 안다는 것이다. 예술대학 출신의 동료 몇 명만 정체를 알고 있을 뿐 모두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스스로의 수칙이라 말한다. 당시 인터뷰에 등장했던 이 창시자의 얼굴 사진도 모자이크로 비밀스럽게 처리됐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인베이더 모자이크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디어도 ‘오프 더 레코드’에 기초한 프랑스식 프라이버시 보호에 익숙해 있다고 보여진다. 사실 당시 인터뷰와 더불어, 인베이더 모자이크 창시자가 직접 주관한 이벤트가 곳곳에서 열렸다. 알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 창시자가 누구인지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프라이버시 존중 문화가 끝까지 이 창시자의 정체를 비밀로 남겨뒀을 뿐이다. 전부 보여주고 까발리는 미국식 투명함보다, 비밀스러움을 통해 깊이와 넓이를 확대시켜나가는 나라가 프랑스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는 그 같은 프랑스 문화가 낳은 결과다.

2013년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채 한 매체와 인터뷰 중인 인베이더 모자이크의 창시자. 그는 ‘1969년생 파리예술대학 출신 남성’이라고만 알려졌다.
2013년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채 한 매체와 인터뷰 중인 인베이더 모자이크의 창시자. 그는 ‘1969년생 파리예술대학 출신 남성’이라고만 알려졌다.

모자이크 훔치는 게 절도인가 논쟁도

지난해 8월 인베이더 모자이크 뉴스가 오랜만에 다시 프랑스를 강타했다. 도둑이 이유였다. 파리시청 직원으로 가장한 2명이 대낮에 인베이더 모자이크를 훔치려다 걸린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사라지거나 파손된 인베이더 모자이크 뉴스와 함께 터져나온 소식이었다. 이들의 행적을 수상하게 본 시민의 제보로 체포됐다고 한다. 파리지앵만이 아니라 인베이더가 뭔지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뉴스였다. 두 사람은 절도혐의로 구속됐는데, 이들이 모자이크를 훔친 이유는 어딘가로 모자이크를 팔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졌다. 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인베이더 모자이크가 고가로 팔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홍콩 소더비 경매장에서 무려 30만달러에 팔린 글로벌 예술작품이 인베이더 모자이크라는 것이다. 범인들은 파리 뒷골목의 벽에서 떼어낸 모자이크를 외국으로 빼돌려 고가에 팔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베이더 모자이크 절도는 이 특이한 예술의 가치를 확인시켜줬을 뿐 아니라 거리예술의 법적 소유권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임의로 설치된 거리예술의 소유권이 과연 존재하는지, 있다면 주인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너무도 프랑스다운 상황이지만, 가장 간단한 것을 가장 어렵게 설명하는 프랑스식 의식구조를 이해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논쟁이다. 지하철역에서 누군가 슈퍼맨 캐릭터 낙서를 했다고 치자. 너무 잘 그렸기에 손상되지 않은 채 1년간 지속됐다고 가정하자. 이후 누군가가 슈퍼맨 낙서를 칼로 도려내 통째로 떼어갈 경우 법적 문제는 어떻게 될까? 절도죄가 성립할까? 소유자도 없고, 정부가 허락하지 않은 불법낙서를 훔쳐갔다고 해서 범죄가 될 수 있을까? 당시 프랑스 인권단체와 리버럴 미디어는 인베이더 모자이크 타일을 훔치려던 두 사람은 애초부터 범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무원 사칭 혐의는 인정되지만, 소유권도 없는 불법 모자이크를 떼어가려 한 것이 범죄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모자이크를 훔치려던 두 사람 역시 불법 인베이더를 ‘청소’하려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인권단체와 ‘청소에 나섰다’는 두 도둑의 주장에 당시 파리지앵 대부분은 시민공유재산이란 개념으로 맞섰다. 인베이더 모자이크가 이미 파리를 대표하는 거리예술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소유권이 없는 불법 거리예술이란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민공유 무형재산을 훔친 혐의로 절도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절도’와 ‘청소’를 오가는 프랑스식 논쟁은 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시민공유 무형재산설이 강세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것이 범죄가 되는 선례가 만들어질 경우 또 다른 후유증이 기다리고 있다. 파리 거리의 불법낙서 중 상당수가 시민공유예술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낙서조차 마음대로 청소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

은둔의 불교국가 부탄에도 등장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의 이미지를 더 다채롭게 만드는 인베이더 모자이크지만,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대상만은 아니다. 올해 초 터진 부탄발(發) 뉴스는 타일 모자이크를 진짜 ‘침략자(인베이더)’로 받아들이게 만든 계기가 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해진 부탄 불교사원 벽에 그려진 각종 타일 모자이크 때문이었다. 마침내 은둔의 불교국가 부탄도 인베이더 모자이크가 점령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린 사진이었지만, 곧바로 ‘도를 넘어선 예술’이란 비난이 빗발친다. 사원의 허락하에 이뤄진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거리예술이 감히 신성한 종교영역을 넘나든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했다.

인베이더 모자이크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우주로부터의 침략’에서부터 ‘무조건적인 글로벌리즘’과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같은 일방주의’의 침략을 비꼬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또 세계 곳곳을 맴도는 난민과 불법이민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베이더는 그같은 거시적 차원의 이해와 무관하다. 아직도 기억하지만, 1979년 인베이더 게임 한 판의 가격은 100원이었다. 당시 필자의 하루 용돈은 점심·저녁 식사비와 차비를 포함해 총 500원이었다. ‘뿅뿅’에 빠져 매일 용돈 전부를 갖다 바쳤다. ‘돈 먹는 괴물’이라는 것이 당시 필자가 갖고 있던 인베이더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다. 파리에서 만난 인베이더는 게임중독 상태였던 그 시절 기억조차도 전부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서커스와 광대조차도 예술로 재창조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테러와 불법이민으로 어수선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제의 꿈과 추억을 되살려주는 도시가 바로 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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