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르비종에 있는 밀레의 아틀리에.
프랑스 바르비종에 있는 밀레의 아틀리에.

상식적인 얘기지만, 예술사에서 본 리얼리즘(Realism)의 주인공은 자연이다. 인간의 눈에 비친 자연이 리얼리즘의 주된 소재이자 주제다. 인간은 자연 속 일부로 처리될 뿐이다. 사람의 손이나 머리에서 파생된 인공적인 것은 관심 밖이다. 왕의 정원 안에서 볼 수 있는 꽃이나 사슴이 아니라 광활한 대자연 속의 풍경이 리얼리즘의 대상이다. 자연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것만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세와 10가지 재앙에서 보듯, 무섭고도 예측불가능한 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리얼리즘은 자연이 가진 야누스(Janus)의 얼굴 전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신화·환상·이념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리얼리즘의 전부다.

이념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지배계급 타도를 부르짖는 노동자의 핏빛 눈동자야말로 리얼리즘의 진수라 믿을 듯하다. 하지만 리얼리즘의 출발점은 19세기 중반 프랑스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공산주의, 사회주의 속에 배어 있는 도시 속 리얼리즘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소셜(Social) 리얼리즘, 소셜리스트(Socialist) 리얼리즘이다. 이는 원조(元祖) 리얼리즘의 변형판이다. 리얼리즘의 근본은 자연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자연이 빠질 경우 리얼리즘 영역 밖일 수도 있다. 리얼리즘을 자연주의(Naturalism)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뉴욕 메트 802호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은 리얼리즘 화가들의 대표적 집산지다. 파리 루브르를 제외한 유럽 밖 뮤지엄 가운데 가장 많은 리얼리즘 그림을 갖고 있다. 주 무대는 2층 갤러리 802호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공간’으로도 불린다. 바르비종파는 리얼리즘의 선구자다. 테오도르 루소, 귀스타브 쿠르베, 쥘 뒤프레, 카미유 코로와 같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리얼리즘의 거장들이 바르비종파의 주역들이다. 802호는 같은 층의 유럽 그림전시관 가운데 가장 조용하다. 인적이 드문 ‘장점’ 때문에 필자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을 갈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 ‘작다’는 것은 802호에 들어서는 순간 와닿는 첫 번째 느낌이다. 바로 옆방 인상파 그림의 경우 가로, 세로 크기가 1m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802호의 그림들은 한가운데 걸린 루소의 그림만이 예외일 뿐, 전부가 작다. 그림의 가격은 크기로 결정된다. 작을수록 싸고, 클수록 제곱으로 비싸진다. 화가의 수준이나 제작기간도 중요하지만, 클수록 그림에 필요한 안료와 재료에 드는 비용도 증가하게 된다. 그림이 작다는 것은 구매자가 없거나 드물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화가 스스로나 가족, 주변의 친구들을 위해 그린 그림이어서 작아졌을 수도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돈을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의미다.

밀레의 ‘폭풍을 이기며’가 담은 것들

802호에서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폭풍을 이기며(Retreat from the Storm)’란 작품이다. 밀레가 32살 때 그린 가로 46.4㎝, 세로 38.1㎝ 크기의 작은 유화다. 뮤지엄 직원이 경계태세에 들어가겠지만,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살펴야 할 명화다. 배경은 폭우가 내리기 직전의 먹구름 낀 하늘과 차가운 대지다. 강풍과 추위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걸어가는 모자(母子)가 그림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여인의 흰 두건과 입을 벌린 채 따라가는 자식의 지친 모습을 통해 대자연의 위력과 공포가 느껴진다. 도와줄 사람은 물론 비를 피할 나무 하나 없다. 21세기 디지털 문명 속의 자연은 인공화된 세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19세기 아날로그 시대의 자연은 다르다. 인간이 매일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던 현실 속의 카오스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대자연의 힘이나 카오스가 메시지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을 한순간에 잠식할 자연의 위력이나 공포가 아니라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여인은 오른손으로 땔감인 듯한 나무를, 왼손으로는 어린이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생활수단으로서의 땔감과, 삶의 근본적 가치로서의 모성애가 드러나 있다. 노동으로 다져진 듯한 건장한 어깨와, 강풍에 맞서 앞만 보고 걸어가는 눈동자도 인상 깊다.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도 극복해내면서, 추위에 지친 자식을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로 풀이된다.

밀레의 ‘폭풍을 이기며’
밀레의 ‘폭풍을 이기며’

카오스 대자연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생존력도 넘쳐날 것이란 것이 밀레가 던지는 메시지일지 모르겠다. 짐작건대 밀레는 한국인에게 알려진 서양화가 10명 중 한 명에 분명히 들어갈 인물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인상파 화가들로 채워지겠지만, 리얼리즘 화가로서는 유일하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밀레다. 해가 저무는 저녁의 대지에 선 두 부부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만종(L’Anglus)’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익숙한 명화다. ‘40대 이상’ 장년의 한국인이라면,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들를 경우 밀레의 만종부터 찾아갈 듯하다. 밀레의 만종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사 그림은 19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기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다.

밀레의 ‘만종’에서 느껴지는 의문 중 하나는 배경이 된 자연이다. 밀레는 자연과 농민의 화가로 통한다. 만종만이 아니라 밀레가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자연과 농민으로 채워져 있다. 밀레가 소재와 주제로 다룬 자연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땔감나무와 자식을 양팔에 움켜쥔 강인한 시골여인의 터전은 어떤 곳일까.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바르비종파에 대한 탐사를 통해 얻어낼 수 있다. 농민·자연을 담은 밀레 그림의 대부분이 바르비종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밀레는 루소와 더불어 바르비종파를 대표하는 리얼리즘의 양대산맥이다. 바르비종 곳곳에 밀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가들이 퐁텐블로를 찾은 이유

프랑스인에게 바르비종은 퐁텐블로(Fontainebleau)로도 통한다. 파리 외곽의 울창한 산림지대로,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왕의 사유지 사냥터로 활용됐다. 바르비종파는 혁명 후 퐁텐블로 주변에 모인 화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울창한 원시림에다, 파리와 가깝고, 물가와 집값이 싸다는 점 때문에 화가들이 바르비종에 몰려왔다. 아예 농가를 빌려 스튜디오로 개조한 뒤 숙식을 하면서 그림에 전념한 루소와 같은 인물도 있지만, 파리를 오가며 예술활동에 나선 화가들도 많다. 당시 바르비종에 거주했거나, 주기적으로 다녀간 화가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대략 30여명 정도가 바르비종파 멤버들이다. 파리에 살던 밀레가 바르비종으로 옮긴 것은 35살 때이던 1849년이다. 콜레라로 인해 파리가 대혼란에 빠지자, 아예 퐁텐블로로 옮겨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한다. 허름한 창고를 빌려 스튜디오와 생활공간으로 바꾼다. 밀레는 이후 1875년 1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26년간 바르비종에 거주한다.

바르비종은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6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현지로 들어가는 도로 바깥쪽은 울울창창 깊은 숲이다. 지금 바르비종은 상주인구 15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그림에 관심을 갖거나 퐁텐블로 산림지대로의 등산을 즐기는 사람만이 찾는 외진 곳이다. 걸어서 마을 전부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10분 정도면 끝나는 작은 동네다.

마을 중심에 있는 바르비종뮤지엄은 지자체가 운영하는 마을의 간판이다. 19세기 중반 숙소이자 술집으로 활용되던 ‘간 여관(Auberge du Pre Ganne)’을 개조한 곳이다. 쿠르베·뒤프레·코로와 같은 리얼리즘 화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당시 바르비종 유일의 숙박시설이었을 듯하다.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밀레의 그림들이 이 뮤지엄 바깥 벽에 붙어 있다.

밀레 아틀리에는 루소 아틀리에와 함께 바르비종 리얼리즘의 양대 산실이다. 밀레와 루소가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장소지만 현재는 뮤지엄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5유로를 주고 밀레 아틀리에에 들렀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내부공간이 아주 넓다. 크게 3개의 방으로 나눠져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다. 진위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밀레가 남겼다는 데생 그림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밀레는 당시 막 대중화된 카메라에 주목한 사람이다. 밖에 직접 나가서 사진을 찍은 뒤 데생용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농민들의 씨를 뿌릴 때의 손동작이나 몸 움직임에 대한 정밀촬영이 이뤄졌다. 아틀리에 곳곳에 걸린 흑백사진은 밀레가 직접 찍은 것들이다. 밀레는 바르비종파 화가 가운데 농민을 전면에 내세운 유일한 인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리얼리즘의 진수는 자연에 있다. 농민을 그림 속에 넣을 때는 자연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주체는 숲과 나무 계곡으로 덮인 퐁텐블로의 원시림이다. 밀레는 다르다. 자연의 부속물이 아닌, 적어도 자연과 대등한 관점에서 농민을 다룬다. 그렇지만 21세기에 지구의 환경을 예사로 파괴하는 반(反)자연적인 인간도 아니다. 자연에 대한 수동과 능동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이 밀레가 추구한 인물상이다. 어떻게 해서 ‘농민=리얼리즘의 주인공’이란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

밀레 아틀리에 내부
밀레 아틀리에 내부

첫째, 밀레가 가진 개인적 배경이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에다 농민 출신이란 점이다. 명화 ‘만종’에서 보듯, 밀레의 그림은 신을 염두에 둔 리얼리즘 종교화에 가깝다. 광활한 대지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땀과 노력은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에 비견될 수 있다. 둘째는 밀레가 경험하고 직접 봤던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사회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밀레의 시대는 혁명과 반혁명이 되풀이되던, 피와 폭력의 연속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 1792년 제1공화국, 1804년 나폴레옹의 제1왕정, 1848년 제2공화국과 이어 1852년 제2왕정, 1870년 제3공화국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가 밀레 인생의 배경이다. 주도세력이 바뀔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했다. 밀레는 그 같은 고통과 비극에 민감했다.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한 것은 프랑스 제2공화국이 들어선 지 1년 뒤다. 바르비종파 화가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어떤 학살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하에서 파리를 떠나 시골에 정착한 것이다. 농민은 당시 밀레가 발견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남은 투명한 영혼들이었다. 파리의 정치싸움과 무관한, 프랑스를 구원해줄 마지막 양심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자연에 의지하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달리, 농민을 통해 인간의 생명력을 기대한 인물이 밀레다.

밀레 아틀리에를 찾았던 김종필

밀레 아틀리에 3번째 방에서 그림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최근 세상을 떠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사진이다. 아틀리에 관리자에게 물어보니까 1973년 6월 사진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 방문 중 낮에 수많은 경호원들과 함께 찾아왔다고 한다. 사진 속에는 안 나타나지만, 당시 아틀리에를 찾은 김종필 총리가 집중적으로 본 그림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Le semeur)’이었다고 한다.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50년에 그린 명작이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동안 뮤지엄에서 한국 정치가의 흔적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바르비종은 파리에서 왕복으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외진 곳이다. 웬만큼 열정이 없는 한 일부러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다. 한 나라의 총리가 반나절을 버리면서까지 밀레 아틀리에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종필 총리 스스로의 문화적 소양과 관심이 가장 크겠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교양 전문 출판사 이와나미(岩波)가 배경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고 김종필씨가 1973년 밀레 아틀리에를 방문한 사진이 걸려 있다.
고 김종필씨가 1973년 밀레 아틀리에를 방문한 사진이 걸려 있다.

1913년 문을 연 이와나미서점은 일본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교양과 지식인의 상징이다. 일본만이 아니라 서양의 모든 고전과 역사, 문학이 이와나미를 통해 전해졌다. 지식에 굶주린 식민지 조선인의 갈증을 해결해준 대표적 창구도 이와나미다. 흥미롭게도 이와나미를 상징하는 문양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다. 사실 밀레는 프랑스보다 일본과 아시아권에서 더 유명하다. ‘농민=청빈’이란 이미지를 통해 1930년대 당시 청년장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교양세대의 필독서 이와나미는 그같은 ‘특이한 현상’을 만들어낸 공신 중 하나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라도 더 배우려 애썼던 1926년생 김종필의 10대가 그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친일파라 비난하기 위한 얘기가 아니다. 1945년 광복 당시 지식에 목말랐던 젊은 조선인이라면 예외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밀레는 평생을 통해 유화 400점, 파스텔화 200점을 남겼다. 말년이기는 하지만, 생전에 이미 평가를 받은 흔치 않은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사후 전기도 출간돼 빈센트 반 고흐가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모방해 그리기도 했다.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처럼 밀레의 그림은 작다. 대표작 만종도 가로 55㎝, 세로 66㎝에 불과하다. 작은 그림은 아주 가까이 눈을 밀착한 채 살펴봐야만 한다. 밀레가 붓으로 그릴 때의 거리 정도에서 작품을 대하게 된다. 19세기 중엽 당시 미술 구매자의 눈은 개인초상화나 신화, 종교화에 머물러 있었다. 농민이 주인공인 그림에 대한 관심은 없었을 것이다.

질문은 이어지는데 명쾌한 답을 구하기 어려운 시대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백인백색 전부 다르다. 결국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밀레는 그 같은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화가다. 바르비종파가 추구한 자연 속의 리얼리즘을 통할 경우, 더더욱 정확한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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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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