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브리지 옆에서 열리고 있는 여름축제. 런던의 가장 큰 야외 무료 축제다. ⓒphoto informedlondon.com
런던브리지 옆에서 열리고 있는 여름축제. 런던의 가장 큰 야외 무료 축제다. ⓒphoto informedlondon.com

올해 영국 여름 날씨는 한국 못지않게 덥고 길다. 70일 넘게 계속되는 가뭄과 폭염은 42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영국 언론은 인류가 지구를 무책임하게 쓴 탓으로 말세가 왔다고 난리다. 42년 만이라고 하면, 1972년에는 과연 어땠을까. 당시 가뭄은 3월부터 9월까지 거의 반 년 동안 계속됐고, 폭염은 거의 3달을 갔다. 금년이 아무리 덥고 가물다 해도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영국인들에게 웬만한 햇빛과 폭염(한국에 비하면 말을 쓰기가 미안할 정도로 28도가 폭염의 기준이다)은 사실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햇빛을 찾아나설 정도다. 가뭄만 조금 문제가 될 뿐 영국은 지금 거의 축제 분위기이다. 평소에는 바닷물이 차서 한산하던 영국 해변은 수영복을 입은 영국인들로 인산인해이고 런던 시내 공원 잔디밭에는 벌거벗고 태양을 즐기는 반라의 남녀들로 꽉 차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 남부 포도밭 주인들은 신이 났다.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포도가 자라기 적당한 환경이 되면서 포도밭이 늘고 있는데 금년 날씨는 거기에 더해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하기에 거의 완벽한 조건이라고 싱글벙글이다.

그래서인지 해외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이런 기미를 항공 노동조합이 먼저 알아챘나 보다. 매년 학교 방학일을 전후로 휴가 성수기에 맞춰 연례 파업을 시작해 공항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일이 이번 여름에는 없었다. 햇빛에 굶주린 영국인들의 여름 휴가 행선지는, 피서가 아니라 ‘구양(求陽)’이라는 조어를 만들 정도다. 1순위는 항상 스페인이다. 그 다음이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의 지중해 5개국이다. 그런데 2년 전 브렉시트 이후 하락이 가속화된 영국 파운드화로 해외 휴가는 너무 비싼 여행이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파운드화와 유로화의 환율은 1.5 대 1이었다. 저렴한 값에 유럽 여행이 가능했다. 요즘은 1 대 1을 오고 갈 정도로 파운드화가 떨어져 유럽 여행비는 연간 상승 요인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30% 이상 비싸졌다. 그렇다 보니 날씨가 지중해 못지않은 영국을 두고 굳이 유럽으로 휴가를 떠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여행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거기에 더해 영국에서 몇 년 전부터 휴가 트렌드로 ‘노스탤지어(nostalgia)’와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과거 해외여행은 중산층 이상에나 해당됐다. 그러던 것이 저가항공과 숙박업소 개발로 더 이상 신분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휴가객이 몰려 발 디딜 틈 없는 지중해의 피서지에 가는 대신 영국 중산층에 새롭게 등장한 여행 트렌드가 바로 노스탤지어와 스테이케이션이다. 스테이케이션은 원래 2010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나온 말이다. 비싼 해외 휴가 대신 집에서 조용하게 휴가를 보내는 코쿠닝(Cocooning·누에고치처럼 집에서 지낸다는 조어)과 같은 뜻이다. 스테이케이션은 집에서 지낸다는 ‘stay home’과 휴가를 뜻하는 ‘vacation’이 합쳐진 단어이다. 여기서 ‘home’은 집뿐만 아니라 국내를 뜻하기도 한다. 한국의 ‘방콕’이나 ‘호캉스(호텔+바캉스)’와 같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국내에 머무르면서 과거의 향수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노스탤지어’라고 말한다. 노스탤지어는 유명 관광지나 외국인 관광객이 떼로 몰려와서 북적거리는 곳이 대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나만의 기억이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어릴 때 자라던 고향이나 모교 혹은 첫 데이트 장소, 부부가 처음 만난 곳 같은 데 말이다. 세계의 모든 유명한 박물관은 다 가보면서도 정작 안 가봤던 우리 동네 박물관을 찾아가는 일이 바로 노스탤지어와 스테이케이션이 합쳐진 경우이다.

물질적인 것보다 추억, 기억, 경험 같은 정서적인 면에 돈을 쓰려는 영국인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영국인은 일상생활을 위한 생필품, 옷 등에 돈을 쓰는 것은 아끼면서도 휴가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어차피 집은 사기 힘드니 가구나 그릇 같은 가재도구는 가장 간편하고 저렴한 것을 사고 휴가에 투자한다. 전문가들은 삶이 과거에 비할 수 없도록 팍팍해진 탓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가족과 친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일상과 방해(유대관계를 해치는)에서 벗어나는’ 휴가의 효과를 귀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각박해지는 피상적인 관광보다는 자신의 추억을 찾아다니는 구체적인 가치와 경험, 기억에 돈을 더 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인의 국내 여행이 엄청나게 늘었다. 영국 숙박업소는 올해 작년 대비 100만박(泊)의 내국인 예약이 늘었다. 이는 금액으로 8000만파운드에 해당한다. 영국 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런던 인근의 브라이튼 해변. ⓒphoto 유튜브
런던 인근의 브라이튼 해변. ⓒphoto 유튜브

휴식보다 가치 있는 체험을 원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 영국인의 휴가는 예전과 많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영국인의 휴가는 휴양지에서 책 읽고 수영하고 와인 마시고, 저녁에는 잘 차려입고 동네 식당 가서 가족 정찬을 하는 비활동적인 휴식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는 활동적이거나 경험을 할 수 있는 휴가를 원한다. 아직은 도시여행이 영국인의 관광 순위 1위이지만 험지를 탐험하는 여행이나 구릉지대를 도보여행하는 트레킹 혹은 평소에 해보고 싶던 특이한 운동(행글라이딩, 스피드 보트,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휴가도 늘고 있다. 새로운 지식 획득이나 체험을 해보려는 시도도 많다. 예를 들면 외국의 요리 강습에 참여한다든지, 와이너리에 가서 와인 테이스팅을 해본다든지, 인도에 가서 대체의학을 통해 지병을 치료해보는 식이다.

아버지 세대가 해봤음 직한 구세대의 휴가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 각 곳에 산재한 무수한 증기기관차와 운하 보트를 이용한 여행 같은, 1940~1960년대 스타일의 복고형 여행 말이다. 이는 플라스틱 레코드를 듣고, 종이 메모장을 사용하고, 필름 카메라를 쓰고, 종이책을 다시 읽는 디지털 세대의 아날로그화 풍조가 여행에서도 나타나는 셈이다.

더 나아가 단순히 흥미와 여흥만을 위해 휴가지를 선택하던 경향을 벗어나 ‘지속가능(sustainable)하고 책임 있는(responsible) 여행지’를 찾는 경향이 늘면서 최근 여행사들이 긴장하고 있다. 영국 여행객들은 여행사에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원한다. 여행사들이 관광지의 경제·복지·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인권·근로조건까지 살펴보고 여행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물보호 수준도 여행지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 영국 최대의 여행사 ‘토머스 쿡’은 코끼리와 낙타 타기, 돌고래 묘기와 고래 구경 투어를 이미 리스트에서 뺐다. 베네치아, 산토리니, 산마리노같이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으면서 주민들이 반발하는 곳도 피하고 있다.

프랑스인은 평소에 영국인은 음식도 먹을 줄 모르고 인생도 즐길 줄 모른다고 불쌍해한다. 그러나 영국인은 “프랑스인은 먹기 위해 살지만 영국인은 살기 위해 먹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영국인들은 신이 준 음식을 ‘맛이 있니 없니’ 평하면서 먹는 것은 신에게 불경한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또 자신들은 평소에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재충전의 기간으로 휴가를 보내는 데 비해, 프랑스인은 오로지 휴가를 가기 위해 평소에 일한다고 빈정거린다.

그러던 영국인도 이제는 ‘일상을 잊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switch off and switch on) 휴가’를 즐긴다. 휴가비가 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1인당 휴가비가 2018년에는 1인당 550파운드 정도로 조사됐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보면 2200파운드이니 영국인 평균 세후 연봉 2만1744파운드(연봉 2만7271파운드)의 10%를 넘는다.

휴가 자체가 인생

그렇다고 영국인에게 있어 휴가가 프랑스인들처럼 즐긴다는 개념만은 아니다. 모든 것을 잊고 단순하게 쉬는 것도 아니다. 휴가를 통해서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고 싶어한다고나 할까? 영국인들은 일상에서 혹은 일에서 굳이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는 것 같지 않다. 그냥 일은 일일 뿐이다. 일에서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을 수 있다면 정말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래서 영국인은 아무리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심하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퇴근 후의 삶이 있고, 주말이 있고, 거기에 더해 일 년에 한 달이라는 긴 휴가가 있어서다. 퇴근 후의 저녁, 주말, 특히 한 달의 휴가 기간에는 ‘부품’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영국인들의 휴가를 자세히 보면 휴가는 바로 인생인 듯하다. 휴가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휴가 전후도 행복에 포함된다. 영국인의 3분의 1은 휴가지에서 행복해하고, 5분의 1은 휴가를 예약할 때, 10분의 1은 어디로 휴가를 떠날지 준비할 때 이미 여행을 즐기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영국인은 일 년 내내 휴가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휴가를 다녀오면 가족끼리 둘러앉아 사진을 정리하고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또 행복해한다. 이렇게 영국인은 대단한 것이 아닌 자기가 가진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찾는다. 한국에서도 유행 중인 ‘소확행’이다. 그리고 다시 연말까지 다음 여행지를 각자 찾아본다. 그리고는 연말연시가 되어 온 가족이 모이면 둘러앉아 각자가 그동안 찾아본 내년 휴가지를 상의한다.

이를 노려 연말연시가 되면 영국 신문과 잡지, TV에는 각종 휴가 광고가 쏟아진다. 집으로도 온갖 여행 전단지와 프로그램 카탈로그가 배달된다. 가족들은 이들을 살펴보고 신년 휴가지를 연초에 결정한다. 거의 반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휴가 예약을 하는 셈이다. 여행업계 통계를 보면 예약은 매년 빨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물론 일찍 예약하면 할인을 해주기도 하지만 가고자 하는 날짜에 희망 행선지를 확보하려는 이유가 더 크다.

런던의 리젠트공원. ⓒphoto timeout.com
런던의 리젠트공원. ⓒphoto timeout.com

영국인들의 휴가 준비

연말연시가 지나면 가족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행사나 호텔, 항공사들이 업무를 시작하는 연초에 아버지는 각종 예약을 맡는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휴가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도 배우고 거기에 따르는 재료도 준비한다. 또 현지의 특산 요리도 조사하고 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알아놓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휴가지의 역사, 문화유산 등을 공부하고 투어 코스를 짠다. 교통을 알아보고 유적지의 개폐 시간, 휴양지 인근의 축제와 같은 조사도 아이들의 몫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준비를 즐기면서 이미 행복해한다. 1년 내내 휴가로부터 행복을 찾는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여행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여행의 즐거움의 반을 잃는 셈이다. 또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하면 의외의 이변으로 인해 여행을 망칠 위험도 줄어든다.

의외의 돌발 사태를 싫어하는 영국인의 휴가 준비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각종 보험을 휴가 예약과 동시에 한다. 물론 EU 국가 내에서는 현지 국내인과 똑같은 의료 혜택을 받기는 하지만 국내로 돌아와야 할 병이나 사고가 나는 경우의 운송수단 같은 경비에 대한 보험을 철저히 들어둔다. EU 국가라도 각국 법이 달라서 이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교통사고나 형사 사건에 개입이 된 때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출국이 제한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럴 경우 보석금을 내야 귀국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세세한 여행자 보험은 필수다.

이뿐만이 아니다. 예기치 않게 여행을 취소해야 할 경우에 대비한 보험도 들어놓아야 한다. 예를 들면 취소환불이 안 되는 여행을 예약해놓고 가족이나 본인이 갑자기 아픈 경우에 대비한 보험 말이다. 의외의 사태로 인한 손해를 지극히 싫어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피하고 싶어하는 영국인은 보험으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필자와 거래하는 한 영국인 가족이 바로 이런 대비를 안 해서 낭패를 본 대표적인 경우다. 이 가족은 거의 1년 전에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을 해놓고 영국인답지 않게 휴가 취소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달간의 가족 휴가 5일 전에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영국 장례식은 최소 10일은 필요하다. 사망진단, 사망신고, 장지 마련, 장례절차 예약, 장례식에 참석할 친지에게 통보 후 참석 확인까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5일로는 휴가 전에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휴가를 취소하면 전액을 돌려받지 못하는 조건이었다. 이 친구는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장의사 냉장실에 모셔놓고 한 달 휴가를 다녀온 뒤 장례식을 치렀다. 우리가 봐서는 이해도 용납도 안 되는 천하의 불효를 한 셈이다. 그런데 합리적인 영국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 달을 기다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어머니도 우리 가족이 휴가를 취소하고 한 푼도 못 돌려받는다는 걸 알면 펄펄 뛰면서 휴가를 가라고 하셨을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말을 남기고 가볍게 휴가를 떠나는 그 친구를 경악의 눈으로 본 기억이 생생하다.

휴가를 가기 위해 돈을 번다는 프랑스인이 이런 일을 했다면 이해가 가지만,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휴가를 간다는 영국인마저 부모의 장례식보다 가족의 휴가가 더 귀중한 것을 보면 유럽인에게 있어 휴가는 정말 불가침(sacrosanct)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 친구의 어머님이 진정한 유럽인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으셨을 듯하다. 오랫동안 영국에 살면서도 영국인의 의식구조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그 일은 도저히 이해도 용납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휴가철이 되거나 주위의 부고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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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유럽문화탐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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