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 ‘라프텔’ 직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남희 COO, 이진우, 은창현, 강한빛, 박진선, 박종원. (뒷줄 왼쪽부터) 여호정, 정지훈, 김민준, 이승훈. (가운데) 김범준 대표.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 ‘라프텔’ 직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남희 COO, 이진우, 은창현, 강한빛, 박진선, 박종원. (뒷줄 왼쪽부터) 여호정, 정지훈, 김민준, 이승훈. (가운데) 김범준 대표.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은 매니아, 오타쿠라는 말보다 ‘덕후’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영화·만화·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 매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변용한 단어다. 덕후는 이제 음지(陰地)의 단어가 아니다. ‘덕후가 돼야 성공한다’는 주장에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같은 유명 인사들이 자주 거론된다. 경영학, 소비자학, 사회학에서 ‘덕후’는 소비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덕후 콘텐츠, 그러니까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덕후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덕후를 주목해야 한다고 하는데, 덕후를 만드는 콘텐츠를 잘 활용한 사례는 드물다. 숨어 있는 덕후들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덕후 콘텐츠로 창업하는 사람은 많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애니메이션 전문 스트리밍 서비스 ‘라프텔’은 그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2014년 하반기에 처음 공개돼 2015년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라프텔’은 35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업계의 선두주자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운데 PC나 스마트폰 앱으로 라프텔에 접속하면 1200여 작품의 애니메이션을 한 사이트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용자들은 넷플릭스처럼 매달 일정한 금액을 내고 무제한으로 작품을 볼 수 있는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하거나 작품마다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형태로 애니메이션을 본다. 월정액 서비스는 올해 초에 처음 출시됐는데 애니메이션 덕후들의 관심을 끌어 회원 수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얼핏 보면 라프텔은 덕후가 세운,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발랄한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공 업체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라프텔은 그런 회사다. 연세대 동문인 김범준 대표와 김남희 COO 부부가 함께 세운 이 회사에는 현재 12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사무실은 연세대 내에 있는데 사무실 내 분위기가 마치 동아리방 같은 느낌을 준다. 사무실 구석구석마다 직원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가 있고 포스터가 걸려 있다. 인터뷰를 위해 흰 셔츠에 진회색 면바지를 갖춰 입은 김범준 대표는 맨발에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라프텔 직원들은 모두 반말을 쓴다. 스타트업에서 흔히들 경어를 쓰는 것과는 다른 모양새다. 김범준 대표는 “경어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게 하는 반면 원활한 의사소통을 막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기술 개발과 마케팅 전략으로 치열하게 토론할 때가 많은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격식 없이 반말을 쓰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다가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김범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직원들은 모두 덕후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직원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젊은 라프텔 직원들에게 라프텔은 일터이자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생활 공간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이 같으니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처럼 일한다는 게 직원들의 말이다. 그 때문인지 라프텔에는 “덕후가 직접 만드는 덕후를 위한 서비스라 덕후 마음을 잘 안다는 덕후들의 후한 평가가 많이 달린다”고 한다.

라프텔은 그저 동영상을 제공하는 플랫폼에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의 취향에 맞춰 사용자가 좋아할 법한 애니메이션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즘 시대의 스트리밍 서비스다. 사용자가 자신이 본 영화 별점을 매기는 것에서 시작해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이어나간 왓챠플레이처럼, 라프텔도 사용자가 입력한 애니메이션 평가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추천해주고 감상하게 한다.

라프텔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을 수 있다.
라프텔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을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추천해줍니다

라프텔을 이용하려면 자신의 취향을 입력해야 한다. 그동안 봤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작품에 대한 별점을 입력하면 인공지능(AI)이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준다. AI를 기반으로 한 라프텔의 개인화 추천 서비스는 두 가지 필터링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콘텐츠 자체의 특성을 분석해 비슷한 콘텐츠를 찾는 ‘콘텐츠 기반 필터링(CBF)’ 기술과, 유사한 취향을 가진 사용자의 행위를 분석하는 ‘협업 필터링(CF)’ 기술 등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사용자가 ‘원피스’라는 작품의 콘텐츠를 높이 평가하고 즐겨 본다고 하자. 해적이 등장하는 모험 활극인 ‘원피스’와 비슷한 작품을 추천하는 기술이 ‘콘텐츠 기반 필터링’이다. 그런데 ‘원피스’를 본 사람들 중에 유독 ‘소드 아트 온라인’이라는 작품을 본 사람이 많고 또 좋은 평가를 내렸다는 데이터가 있다고 해보자. ‘협업 필터링’ 기술을 이용하자면 A 사용자에게 ‘소드 아트 온라인’을 추천해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을 활용하려면 충분히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데이터베이스도 없이 맨땅에서 창업한 대학원생 김범준 대표에게 그만한 데이터가 갖춰져 있을 리가 없었다.

“서비스를 정식으로 오픈하기 전에 만화를 사랑하는 덕후들이 모이는 ‘부천만화축제’에 가서 무료로 체험 행사를 진행했어요. 만화에 대한 별점을 매겨달라고 부탁하면서 음료를 나눠주곤 했지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협력해주셔서 서비스 시작 전에 1만6000여개의 데이터가 쌓이게 됐습니다. 그것도 사실 부족한 양이기는 했지만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은 됐습니다.”

그동안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업체가 생겨났지만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 서비스에서 제공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애니메이션 시장이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 보니 판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김 대표는 이런 난관을 발로 뛰면서 직접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배급사에서도 저희 서비스를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시작했다가 유야무야 없어지는 서비스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판권을 주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죠.”

사실 김범준 대표도 ‘유야무야 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는 라프텔 이전에 선배와 함께 패션 관련 스타트업으로 창업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왜 실패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제가 잘 모르는 분야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뛰어들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흥미만 가지고서는 창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나쁜 것은 아니었어요. 사실 저에게는 즐거운 기억이 많았거든요. 다음번에는 실패하지 않게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커졌죠.”

그래서 김 대표는 다음 창업 아이템으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 성장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덕후인 부인 김남희씨와 함께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어둠의 경로’에서 양지로 나온 사용자들

애니메이션 인구는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김 대표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3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은 ‘돈 주고 보는 것’이 아니었다. 웹하드나 P2P 다운로드를 통해서 ‘어둠의 경로’로 보던 게 일상이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애니메이션 시장을 위축시킨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올해 초 정부의 단속에 걸려 문을 닫고 운영자가 구속된 불법 웹툰 복제 사이트 ‘밤토끼’가 한 해 끼친 피해액만 1000억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 소비자에게 만화든 영화든 음악이든, 문화 콘텐츠는 공짜로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나 IPTV,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강해졌다. 실제로 불법 저작물에 대한 단속도 강화돼 예전처럼 한자리에서 불법으로 아무 작품이나 다 다운로드하는 게 쉽지 않게 됐다. 라프텔은 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김범준 대표는 덕후의 눈으로 덕후 시장을 분석했다.

“보통 애니메이션 시장은 워낙 불법 복제·공유가 많이 일어나다 보니 축소돼 인식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글 트렌드 검색, 미국과 일본 시장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 소비자의 규모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불법복제 시장 규모만큼의 잠재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숨겨진 덕후가 많을수록 시장의 잠재력도 크다. 지금처럼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으로 언제 어디서나 동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덕후가 양지(陽地)로 나와 즐길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준다면 얼마든지 더 큰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봤다. 김범준 대표는 애니메이션 시장이 ‘블루오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정의롭고 당당한 덕후를 위한 스트리밍’이라는 라프텔의 구호는 이런 부분에서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힌 판권 문제는 김범준 대표와 라프텔 직원들의 진정성 있는 자세로 돌파할 수 있었다. 라프텔과 계약을 맺자는 제안에 수없이 거절당하면서도 김범준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일이 진척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TV 방영 애니메이션부터 최신 애니메이션까지, 요즘 덕후들이 좋아할 법한 애니메이션은 모두 라프텔에 이름을 올렸다. 애니메이션 덕후들 사이에서 라프텔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범준 대표는 아직 “성공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라프텔은 이제 조금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덕후 시장의 규모가 이보다는 훨씬 더 클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략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데이터를 쌓고 사용자를 늘리는 데에만 안주하지 않고 라프텔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라프텔을 덕후의 중심이 되는 커뮤니티로 만드는 것이다.

“덕후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보고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에요. 지금까지는 감상 따로, 작품에 대한 토론 따로 이렇게 이뤄지곤 했었는데 만약 라프텔 내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더 많은 덕후들을 끌어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범준 대표가 생각하는 미래의 라프텔 모습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애니메이션에 국한된 지금의 라프텔 서비스를 라이트노벨, 만화 같은 다른 덕후 영역으로도 넓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왓챠플레이나 넷플릭스처럼 대표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은 뒤에, 동남아 시장에도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남아 덕후 시장은 우리와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재력은 무척 많은데 음지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죠. 이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해 라프텔은 덕후를 위한 서비스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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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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