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최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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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 전문 번역가 조영학(58)씨가 번역에 관한 책 ‘여백을 번역하라’를 냈다. 조씨가 지난 15년간 낸 번역서는 모두 80여편. 지난 8월 22일 만난 그는 자신이 번역한 책들이 “열에 아홉은 장르소설”이라고 했다. 호러·스릴러·범죄·팩션·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을 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음사의 장르소설 브랜드 ‘황금가지’ 출판사가 내는 장르소설 시리즈 ‘밀리언셀러 클럽’ 100편 중 25편을 번역했다. 그는 장르소설 독자가 좋아하는 번역가 1위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책은 ‘번역가로서 살기’와 ‘번역론’이라는 두 덩어리로 구성돼 있다. 책 앞부분의 장르소설 전문 번역가로 살아온 얘기가 흥미로웠다. 그의 별명은 ‘욕쟁이 번역가’. 그는 장르소설에 흔히 나오는 욕설과 비속어를 옮기는 걸 아끼지 않는다. 출판사는 대부분 쌍시옷이 들어가는 번역어 사용을 꺼려한다. 가령 ‘놈’이라고 옮겨야 할 걸 ‘녀석’이라고 바꾼다. 그가 2004년에 번역한 ‘고스트 스토리’(피터 스트라우브)가 그랬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의 작가 조지 펠레카노스는 뒷골목 출신이다. 자기를 표현하는 데 욕, 비속어를 동원한다. 이런 사람의 문장에서 욕을 욕으로 그대로 써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글이 죽는다. 출판사가 반대하길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욕설을 그대로 쓰든지, 출판을 하지 말든지 선택하라’고. 결국 비속어를 살리는 쪽으로 나갔다.”

‘여백을 번역하라’에 소개한 비속어 문장은 이런 거다. ‘Bullshit flowed bilateral. Banister’s office was submerged in right-wing rebop.’ 조씨는 이 영어 원문을 이렇게 번역했다. ‘지랄도 풍년이다. 배니스터의 사무실은 우익 골통들의 개지랄 속에서 허우적댔다.’ 욕도 잘할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욕설을 어떻게 능란하게 번역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집안 사정으로 중·고교를 못 다니고 도금공장, 금은세공,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유장한 욕설을 다 배웠다”며 웃었다. 그는 군대도 인쇄 주특기로 다녀왔다. 제대한 후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고, 한양대 영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가 좋아하는 장르소설 작가는 스티븐 킹. “스티븐 킹 소설 번역을 의뢰받았을 때 가장 영광스러웠다”고 한다. 스티븐 킹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원작이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작가다. 그의 글쓰기에 관한 책 ‘유혹하는 글쓰기’는 글쓰기를 위한 책으로도 한국에서 인기 높다. 조씨는 ‘스켈레톤 크루’ 1·2편을 시작으로 ‘모든 일은 모두 결국 일어난다’ ‘해가 저문 이후에’라는 단편선집 3권과 장편 ‘듀마키’를 번역했다.

조씨는 “꽤 오랜 기간 번역쟁이로, 번역 선생으로 살았건만 여전히 번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직역과 의역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 “직역과 의역 중에 무엇이 옳으냐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가르친다. 그들에게 의역은 뭐고, 직역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건 잘못된 번역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름 붙인 것이다.”

그는 이번에 낸 책에서 이렇게 썼다. “한글은 한글 문법 체계에서만 숨을 쉰다. 한글 기호가 살기 위해서는 한글의 환경, 즉 문법 체계가 필요하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번역가여,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언어로 번역하라.”

그는 독자는 가독성이 떨어지면 작품 자체가 심오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술술 읽히는 게 아무래도 번역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 ‘번역서는 번역서다워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조씨는 “‘작가의 의도를 살리는 데 초점을 두고 번역했다’는 말은 ‘번역투를 남발했다’는 말이다. 이는 정말 사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책 제목 속의 ‘여백’은 이 맥락에서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백을 번역해야 한다. (외국어 단어와 같은) 기호에 매몰되어서는 여백을 번역할 수 없다. 기호에서 멀어져라. 기호에서 멀어질수록 의미와 가까워지고, 표현은 단단해진다.”

번역을 잘한다는 건,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글에 눈떴다”라는 번역가(이희재·‘번역의 탄생’ 저자)의 고백이 그래서 나왔다. 영어에는 형용사+명사 구조가 많으나, 한글에는 부사어, 명사+서술어 방식이 많다. 예컨대 ‘I have a good memory’라는 영어를 보자. ‘good’이라는 형용사와 ‘memory’라는 명사가 있다. 이를 한글로 옮겨보라고 하면 많은 이가 ‘나는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건 좋은 한글이 아니다. 한국어에 좀 더 가까운 번역은 ‘나는 기억력이 좋다’이다.

‘He has sensitive and almost sad eyes’라는 문장을 어떻게 한글로 옮길 수 있는지도 보자. 직역투 문장은 ‘그는 섬세하면서도 무척이나 슬픈 눈을 가졌다’이다. 조영학씨가 추천하는 번역문은 이렇다. ‘그의 눈은 섬세하면서도 무척 슬퍼 보인다.’ 영어의 ‘형용사+명사’ 구조가 한글로 바뀌면서 ‘부사+서술어’ 방식으로 달라졌다. 부사 표현을 활용하면 한글의 가독성이 좋아진다고 조씨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과 논리에 따라 글을 번역하는 게 자연스럽다. “구문 순서대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절을 먼저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의미가 모호해지고, 주어가 숨어버린다.” 학교 다닐 때 영어 선생님은 항상 ‘which’나 ‘that’이 들어간 관계대명사절을 먼저 번역하는 방식으로 문장 뜻풀이를 가르쳐줬던 것 같다. 조영학 번역가는 그걸 얘기하고 있다. 영어 원문 한 개를 보자. 그가 말하는 ‘시간과 논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The marvelous thing is that it’s painless.’ 이 문장은 ‘통증이 없다는 건 놀라운 거다’라고 흔히 옮긴다. 하지만 문장의 시간과 논리에 따라 앞에서부터 옮기면 ‘놀라운 건 고통이 없다는 거다’가 된다. 주어가 살아있고 저자가 말한 어순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조영학씨가 말하는 대로 ‘여백’을 살리는 번역을 하면 이런 게 된다. ‘놀랍게도 아프지 않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 마석의 집에서 기계식 타자기를 두드리며 번역한다. 20만원 가까운 기계식 타자기는 번역가를 위한 도구이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번역하고, 출근하는 아내를 깨우고 밥상을 차린다. 퇴근하는 아내를 위한 저녁식사 준비도 그의 몫이다. 부인은 중학교 교사. 그의 밥상 차림 이야기는 ‘상 차리는 남자’라는 제목의 책으로 2015년에 나온 바 있다. 번역가의 삶은 쉽지 않다. “번역가 일을 시작할 때 200자 한 장 원고료가 4000원이었다. 15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4000원이다. 하늘이 점지해준 천직이 아니라면 이쪽으로는 오줌 눌 생각도 하지 말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번역가 지망생은 여전히 많다. 은퇴 나이가 일반 직장에 비해 늦고, 번역가에 대한 사회 이미지가 좋은 건 장점이다.” 취재가 끝난 뒤 나는 그가 번역한 장르소설 몇 권을 샀다. 내가 장르소설을 산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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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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