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빵집 ‘르 팽 코티디앵’ 내부. 맨해튼 컬럼버스 서클 인근의 매장이다.
뉴욕 빵집 ‘르 팽 코티디앵’ 내부. 맨해튼 컬럼버스 서클 인근의 매장이다.

2000년대 중반 뉴욕에서 유학할 때 처음 ‘르팽’을 먹어봤다. 맨해튼 공연 예술의 중심지인 링컨센터 길 건너편이었으니 서울로 치면 예술의전당 길 건너편 서초동 골목 어디쯤이라고 하면 될 거다. 선배가 ‘르 팽 코티디앵(Le Pain Quotidien)’으로 오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다. 상호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된 집이어서 대단한 음식을 사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 옷도 깔끔하게 입고 갔던 것 같다.

어퍼웨스트 사이드를 관통하는 브로드웨이에서 살짝 비껴 있는 골목길에서 찾아 들어간 르팽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식당이었다. 재킷을 괜히 입고 갔다 싶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는 빵집의 이름을 설명해주었다. “‘코티디앵(quotidien)’이 ‘일상의, 매일의’이라는 뜻이니까 이 집의 상호는 ‘매일 빵, 일용할 양식’ 정도다.” 선배는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특별할 게 뭐가 있겠냐”며 잔뜩 기대하고 재킷을 입고 간 나를 놀렸던 기억이 난다. ‘설렁탕’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모르는 외국인 친구가 대단한 거 먹는 줄 알고 정장 차림으로 나온 걸 상상하면 된다. 처음에는 내가 ‘quotidien’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던 게 좀 창피했지만 곧 재킷 입고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의 맛과 분위기가 ‘예의를 표하기 충분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르팽은 1990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탄생했다. 젊은 셰프였던 알랭 쿠몽(Alain Coumont)은 당시 브뤼셀의 빵집이 맛이 없어서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직접 빵집을 차렸다. 그는 어릴 적 먹던 빵과 분위기, 익숙한 맛을 재현하려고 물, 소금, 밀가루에 정성을 들였다. 인테리어 소품은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했고, 식탁은 긴 테이블을 벼룩시장에서 들여왔다. 그가 사온 식탁은 ‘커뮤널테이블(Communal Table·공동식탁)’이라 불리는 8인용 테이블인데 처음 본 사람도 합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위치해 있고, 여러 인종이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사는 브뤼셀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식탁은 퇴역한 벨기에 기차의 나무 바닥을 뜯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나무 바닥이 식탁으로 둔갑한 것이다. 옹색한 형편에서 빵집을 시작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바구니에 넘치도록 담은 빵. 위는 르팽의 로고.
바구니에 넘치도록 담은 빵. 위는 르팽의 로고.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바닥으로 식탁을 만든 걸 알았다면 기분이 나빴을 만도 한데 빵맛이 신발 자국을 이겼나 보다. 첫 가게를 열고 몇 달 안 되어 10개의 르팽이 브뤼셀에 문을 열었다. 첫 가게를 연 지 7년 만에 미국에 진출하여 뉴욕시 메디슨가에 자리를 잡았고, 2004년에는 본사를 아예 뉴욕으로 옮겼다. 이 글을 쓸 때까지도 르팽을 뉴욕에서 시작한 미국 빵집이라고 알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르팽은 현재 뉴욕 맨해튼에만 30여개가 있고,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 도쿄에도 지점이 있다. 4년 전 출장길에 두바이 공항에서 르팽을 보고 잠결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던 기억도 있다. 현재 18개국에 220여개의 지점이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본사에서 직영하고 나머지 나라들은 프랜차이즈 체제로 운영한단다.

동네빵집이었던 르팽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사세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친근하고 푸근한 분위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대리점에서 동네빵집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고객들에게 먹혔다. 2008년 6월 6일 뉴욕타임스는 ‘르팽이 천재적인 점은 동네 카페처럼 느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케이크로 가득한 쇼윈도와 친근한 빵카운터, 큰 테이블이 놓인 낡은 분위기가 ‘다른 사람은 잘 모르고 나만 아는 동네빵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업자인 쿠몽 역시 “사람들은 르팽을 여전히 식사 가능한 빵집인지 아니면 빵을 파는 레스토랑인지 헷갈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브뤼셀의 첫 가게를 만들 때 들여놓은 각종 앤티크 소품과 커뮤널테이블의 느낌이 어떤 매장에서나 그대로, 여전히 묻어나게 한다는 것이 쿠몽의 철학이다.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분위기를 제대로 자극하자는 것이다.

최근 뉴욕 출장길에 들른 르팽은 10여년 전 처음 갔던 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만큼 뉴욕에 여러 개가 생긴 터였다. 링컨센터점보다 뒤에 생긴 곳일 텐데 더 오래된 동네빵집처럼 인테리어와 소품들에서 나무향이 가득했다. 쇼윈도에 가득한 예쁜 조각케이크와 바구니에 가득 담긴 채 투명 카운터 뒤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가지각색의 빵들은 마음씨 좋은 주인이 하나 먹어보라고 권할 것 같은 자태였다.

르팽 매장에 진열된 빵들.
르팽 매장에 진열된 빵들.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레스토랑

빵맛보다도 일단은 인테리어가 시선을 자극했다.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레스토랑(Carbon Neutral Restaurant)’이라는 큰 제목 아래 과학 수업 같은 내용을 칠판에 손글씨로 한 바닥 써 놓았다. 과거 불조심 포스터처럼 벽에 크게 붙여 놓은 포스터에는 ‘채소를 더 드세요(Eat More Plants)!’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서 식사를 하면 내 몸도 건강해지고 지구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잠깐은 들었다. 출근 시간이어서 빵 하나 사서 입에 물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매장에는 혼밥족 뉴요커들을 위한 작은 테이블도 많았다. 르팽의 상징인 커뮤널테이블도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필자 일행은 셋이어서 다행히 커뮤널테이블로 안내받았다. 긴 식탁에 앉으니 이제야 르팽에 온 것 같았다. 한국 시간으로는 치맥을 할 시간이었는데 현지 시간으로 아침을 먹으려니 좀 어색하기도 했다. 그 시간에 응당 있어야 할 맥주 대신 커피와 주스를 시켰고, 치킨 자리는 빵 바구니가 대신했다.

마트에서 파는 애플수박을 반으로 잘라 속을 파놓은 것 같은 커다란 빨간 잔에 커피가 담겨 나왔다. 손잡이도 없는 그냥 볼(bowl)에 담겨 나왔다. “사약 사발”이라며 깔깔댔던 예전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약간은 연해서 탕약 색깔이 나는 커피가 그득 담겼는데 구수한 맛이 났다. 숭늉이나 달달한 미숫가루를 담아도 어울릴 사발로 커피를 마시면 뉴요커들도 자기들이 떠나온 세계 각처의 고향 생각이 나나 싶었다.

빵은 나무바구니에 넘치게 담겨 나왔다. 넘치는 빵이 바구니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더 넘쳐 보이려고 했는지 빵 봉투로 쓰일 누런 종이를 바구니에 깔고 옆을 둘러서 빵을 담았다. 유기농 사워도우를 비롯하여 먹음직한 빵들이 한 조각씩 썰어져 나왔다. 바로 구워서 나왔는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겉을 더 바삭하게 구워 약간은 탄맛이 나는 식빵 토스트는 버터를 듬뿍 넣은 반죽을 불에 그을려 고소함이 그득했다. 한국에서는 얇게 펴서 바르는 버터를 한 덩어리 듬뿍 잘라 올려서 먹었는데 느끼하기는커녕 담백했다. 단백질은 초대받지 못한 탄수화물과 지방의 향연이었지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화룡점정은 잼이었다. 르팽은 직접 만든 잼을 병이 아니라 유리그릇에 먹기 좋게 담아둔다. 익숙한 브랜드의 라벨지가 둘러져 있는 병이 아니라 좋은 향의 수제 잼에 걸맞게 예쁜 유리그릇에 담아두는 것이다. 세 가지 맛의 잼은 딸기잼이 기본인 이방인에게 달달한 잼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었다. 과일향 나는 설탕물이 아니라 절인 과일을 먹기 좋게 저며놓은 것이 진짜 잼이다. 달콤했지만 설탕맛이 나지 않았고, 가공되었지만 생과일보다 먹기 좋았다. 출장 온 ‘아재’ 셋에게는 너무나 달달하고 어색한 아침식사였지만 누구도 라면이나 해장국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서양의 시골 밥집에서 먹는 것 같은 빵맛이 무엇보다 좋았다. 빵도 든든하고 맛있는 한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쌀밥 매니아에게도 가르쳐준 한 끼였다.

르팽 매장 외관.
르팽 매장 외관.

뉴요커들의 아침식사

뉴요커들의 아침 빵은 베이글이나 롤이라 불리는 빵이 기본이다. 아침에 먹는 빵이 지역별로 차이가 있는데, 도너츠나 식빵을 주로 먹는 지역도 많다. 베이글은 유대인들이 주로 먹어서 유명해진 빵의 일종으로 밀가루 덩어리 그대로이다. 누룩을 쓰지 않고 물에 튀겨낸다. 주로 구워서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게 아침식사다. 물론 다른 샌드위치 재료를 넣어서 든든하게 먹기도 한다.

‘롤’이라고 불리는 빵은 한국에서는 쉽게 먹기 힘든 빵이다. 겉은 오븐에서 구워서 노리끼리한데 속은 그냥 흰색 빵이다. 생긴 게 단팥빵이나 소보루빵 같아서 굽기도 어렵다. 콜드 샌드위치에도 쓰이지 않는다. 반을 갈라서 버터를 발라 속을 지지고 거기에 베이컨, 치즈, 계란 등을 넣어 먹는다. 뉴요커들이 아침을 해결하러 가는 델리에 가면 베이글이나 롤, 둘 중 하나를 주로 먹는다. 그런데 르팽에 들르는 뉴요커들은 이 둘을 찾지 않고 유럽식 빵을 찾는다. 어느 델리를 가나 별 차이 없는 베이글과 롤을 벗어나 조금은 다른 빵을 맛본다. 실제는 델리 가게가 동네 가게이고 르팽이 프랜차이즈인데, 식상한 일상과는 조금은 다른 맛을 체인점에서 먹는 아이러니가 일상이 된 것이다.

알고 보면 프랜차이즈이지만, 그 안에 있는 동안은 동네빵집의 푸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이 르팽이다.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세상 같다. 맨해튼, 아니 도쿄나 홍콩의 고층빌딩 숲을 거닐다 불현듯 유럽의 시골빵을 베어물고 싶으면 들어갈 만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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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권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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