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한 홋카이도 풍경.
시간이 멈춘 듯한 홋카이도 풍경.

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나는 눈으로만 잠깐 보고 돌아서는 여행이 늘 아쉬웠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 온몸으로 부딪치는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대학 친구와 함께 일본 홋카이도 중부를 자전거로 달리기로 했다. 7월 31일부터 7박8일간, 치토세(千歲)공항~삿포로(札幌)~오타루(小樽)~다키가와(滝川)~에베오쓰(江部乙)~아사히가와(旭川)~나카후라노(中富良野)~후라노(富良野)~삿포로 코스를 돌기로 했다. 해외 라이딩이 처음이라 부담스럽긴 했지만, 새로운 도전 속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치토세공항 밖으로 쫓겨나다

7월 31일 자정 무렵 자전거를 분해하는 데 1시간 이상 끙끙댔다. 앞뒤 바퀴와 핸들을 빼서 부피를 최소화하고 가방에 넣어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폭발 방지를 위해 바퀴 바람도 빼두어야 했다. 다행히 인천공항에선 추가요금 없이 ‘대형화물’로 자전거를 부칠 수 있었다. 비행기가 동해 상공을 나는 동안 나는 홋카이도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낭만적인 꿈에 부풀었다.

2시간40분의 비행 끝에 치토세공항에 도착한 뒤 우리는 입국장 창가로 가서 자전거를 조립했다. 20분쯤 지났을 때 공항 보안요원이 다가왔다. “안전 때문에 이곳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수 없다. 건물 밖으로 들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부품과 공구를 바닥에 펼쳐놓은 우리는 “자전거 조립을 끝내야 끌고 갈 수 있지 않느냐”고 했지만, 안전요원은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조립하다 만 자전거를 카트에 싣고 엘리베이터로 1층까지 내려와 출국장 문을 나섰다. 그날 홋카이도 낮 기온은 30도를 넘었다. 자전거를 다시 조립하는데 ‘낭만’ 대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공항 화장실에서 라이딩복으로 갈아입고서야 여행이 시작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삿포로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GPS(위성항법장치) 도움 없이 지도에만 의지한 우리는 이날 삿포로까지 총 50여㎞(친구의 거리측정기 기준)를 달렸다. 36번 국도는 자전거도로가 나 있어 비교적 안전했지만 대형차량의 매연과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한강 라이딩보다 2배는 힘들었다. 삿포로 호텔에 도착한 것이 저녁 7시쯤. 식사와 휴식시간을 빼고 5시간을 달렸다.

이튿날(8월 1일) 아침 홋카이도(北海道)대학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14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이 대학은 일본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설립된 9개 제국대학 중 하나이다. 당시 일본 국내에 도쿄(東京)·교토(京都)·도호쿠(東北)·규슈(九州)·홋카이도·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등 7개, 식민지에 경성·타이베이 제국대학 등 2개가 세워졌다고 한다. 홋카이도대학 교내에 미국 매사추세츠대 농과대학장을 지낸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1826~1886)의 동상이 있었다. 그는 이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업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초빙되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홋카이도를 현대화된 농업기지로 키우려 했던 메이지 정부의 의지가 읽힌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명언은 클라크가 이곳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의 일부라고 한다. 이 대학은 식물과 농작물 연구가 유명하고, 저온과학연구소, 북방생물권과학센터 등이 설치돼 있다고 한다. 학생과 교수들이 교내를 자전거로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빨간 벽돌 건물인 구 홋카이도 청사를 구경한 후 삿포로 시내를 벗어나다 ‘하얀 연인의 공원(白い恋人公園)’에 우연히 들어갔다. 유럽풍 건물에 미니하우스를 갖춘 과자 만들기 체험 공간이었는데,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은 단연 최고였다.

다리를 건너자 오타루였다

‘삿포로 즐기기’는 마지막 날로 미루고, 우리는 5번 국도를 따라 오타루로 향했다. 홋카이도는 면적(8만3453㎢)이 남한의 84%에 달하고 높은 산도 많다. 오타루로 가는 길에도 긴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로 여행할 때는 오르막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은 단 1㎝도 내 두 발로 가야 한다. 따가운 햇볕 아래 저단 기어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1m, 2m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은 사실 고통스럽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지’ 하는 자괴감도 든다. 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계곡을 만나거나, 길가의 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올 때면 그런 시름도 스스르 녹아내린다.

오르막이 끝날 때쯤 길이가 500m 정도 되는 긴 교량이 나타났다. 그 다리에 올라서자 갑자기 2~3도 낮은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타루가 반겨주는 듯했다.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가 된 오타루는 태엽을 감으면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골’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오르골 공원은 전 세계 관광객들로 북적댔다. 18~19세기 서양의 영향을 받은 근세 건축물들이 지금은 호텔과 상점, 공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바닷가 수산물 집하창고와 운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노을이 지는 오타루 운하를 뒤로하고 나와 친구는 근처 식당을 찾아 삿포로 맥주잔을 부딪쳤다.

급격한 공동화가 진행 중인 일본 농촌

셋째 날(8월 2일)은 오타루에서 다키가와(滝川)까지 기차로 이동했다. 도시 간 국도의 매연이 싫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기차든 버스든 자전거를 실을 때는 반드시 분해해서 포장해야 한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린 삿포로역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호주 여성 두 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은 홋카이도 최북단 왓카나이(稚內)로 가서 다시 리시리(利尻)섬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들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다키가와에서 열차를 내린 우리는 약 7㎞를 달려 숙소 에베오쓰(江部乙)온천에 도착했다. 농촌인 에베오쓰는 서너 집 건너 하나꼴로 빈집이 눈에 띄었다. 대로변 건물도 폐쇄된 지 오래된 듯 주변에 잡초만 무성했다. 일본 도시학자가 쓴 ‘오래된 집, 무너지는 거리’란 책을 보니, 일본은 이미 총 세대수(5245만)보다 총 주택수(6063만)가 많은 사회다. 2013년 일본의 빈집은 820만채를 넘었고, 2023년쯤엔 1400만채, 단카이세대(1947~1949년생·약800만명)가 사라지는 2035년쯤에는 2150만채로 3채 중 1채꼴이 될 걸로 예상된다(노무라종합연구소 예측)고 한다. 저출산·고령화·인구감소·주택노후화·지역공동화(空洞化)·지방재정고갈 등의 사회문제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10~20년 앞서간다. 최근 서울 부동산 폭등의 특이한 현상을 맞은 우리는 일본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미우라 아야코를 만나다

넷째 날(8월 3일)은 최저기온 16도, 최고기온 28도였다. 새벽에 이불을 덮어야 했다. 에베오쓰에서 아사히가와의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문학관까지 약 50㎞를 달렸다. 홋카이도 중부지역은 낮은 구릉지대에 누런 밀밭과 하얀 메밀꽃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삿포로맥주와 소바의 재료다. 12번국도를 달리다 이시카리강(石狩江)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부터 6~7㎞는 국도를 따라가지 않고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구 도로로 갈 수 있었다. 강을 따라 난 이 길을 달리자 햇빛이 부서지는 짙은 숲의 향기와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의 풍경이 축복처럼 내 몸으로 들어왔다. 한쪽이 트인 특이한 터널도 구경할 수 있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은 아사히가와 시내에서 약 1.5㎞ 떨어져 있다. 입장료 500엔, 냉커피 300엔. 1964년, 잡화점을 하던 평범한 주부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사히(朝日)신문 1000만엔(1억원) 고료 현상공모에 소설 ‘빙점(氷点)’으로 당선되어 일약 스타 문학가로 떠올랐다. 폐결핵과 혈소판감소증 등 온갖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녀는 남편의 헌신적 내조로 77세까지 소설과 수필집 등 무려 250여편을 남겼다. 문학관 1층에는 그녀가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원고, 옷 등 많은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 온화한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아사히카와 3번가와 6번가 주민들이 주최하는 ‘산로쿠(三六) 마쓰리’를 구경하는 행운도 누렸다. 라면과 구이, 맥주 등 먹거리가 풍부했고 동네별 집단가무 경연은 열기가 대단했다. 나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시민이 주인이 된 진짜 축제였다.

옥빛 시냇물과 언덕 위의 구름

8월 4일은 가장 힘들고 긴 하루였다. 출발은 좋았다. 아침 8시 비에이로 가는 길 옆에 제루부 언덕 화원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큰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비에이를 지나 오르막이 시작될 즈음 친구가 자동차길이 싫다며 갑자기 우측 오솔길로 빠졌다.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다. 그 길은 100년 전쯤 우마차가 다녔을 법한 자갈길이었다. 출입금지 표지판도 나왔다. 홍수에 도로가 파여 끊어진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끊긴 길을 건넜다. 도중에 자동차 여행이었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을 만났다. 바닷물 같은 옥빛 시냇물 너머로 푸른 산등성이가 곰처럼 웅크리고 있고 그 위로 흰구름 몇 점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인적 없는 자갈길을 7~8㎞ 헤매자 포장도로가 나왔다. 아스팔트길이 문명의 상징처럼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 길은 비에이의 구릉 위 농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유럽의 농촌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 추수를 끝내고 둥글게 말아놓은 사료 더미가 평화로웠다.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조력자는 ‘중력(重力)’이다. 오르막에선 여행객의 몸을 잡아끌지만, 내리막에선 페달을 밟는 수고를 덜어준다. 비에이 언덕을 내려올 때 이번 여행 최고속도인 약 45㎞가 나왔다. 최대 난코스는 숙소인 게스트하우스 아카네 야도(Akane-yado·夕莤舍)로 올라가는 마지막 오르막이었다. 경사는 20~30도, 길이는 5㎞쯤. 비에이에서 길이 엇갈려 친구와 헤어진 뒤 혼자 숲길을 올라가야 했다. 오후 6시 반이 넘어 약간 어둑해진 숲길은 인적이 끊기고 새소리만 들려 금방 어디에서 곰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혼자 자전거를 끌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으스스한 숲길을 올라가는 기분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뒤섞여 묘하면서도 짜릿했다. 친구는 깜깜한 밤중에 숙소에 도착했고 우리는 캔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바라본 2000m급 산들.
게스트하우스에서 바라본 2000m급 산들.

평온, 평화, 충만의 땅

전날 밤 고생하여 올라온 게스트하우스는 다음날 아침 최고의 풍경을 선물했다. 주인 부부가 마련해준 정갈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믹스커피 한 잔을 타서 건물 앞 데크로 나서자, 멀리 구름 걸린 2000m급 산들과 끝도 없는 푸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런 밀밭과 유럽풍의 건물, 트랙터를 움직이는 농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엔 북핵(北核)도, 김정은도, 정쟁(政爭)도 없었다. 오직 평온, 평화, 충만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가슴 시리도록 평화로운 풍경을 마음에 꼭꼭 담았다. 이날은 각자 스케줄대로 달리기로 한 날이어서, 나는 후라노로 오는 길에 여유를 부렸다. 시골 초등학교를 구경하기도 하고, 주택가로 들어가 건물 구조를 살피기도 했다. 후라노역 관광안내소에 들어서자 한국어 안내원 시미즈 구니오(淸水邦雄)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산대에서 공부한 그는 지도를 펼치고 주황색 펜으로 볼 곳과 맛집으로 가는 길을 표시해주었다. 그가 추천한 와이너리 겸 베이커리 카페인 간파나 로카테이의 블루베리·딸기 케이크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치즈 공장에는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이 넘쳤다. 세계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일본 농업의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전거 여행 중인 필자(왼쪽).
자전거 여행 중인 필자(왼쪽).

자전거 여행자를 배려하는 일본 운전자들

이튿날 후라노역 앞에서 자전거를 분해해 버스에 싣고 삿포로로 이동했다. 차비는 2260엔. 호텔에 짐을 풀고 오도리공원의 맥주 축제장으로 향했다. 방송탑을 중심으로 꽃과 잔디밭이 시내를 관통하는 이 공원은 겨울엔 세계 3대 눈축제인 유키 마쓰리가 열리는 곳. 젊은 남녀와 직장인들이 3000~5000㏄ 맥주통을 가운데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웃고 떠드는 모습은 한국과 똑같았다. 우리도 거기에 합류했지만, 대량으로 조리된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삶은콩 안주에 맥주 한 잔이면 충분한 듯했다. 8월 7일 오전 다시 자전거를 포장해 치토세공항에서 부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인들의 배려심이다. 7박8일 동안 도로를 달리는 우리에게 클랙슨을 울리거나 위협적으로 운전하는 자동차는 한 대도 없었다. 특히 대형 트럭들은 우리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반대편 차선을 넘어 반원형으로 우회해 추월해갔다. 그들의 배려 덕분에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지나친 이름 모를 수많은 일본 운전자들에게 감사한다. 홋카이도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다시 몸이 근질거린다. 이 글 마감 직전 홋카이도에서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안타깝다. 하루빨리 복구하여 정상을 되찾길 바란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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