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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호] 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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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파리의 셀러브리티 日 후지타 사망 50주기

우윳빛 비너스에서 죽음의 전쟁화까지

글·사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후지타 사후 50주기 특별전이 열린 파리의 ‘마욜미술관’.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와 처음 만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이미 10년도 넘은 과거지만, 파리 거리를 걷던 중 기묘한 모습의 동양인 포스터 하나를 발견했다. 요즘 한국 청년들에게 유행하는, 앞머리를 눈썹 바로 위까지 늘어뜨린 뒤 일직선으로 자른 헤어스타일이다. 작은 귀고리와 함께 둥글고 두꺼운 뿔테 안경, 히틀러 스타일 콧수염으로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다. 이미 철 지난 전시회 포스터로, ‘Lonard Foujita’가 사진 속 주인공 이름이다. 화가였다.
   
   당시 포스터 속 동양인에 대한 첫인상은, 뉴욕이나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위예술형 동성애자 느낌이었다. 애수라고나 할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얼굴 전체에 배어 있다. 기억에 선명히 남은 이유는 ‘튀는’ 외모나 표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포스터 아래 작게 표기된 촬영 시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1917년 파리 촬영’이었다. 21세기 뉴욕에도 통할 듯한 동양인의 활동 시기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때와 일치한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동양인 화가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곧바로 알아봤다.
   
   ‘1886년 도쿄(東京) 출생. 도쿄미술대학 출신으로 1913년 프랑스로 유학. 파리 몽파르나스(Montparnasse) 지역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본 귀국 종군화가로 활동. 1949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이주. 1955년 프랑스로 귀화. 1968년 스위스에서 사망. 20세기를 통틀어 일본 밖에서 활동한,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무성 흑백 필름에서 컬러로 이어지는 82세 생애 예술가의 궤적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본다면 청·일, 러·일, 1차·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크게 4개의 전쟁을 목격한 세대다. 어떻게 파리에서 청춘과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까? 곧바로 후지타 작품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후지타 작품만을 특별히 모아 전시하는 곳은 없었다. 동양인 후지타의 작품은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국에 흩어져 있다. 60여년간에 걸쳐 제작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산재된 수십 군데 미술관을 전부 돌아다녀야만 했다. 후지타가 프랑스 화단의 중진으로 알려진 것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다. 미술거래상을 통해 프랑스에서 유럽, 나아가 일본까지 그림이 역수출되면서 여기저기 분산된다.
   
   
▲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후지타 전시회 포스터. 포스터의 인물은 1917년 촬영한 후지타.

   누드화의 도발과 도전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후지타와 다시 만난 것은 올해 5월이다. 프랑스 파리 제7구에 위치한 마욜미술관(Muse Maillol)에서 열린 특별전시회 덕분이다. 후지타 사후(死後) 5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전이다. 파리의 마욜 특별전은 7월에 끝났지만, 전시 작품 대부분이 곧바로 일본으로 옮겨져 현재는 도쿄 특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쿄도(都)미술관에서 10월 8일까지 계속될 ‘사후 50년’이란 타이틀의 특별전이다. 글로벌 시대의 신속성과 편의성은 예술세계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파리에서 전시회가 끝난 지 불과 2주 만에 도쿄에서 재음미해볼 기회가 주어진다. 마욜이 그러했듯이 도쿄 전시회도 사람들로 미어터진다고 한다.
   
   마욜 특별전은 전부 3개층에 걸쳐 이뤄졌다. 그의 그림을 이곳저곳에서 간간이 접할 수 있었지만, 사진을 포함해 100여점 이상의 후지타 작품을 한꺼번에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평소 갖고 있던 후지타에 관한 관심과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별전에서 필자가 가장 주목한 작품은 여성 누드화다. 1920년대, 40대 직전의 후지타가 그린 1인 누드화다. 전시된 1인 여성 누드화는 전부 5개다. 다양한 색상의 컬러가 아닌, 후지타가 특별히 고안한 우윳빛 색상으로 채색된 작품이다. 이른바 유백색(乳白色)이다. 그러나 우윳빛이라고 하지만 짙은 흰색이 아닌 은은한 금빛이 배어든 신비로운 색상이다. 1인 누드화는 고대 그리스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비너스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비너스의 대부분은 수줍어하며 몸을 가리는 입상, 즉 그리스 조각 스타일이 아니다. 숨기는 곳 하나 없이 전부 보여주면서 침실의 주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도발과 도전으로서의 누드화다. 동양인이 표현하는 침대 위 비너스는 과연 어떤 분위기로 나타날까. 전라 상태에서 상대를 쳐다보는 여성의 눈빛은 어떤 식으로 표현될까.
   
   5개 비너스 누드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누드(Nu)’라는 타이틀의 1927년 작품이다. 가로 63㎝, 세로 98㎝의 중형 사이즈로, 특별전을 위해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날아온 작품이다. 1920년대 일본 외무성이 벨기에 황실에 선물한 그림이라고 한다. 첫눈에 봐도 서양의 ‘도도한’ 비너스와 구별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한’ 비너스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性)과 성(聖) 중간 어디쯤에 서 있는 비너스라고나 할까. 시선은 아래로 떨어져 있고, 다리도 전부 펴지 않고 약간 움츠린 모습이다. 은은한 우윳빛 색상이 작품 전체에 넘친다. 노란색으로 엷게 채색된 여성의 머릿결과, 여성 하단 오른쪽에 앉은 줄무늬 검은색 고양이만이 우윳빛 범주 밖이다. 작품 전체가 투명하기에 그림 아래를 받쳐주는 데생의 흔적도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서양화에서 볼 수 없는, 펜이 아닌 세밀한 붓을 사용한 데생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누드화지만, 성적 흥분을 느낄 만한 요소를 찾아내기 어렵다. 왜일까. 보통 비너스의 관능미는 몸짓, 표정, 눈빛을 통해 표출된다. 후지타의 누드화는 그 같은 요소와 무관하다. 대신 강조하는 것은 비너스의 피부다. 피부를 덮어씌우기 위한 컬러가 아니라, 피부 그 자체로 나타난 색상이 핵심이다. 첫눈에 반할 얼굴이나 몸매가 아니라 아름다운 피부를 통한 비너스 연출이다. 흰 대리석으로 표현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느껴지는 피부색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차가운 돌이 아닌 따뜻한 우유라는 점이다. 필자가 아는 한, 피부를 통해 비너스를, 나아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예술가는 후지타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미의 여신으로서의 비너스, 성(性)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다. 피부에 스며든 순수하고도 신비로운 미를 통한 비너스 예찬이자 구현이다. 따라서 후지타의 1인 여성 누드화는 성(性)과 성(聖)의 중간지대라기보다, 성(性)과 성(聖)을 뛰어넘은 또 다른 미의 세계일지 모르겠다.
   
   
▲ 위의 작품은 1927년작 ‘누드(Nu)’, 아래는 후지타의 대표적 전쟁화인 ‘애투섬 옥쇄’.

   왜 프랑스로 귀화했을까
   
   20세기 유럽 화단을 통해 가장 먼저 각광을 받은 동양화가가 후지타다. 1922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가을의 전시회)’에 입상하면서 프랑스 화단의 동양인 셀러브리티로 부상한다. 당시 입상작은 우윳빛 비너스 시리즈 중 하나인 ‘침실의 나부(裸婦)’다. 1925년에는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Lgion d’honneur)를, 벨기에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받기도 한다. 파리로 간 지 10여년 만인 30대 말에 유럽 전체가 인정한 최고 예술가로 부상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후지타는 진지하고도 고독한 예술가 이미지의 정반대편에 선 인물이었다. 스튜디오에 앉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대신, 댄스 파티장을 전전하는 이른바 ‘축제의 왕’이란 별명을 가진 파티애니멀(Party Animal)이었다.
   
   1920년대 파리는 뉴욕과 더불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환락가다. 1차 세계대전 전승국이 되면서 돈과 예술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 즉 좋은 시대를 의미한다. 화가로서 돈과 명성을 얻으면서 후지타는 파리 사교계의 스타로 부상한다. 후지타의 특이한 외모는 당시 파리 사교계의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일찍이 일본에서 결혼했지만,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 이혼한 뒤 파리에서 현지 여성과 두 번 더 결혼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전부 4번의 결혼 경력을 가진 인물이 후지타다. 7번에 걸쳐 여성을 바꾸며 살아온 피카소가 그러하듯, 다혼(多婚)은 벨 에포크 시대를 거친 예술가의 필수조건 중 하나였을까.
   
   왜 후지타가 프랑스로 귀화했을까. 마욜 특별전을 돌면서 주목한 의문이다. 후지타는 73세 되던 1959년 프랑스로 귀화한다. ‘일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버려진 것’이라면서 프랑스 국적 취득의 배경을 설명한다. 당시 후지타의 귀화 장면은 프랑스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됐다. 어떤 사연으로 인해, 죽음이 머지않던 마지막 순간에 일본을 영원히 지워야 했을까.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후지타 그림을 대하는 일본인의 평균인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 프랑스인이 받아들이는 후지타 그림의 이미지는 우윳빛 비너스 여성 누드화다. 일본인은 어떨까. 피와 절규, 총과 칼로 범벅이 된 전쟁화(畫)가 평균 이미지다. 일본에서 후지타는 ‘전쟁화 전문 종군화가’로 통한다. 특히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소장된 14개의 초대형 전쟁화는 일본인 대부분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태평양전쟁 직전 50대의 후지타는 일본으로 귀국한다. 도쿄 도착 즉시 후지타에게 ‘비극적’ 제안이 떨어진다. 종군화가로 일해달라는 부탁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의 부탁이기에 수락한다. 유럽 화단의 셀러브리티가 종군화가로 변신한 것이다. 귀고리를 없앤 것은 물론이고 헤어스타일도 아예 군인처럼 짧게 바꾼다. 14개 초대형 전쟁화는 1940년대 초 종군화가로 일할 때의 작품들이다.
   
   
▲ 만년의 후지타. 80세 들어 90일간에 걸쳐 교회 성화 프레스코 제작에 들어간다.

   후지타의 전쟁화에 담긴 것
   
   전쟁화는 전승 프로파간다의 상징이다. 그림을 대하는 순간 사기가 오르고 승리감을 느껴야 한다. 후지타의 전쟁화는 다르다. 승리의 함성 대신 고통과 절규가 넘치고 넘친다. 가로 193㎝, 세로 259㎝에 달하는 초대형 전쟁화 ‘애투(Attu)섬 옥쇄’는 대표적 예다. 전원이 죽는다는 옥쇄라는 말 그대로, 애투섬을 방어한 일본군 2666명 가운데 2638명이 몰살당한 전대미문의 대참화를 기록한 전쟁화다. 지난해에 들러 자세히 살펴봤지만, 정상인이라면 그림 앞에서 호흡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옥이라 불러도 될 만한 처참한 현장으로서의 전쟁이다. 미군이 아닌, 일본군의 시체와 피, 절규가 화폭 전체에 드리워져 있다. 전쟁 당시 그림을 본 일본군이라면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전쟁화다. 전쟁 장려용 전쟁화가 아닌, 전쟁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평화 메시지로서의 작품이다.
   
   후지타는 전후 미군 점령군(GHQ)에 의해 전범화가 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전쟁화 대부분도 GHQ에 넘어간다. 종군화가로 일한 데 대한 책임이 원로 격이자 유명 화가인 후지타에게 떨어진 것이다. 후배를 대신해 혼자 책임을 지고 할복하라는, 일본식 결자해지 방식이다. 그 같은 억울한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환경과 분위기에 대해 후지타는 절망했다. 다행히 전범 리스트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1949년 일본을 떠나 프랑스로 되돌아간다. “그림 그리는 일에 주목하고, 주변과 싸우지 말고, 일본 화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조국을 ‘영원히’ 떠난다.
   
   지난 7월 소설가 최인훈씨가 세상을 떠났다. ‘광장(廣場)’은 아마도 그의 대표작일 듯하다. ‘광장이 없는 밀실’로서의 남한, ‘밀실이 없는 광장’으로서의 북한 모두를 혐오한 청년 이명준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슬프게도 소설 ‘광장’ 속의 ‘극단적 현실’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란 광장을 떠나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낸 후지타. 최인훈이 창조해낸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의 또 다른 분신일지 모르겠다. 비너스와 전원 옥쇄를 넘나든 후지타가 더더욱 절실히 와닿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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