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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7호]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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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문명 기행 2000㎞] 실크로드를 넘어 유라시아 로드, 그 길에서 문명이 꽃피다

글·사진 윤명철  동국대 교수 유라시아 실크로드 연구소장 

▲ 중국과 러시아 국경의 헤이룽장 주변 북만주 대삼림지대.
예전에는 ‘역마살’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말을 타다가 살(煞)을 맞는다는 뜻이다. 발해가 멸망한 지 1000여년 넘게 길을 잃어버린 채 ‘골목’ 안에서 살아온 우리가 스스로에게 씌운 굴레였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토막 난 반도 땅을 떠나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우리의 피와 언어, 신앙, 문화, 습관 등이 진하고 굵게 이어진 유라시아로 떠난다.
   
   그럼 유라시아는 어떤 곳일까. ‘유라시아(Eurasia)’라는 단어는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일종의 합성명사인데, 왠지 유럽 중심 사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계는 자연환경, 종족, 언어, 그리고 흥미진진한 역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대략 6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중앙아시아는 동서남북을 연결해주는 십자로(IC) 또는 허브(Hub)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항상 중요했다.
   
   이제 60줄에 들어선 우리 세대들은 1980년대라는 답답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불러젖히며 쌓여가는 응어리들을 삭여갔다. 그 시대 나에게는 일본인 ‘기타로’가 만든 ‘실크로드’의 유장한 선율과 다큐멘터리 속에 나타난 낙타 등에 올라탄 대상들과 적막하고 광활한 사막이 숨통을 틔워줬다. 그 장면과 선율은 꿈틀거릴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시켜주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해외 답사는 일본열도, 만주를 거쳐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좇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몽골 초원, 바이칼호, 알타이산록, 파미르고원, 심지어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흑해와 지중해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유라시아 전 지역이 연결되었다는 인식도 강해졌다. 그리고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많은 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갔다. 그래서 ‘유라시아 로드(Eurasia road)’라는 더 크고 넓은 명칭을 사용하면서 내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실크로드의 길
   
   그러면 유라시아 교통로들은 언제부터 개통되었을까. 이 길들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이용됐을까. 그 길들은 가운데 있는 중앙아시아와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을까.
   
   무려 5 만년 전이다. 인류의 직계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가 유라시아 세계를 횡단한 것은. 이들은 심지어 뗏목을 타고 먼바다를 항해하여 호주 대륙에 도착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탐험에 뛰어드는 영장류이다. 기원전 15세기 정도가 되면 청동기로 무장한 채 말 타는 집단들이 교류하거나 전투를 벌이면서 동서를 교차 횡단하였다. 서기 전 3세기를 전후해서는 ‘실크’, 즉 비단 무역망에 있는 오아시스들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들이 발생하였다. 이 무역 시스템과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는데,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1877년에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하지만 이 말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데는 야심찬 일본인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중국이 ‘일대일로(One belt and One road)’라는 이름으로 신(新)실크로드 정책을 추진하고 러시아와 미국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젠 우리도 눈으로, 마음으로 유라시아 세계를 끌어안고 우리 논리로 해석하면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구를 인체와 마찬가지로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 본다. 그렇다면 유라시아를 잇는 공간 역시 대동맥, 동맥, 정맥, 실핏줄처럼 종횡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일종의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중앙아시아와 연결된 길만 해도 동서로 5개 이상이 있었고, 남북으로도 몇 개가 있었다.
   
   
   길의 진짜 개척자들
   
   첫째가 ‘사막의 길(Oasis-road)’이다. 전형적인 실크로드(Silk road)로서, 낙타를 모는 대상들이 비단 같은 비싼 물건 등을 싣고 중국의 시안을 출발해서 터키의 이스탄불 또는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가는 전장 7000㎞의 교통로이다. 그 중간에 신장의 타클라마칸사막과 전장 2000여㎞가 넘는 톈산(Tengri-dar), 중앙아시아의 길고 넓은 페르가나계곡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오아시스 도시인 사마르칸트, 부하라와 이란의 이스파한, 테헤란 등의 유서 깊은 도시들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작은 일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손오공이 까불대는 ‘서유기’라는 소설 때문인지, 모화(慕華)사상 때문인지, 실크로드는 중국인이 개척하고 중국 상인들이 활약한 길로 안다. 중국 정부도 마치 자기 땅처럼 일대일로 전략을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들이 연출된다. 하지만 중국인과는 크게 관련이 없고, 그들의 역할도 미미하다. 더더욱 중앙아시아에서 서쪽까지의 길은 전혀 무관하다.
   
   그럼 누가 이 막막한 사막에 길을 낼 생각을 했고, 또 만들어 이용했을까.
   
   놀랍게도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유라시아 교통 시스템 속에 편재시킨 사람들은 페르시아계이다. 기원전 6세기 중반 무렵 페르시아제국은 이집트를 평정하였고, 이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는 ‘월지(月支)’라고 알려진 나라가 비단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 문화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잔영을 드리운 것이다.
   
   그리고 서기 4세기 전반에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유명한 다리우스 1세를 쫓아 서아시아를 건넜다. 알렉산더는 서부 실크로드를 무섭게 달려와 사마르칸트를 무자비하게 점령하였다. 이후 일부 그리스인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진다.
   
   “얘들아.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인들이 사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니?”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김태희가 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서다. 멋쩍어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타지키스탄.” 그 나라 여성들은 투르크계의 피에 페르시아계, 그리스계, 그리고 약간의 아랍계와 인도 피도 섞였기 때문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2013년에 국산 자동차를 타고 경주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옛 도시국가들을 통과해서 이란, 터키까지 60일 동안 횡단을 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답사와 함께 연설, 학술회의 등 여러 나라를 위한 행사들을 벌였다. 그때 동서로 이어진 8000㎞의 길 위에서 다양한 여인들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후 언젠가 사마르칸트의 길거리를 지나는 한 여인을 보면서 ‘실크로드의 모든 얼굴’이 다 어른거리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기원전 3세기에 들어서면서 흉노제국은 기마군단을 이끌고 월지를 축출한 후 실크로드 무역망을 장악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강대국이 된 그들의 일부는 군대를 이끌고 동유럽 주변까지 진출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한나라 때 일시적으로 신장 지역에 진출하였을 뿐이다. 심지어는 당나라 때조차도 중앙아시아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크무역을 주도하면서, 중국 지역에 춤, 음악, 불교를 전달해준 역할을 한 사람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부하라 등에 거주한 소그드 상인들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고구려에 들어왔고, 그들의 춤과 음악, 기예 등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가 우수할 수 있었다. 고구려 문화가 국제성을 띤 것이다.
   
   
▲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 지역에 있는 고창국의 성.(좌)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 외곽의 이식고분군에서 발굴된 황금인간.(우)

   철의 길, 황금의 길
   
   둘째 ‘초원의 길(Steppe-road)’이다. ‘말의 길(Horse road)’이며, ‘철의 길(Iron-road)’ ‘황금의 길(Gold road)’이기도 하다. 동쪽의 만주 일대에서 몽골 초원과 알타이 산록, 카스피해를 거쳐 흑해의 동북 연안을 통과한 후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인류의 역사는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청동이나 철제품으로 무장한 채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짧은 활을 쏘는 사람들이 주역이었다.
   
   알타이 산록에서 첫 출발한 기마민들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스키타이인으로 기록된 이래 때때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말 몸뚱이에 사나운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인 켄타우로스가 바로 이들의 이미지였다. 뒤이어 북흉노가 흑해 지역을 넘었다. 만약 파죽지세로 유럽을 공략하던 흉노의 아틸라가 453년에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백인종의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들은 계속 서쪽으로 진출하여 티무르제국, 몽골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럽을 점령했다. 동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마 유목민들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국 지역을 넘나들었고, 한나라는 60년 동안이나 흉노제국에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조공을 바쳤다.
   
   이 거대한 초원의 길(Steppe-road)의 동쪽 끝에 우리가 있다. 1995년에 부여의 터전인 북만주의 초원지대로 올라간 적이 있다. 당시 말 세 마리를 사서 탐험대원들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까지 타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때 기마민들의 통로와 사회 시스템도 확인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역마살이 유독 많이 낀 내 혈관 속의 역동적이고 야성적인 피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았다. 그 힘으로 지금껏 유라시아를 다니는 중이다.
   
   세 번째가 ‘바다의 길(Marine-road)’이다. 중국의 광둥성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진 길고도 긴 바닷길이다. 그 일부에는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발자취가 남겨졌다. 8세기에 막 들어서면서 20대 중반의 신라 승려인 혜초가 배를 타고 간 항로도 그 일부이다. 15세기 초부터 그 유명한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지휘하는 원정대들이 무려 7차례나 통과한 길이고, 그 후 80여년쯤 지나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이 항로의 서쪽을 항해했다. 결국은 이 사건이 유라시아 세계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른바 해양실크로드는 중국의 차(茶)가 서쪽으로 팔려가는 ‘차의 길(Tea-road)’, 반대로 영국이 판 ‘아편의 길’이기도 하다. 또한 ‘도자기의 길(Ceramic-road)’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들의 솜씨가 밴 일본 도자기들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결과적으로 고흐나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독특한 작품들을 창작하는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길은 동쪽으로는 신라와 일본까지, 서쪽으로는 유럽의 궁정까지 팔려간 ‘향료의 길(Spice-road)’이기도 했다. 배를 이용한 물류 수송은 말이나 낙타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물량이 많았고, 경제성이 높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자원과 상품은 배를 이용한 물류망에 의존한다. 지금 이 길 위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남중국해 영토 분쟁,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충돌을 하고 있다. 우리는 겨우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려는 중이다.
   
   
   이끼의 길, 얼음의 길
   
   네 번째가 ‘숲의 길(Taiga-road)’이다. 이것은 ‘모피의 길’이며 ‘강의 길’과도 교차된다.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동시베리아의 침엽수림지대를 통과한 후에 자작나무와 백양나무들이 울창한 바이칼 일대의 삼림지대를 걸쳐 우랄산맥에 도달하는 길이다. 2015년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타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이르쿠츠크, 모스크바를 경유한 후 베를린까지 24일 동안 이 길을 답사했었다. 그 ‘철도의 길’이 과거 ‘타이거 로드’였기 때문이었다. 이 길의 주역들은 동아시아에서는 퉁구스계(에벤키로 알려졌다), 그 서쪽에서는 몽골계였다.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의 서부지대까지 활동한 사람들은 우리와는 연관이 적다.
   
   이 3개의 큰 길들 말고도 동서를 횡단하는 길이 더 있다. ‘이끼의 길(Tundra-road)’이 북위 50도 이북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이끼 지대를 이어주면서 극동 시베리아에서 스칸디나비아 일대까지 이어진다. 순록을 따라 다니는 고아시아계와 퉁구스계의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또 ‘얼음의 길(Ice road)’이 있다. 놀라운 일이지만 북위 70도 전후의 극지역인 스칸디나비아 일대, 캄차카반도 등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된다.
   
   유라시아에는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의 길도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여러 곳에 중요한 남북의 길들이 있었는데 유라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길은 중앙아시아 일대를 중심으로 한 몇 개의 큰 길들이다.
   
   첫째는 바이칼호와 예니세이강 상류 일대에서 알타이 산록과 톈산산맥을 경유한 후 파미르고원에서 다시 동서로 갈라지는 초원 산악로이다. 3000여년 전부터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말을 기르고 타면서 남진한 길이다. 흉노제국도 이 길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했고, 몽골 또한 마찬가지다.
   
   둘째는 아랄해, 카스피해에서 남쪽의 부하라, 판지켄트 일대를 거쳐 파미르고원에서 각각 분리되는 길이다. 최소한 5000년 이전부터 중앙아시아는 인도양 지역과 남부 시베리아,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과 무역을 했고, 심지어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조개들도 사고팔았다. 바로 이 길을 통해서다.
   
   셋째, 우랄산맥에서 볼가강을 따라 내려와 캅카스산맥을 지나 흑해의 동안을 타고 내려와 아나톨리아반도를 잇는 길이 있다. 말을 탄 기마군단과 상인들도 활용했지만, 배를 이용하기도 한 길이다. 스키타이인부터 시작해서 흉노인, 투르크계, 몽골계가 꾸준히 활용하면서 지중해로 접근하던 길이다.
   
   그 밖에도 여러 길이 있었다. 동쪽에는 이미 2000년 전에 호탄(Khotan)과 중국의 북부지방을 이어준 ‘옥(玉)의 길(Jade Road)’이 있었고, 서쪽에는 이미 4500여년 전부터 아프카니스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연결된 ‘청금석(Lapis lazuli)의 길’도 있었다. 파미르의 동쪽 길은 알렉산더가 타지키스탄으로 들어갈 때, 월지가 인도로 들어갈 때, 현장과 혜초가 불경을 싸들고 귀국할 때, 조금 훗날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힌두쿠시를 넘을 때도 이용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이에 맞서는 영국의 북진정책이 충돌하면서 파미르고원길을 활용했다.
   
   동서남북으로 촘촘하게 이어진 교통망 덕분에 유라시아는 서로 도와주는 상호 호혜 체계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면 인간도 또한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 길로 인하여 때로는 전쟁도 많이 벌여 인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제 21세기 유라시아 로드는 인류와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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