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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28호] 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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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화가 최울가

평생 작업한 작품 불구덩이에 던지고 10년 만에 이룬 것

하주희  기자 

▲ 최울가 화가의 등 뒤로 ‘화이트 연작’이, 오른쪽엔 하이에나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이 보인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2008년 가을 어느 날 충청북도 충주의 한 정차장. 폐쇄되기 전엔 주차장으로 쓰였을 공터에 캔버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유화들이었다.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폐쇄된 정차장을 빌려 그림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 남자는 그동안의 작품을 모두 밖으로 끌어냈다. 그림 더미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는 가장 가까운 캔버스에 불을 붙였다. 불은 일정한 속도로 옆으로 옮겨 붙었다. 오후 4시에 붙인 불은 저녁 8시에야 꺼졌다. 그날 유화 250점이 불 속에서 사라졌다.
   
   지난 9월 20일 서울 와룡동에서 화가 최울가(63)를 만났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추석을 앞두고 잠시 한국을 찾았다. 제 손으로 모든 그림을 불살라버리고 무에서 시작한 그는 10년 후 손꼽히는 컨템포러리 화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미국 크리스티나 한국 옥션에 그의 그림이 등장하면 활기가 돈다. 연예인 컬렉터로 알려진 이광기씨는 ‘성공한 매입’으로 최울가의 작품을 들기도 했다. 그림값이 10년 만에 10배 이상 올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최 작가가 10년 전 그림을 모두 모아 태워버린 이유가 궁금했다.
   
   “2007년에 데미안 허스트 전시회에 갔다. 소머리를 잘라서 기름에 절여놓고 한쪽엔 해골 작품이, 바닥엔 오브제들이 널려 있었다. 만물상같이 분출해놨더라. 회의가 몰려왔다. 데미안 허스트가 영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었다면 이런 전시 자체가 가능했을까. 한계를 느꼈다. 다시는 분별 없는 자유로움에 취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당시 작품을 모두 한국으로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한국에 와서 작품 더미를 보다 생각했다. 이걸 무너뜨려야 뭐가 되겠다.”
   
   울가는 그의 아명이다. 울산에서 태어났단 뜻이란다. 그는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그림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베르사유예술학교와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고갱을 흠모했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 동안 철학을 다질 수 있었다.” 15년간 머물던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옮겨간 건 2000년이다. 이주의 이유는 ‘사회 구조’였다.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잇따라 적용되면서 그림이 거래되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렸다. 특히 컨템포러리 미술이 직격탄을 맞았다. 1000프랑짜리 그림 팔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바스티유 거리의 갤러리 중 90%가 문을 닫았다. 복지라고 하면서 생계보조비를 주는데 그게 예술가에겐 독이 됐다. 경쟁력이 사라진다. 예술이니 철학이니 하는 허울에만 젖어 있지 프로페셔널이 못 된다. 루브르박물관을 보면 화가 나곤 했다. 오히려 저것 때문에 현재의 프랑스 예술이 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버려진 캔버스 주워 그림 그려
   
   뉴욕은 달랐을까. “예술은 버섯과 같다. 그늘진 곳도 있어야 피어난다. 벼르고 벼르다 뉴욕으로 떠났다. 미국은 현실적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파리에선 변화 없이 조용한 생활이었다. 걷다 생각하고 카페 가서 거리를 보다 다시 생각하는 식이었다. 철학자의 방에 있다 하루 사이에 시장 바닥에 떨어진 셈이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감각이랄까 나만의 시각을 미국에서 찾았다.”
   
   무작정 옮겨온 뉴욕, 궁핍한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마다 소호 거리를 돌며 재료를 주웠다. 물감 하나 사쓰기도 힘든데 캔버스까지 사긴 어려웠다. 미국 작가들은 작업을 하다 잘 안 되면 캔버스를 버리더라. 닦거나 고쳐서 쓰지 않고 말이다. 버려진 캔버스를 주워 그 위에 그렸다. 예전 작품들은 다른 사람 그림 위에 밑칠해서 작업했다. 캔버스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재료도 많았다. 상자나 나무판자다. 애플 휴대전화 상자를 한꺼번에 수십 개 주운 적이 있다. 그 위에 작업을 해 한국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원시의 눈으로 본 뉴욕
   
   그의 작품 ‘블랙앤화이트’ 시리즈는 그림일기 같다. 어항, 의자, 꽃병, 수박, 온갖 글자, 숫자들이 각각 블랙과 화이트를 배경으로 알록달록 놓여 있다. 한쪽엔 스티커도 붙어 있다.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문양들이 그 위에 그려져 있다. 일일이 에폭시를 녹여 만든 수제 스티커다. 그의 그림은 벽에 오래 걸어놔도 지루하지 않으면서 보는 이의 생각을 크게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울가의 세계’에선 각기 단편소설 주인공쯤 되는 사물들이다. 소중했던 순간, 기억해야 할 개인적 기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원시주의’라고 설명했다. “6만년 전 언어가 없을 때를 생각해보자. 소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 거다. 동굴 벽에 내가 오늘 사냥했던 일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알아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이 고통받는 건 언어가 있어서가 아닐까. 어린아이에겐 아직 언어가 없다.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 재현하고 싶었다.”
   
   연작을 이어서 들여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문양이 있다. 개처럼 보이는 동물이다. 개, 하이에나, 늑대, 여우다. 각기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하이에나는 배에 수박을 품고 있는 식이다. “아버지는 여름이 되면 수박을 사오시곤 했다. 화채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공동체의 삶, 하이에나의 습속이다. 여우는 다르다. 여우는 고독하게 철저히 혼자다. 혼자 사냥해 새끼를 키운다. 개는 충직함의 상징이다. 친구이자 수호신이다.”
   
   그의 그림은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반구상쯤이다. ‘컨템포러리’로 분류하는 게 수월하다. 그가 생각하는 컨템포러리 회화는 무엇일까. “이 시대의 정신적 현대성을 작품에 담는 거다. 천하다고, 통속적이라고 내치는 게 아니라 그것마저 받아들이는 거다. 앤디 워홀이 던진 메시지가 바로 그거다. ‘고급스러운 것만 예술인가, 통속적인 것도 예술이다.’”
   
   미국과 한국의 그림 시장엔 차이점이 있을까. 이 질문에 그는 심각해졌다.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화랑, 작가, 손님 이게 다다. 한국은 중간판매상 같은 중간시장이 많다. 옥션도 있지 않나. 전시하는 것보다 옥션에서 판매하는 편이 더 쉽고 편하니 화랑들이 전시를 잘 안 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 화가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은 거다. 미국은 진입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진입하면 신경 쓸 게 없다.”
   
   뉴욕은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앤디 워홀과 백남준이 대표적이다. 최 작가는 백남준씨 얘기를 꺼냈다. “휠체어 타고 가는 걸 뵌 게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나더라. 저렇게 위대한 예술가를 국가가 내동댕이친 것 아닌가. 백남준이 일본인이었다면 저렇게 두지 않았을 거다. 한국의 예술 정책 수준은 아직도 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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