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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29호]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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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내가 아는 산악인 김창호

그의 가슴속 최고봉은 세 살배기 딸이었다

글·사진 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 지난 1월 네팔 구르자히말 남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김창호 대장(가운데). 김창호 대장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번에 함께 숨진 셰르파 겸 요리사인 치링 보테.
죽음 이상 허무한 게 있을까.
   
   지난 10월 17일 새벽, 인천공항화물청사 대한항공 화물터미널 A동에 나란히 놓인 5개의 관을 보는 순간 그랬다. 관 안에 누워 있는 김창호(49), 유영직(51), 임일진(49), 이재훈(24)은 네팔 구르자히말 남벽 원정 출국을 하루 앞둔 지난 9월 27일 저녁 서울 홍대 앞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줏잔을 기울였던 후배들이었다. 항상 만나면 서로 산 얘기에 빠지던 각별한 사이였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호방하고 유쾌하던 후배들이 저렇게 작은 관 안에 아무 말 않고 누워 있다니. 가슴이 아렸다.
   
   10월 13일 국내에 전해진 네팔 구르자히말 한국 원정대(대장 김창호) 사고 소식은 많은 이들을 경악게 했다. 한국인 5명과 네팔인 4명 총 9명이 숨진 사고는 100년이 넘는 히말라야 등반사에서도 흔치 않은 대형사고다. 특히 히말라야 8000m 고도에서나 있을 법한 제트기류급 강풍에 의한 사고로 추정돼 놀라웠고, 한국 산악계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철두철미한 산악인으로 꼽히는 김창호 대장 일행의 사고여서 충격이었다.
   
   이들은 해발 3500m 높이 사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아직 등반이 성공된 바 없는 남벽 중앙벽을 통해 구르자히말(7193m) 정상에 올라설 계획이었다. 등반에 성공한 후에는 북서쪽 추렌히말 기슭 빙하를 거쳐 베이스캠프 아랫마을인 구르자가트(Gurjaghat·3015m)로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출국 전 김창호 대장은 “중앙벽의 정상 설벽으로 이어지는 쿨와르(couloir·절벽 같은 급경사 지대에 형성된 침니형 바위)에 들어찬 눈이나 물줄기가 얼어붙어야 등반이 가능하다”며 “11월 초까지 얼어붙지 않으면 그냥 돌아설 것”이라고 했다.
   
   이런 주도면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황당한 사고가 모든 계획을 무산시켰고 허망한 죽음을 낳았다. 이번 사고를 처음 안 사람은 최홍건 한국산악회 고문이었다. 최 고문은 10월 9일 원정대 격려차 정준모 한국산악회 이사와 베이스캠프로 향하다가 컨디션 난조로 구르자가트에 머물고 있었다. 최 고문은 약속시간(10월 11일 점심)에 마을로 내려오지 않는 정준모 이사가 걱정돼 12일 주민들을 베이스캠프로 올려보냈다가 캠프 아래 1㎞ 지점에서 현지인 시신과 캠프 주변에 흩어져 있는 텐트와 장비 등을 발견했다. 이후 마을주민들의 수색과 헬기 구조가 이어졌고 이번에 운구된 9구의 시신이 회오리바람으로 추측되는 동선(動線)을 따라 베이스캠프 아래 산사면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사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1월 김창호 대장과 함께 정찰을 겸한 구르자히말 트레킹을 했었다. 서기석·석상명씨 등이 동행했었다. 당시 김창호 대장이 “오래전 동구권 클라이머 2명이 계곡을 거슬러 남벽에 접근했으나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김창호 대장이 언급했던 동구권 클라이머들의 사고를 포함해 이번 사고 모두 돌풍에 의한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196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김창호는 중·고 시절 핸드볼과 아마추어복싱 선수 생활을 했을 만큼 운동을 좋아했다. 1988년 서울시립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해서는 스스로 “대학 시절 전공이 클라이밍”이었다고 할 만큼 전문등반에 빠져 지냈다. 1989년 여름 해병대 입대 후 ‘사단장 비서실 근무’라는 편안한 보직이 주어지자 특수수색대 전입을 자청하기도 했다. 군생활 중 고된 훈련도 그에게는 제대 후 더 높고 험한 산을 오르기 위한 훈련 과정일 뿐이었다.
   
   복학 후 처음으로 나선 해외원정이 1993년 파키스탄 카라코람의 대암탑(大岩塔) 트랑고타워(Trango Tower·6286m) 등반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등반가들도 선뜻 도전하지 못했던 험난한 거벽이었다. 고산 등반 신출내기들로 구성된 서울시립대 원정대는 베이스캠프에서 벽 밑에 옮겨놓았던 20일치 등반 식량을 눈사태로 인해 분실했다. 김창호는 80m 추락이라는 큰 사고까지 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밀어붙였다. 1996년에는 파키스탄 가셔브룸 4봉(7925m) 동벽 신루트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진 못했다.
   
   원정 때마다 김창호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 것은 모진 과정을 이겨내며 끝내 발을 디디는 정상과 더불어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빙하, 그리고 빙하 양옆에 솟구쳐오른 이름 모를 고봉들이었다. 김창호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가득 찼던 인물이었다. 그는 원정을 마치고 나면 자신이 발을 디뎠던 곳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슬라마바드의 고서점 같은 곳을 기웃거렸다. 귀국길 그의 배낭은 지리와 등반 관련 도서들로 가득 차곤 했다.
   
   그런 책과 지도 안에서 찾아낸 산봉들을 대상으로 나선 원정이 2001년 여름 멀티피크 원정(대장 서기석)이었다. 당시 서기석 대장과 김창호를 포함한 7명의 원정대는 5000m급 4개 봉에 도전, 힌두쿠시 시카리(5928m) 신루트 등정, 카라코람 혼보로피크(5500m) 신루트 등반, 카라코람 카체블랑사(5560m) 세계 초등정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 중 시카리와 카체블랑사는 독일 뮌헨의 카라코람 최고 연구자이자 연대 기록자인 볼프강 하이헬에게 산명과 높이에 대한 인정을 받았을 만큼 가치 있는 등반이었다.
   
   김창호는 이후에도 파키스탄 히말라야 빙하 탐사에 몰두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40~50㎏의 배낭을 멘 채 빙하 탐사에 나섰다. 이 기간만 무려 1700여일에 이른다. 크레바스 추락이나 눈사태에 의해 소리 없이 사라져버릴 위급한 상황도 겪고, 빙하로 도망쳐온 권총강도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도 있었으나 빙하 탐사에 대한 그의 열정을 식히지 못했다. 지난 여름 파키스탄 정찰등반에 나서기 직전 김창호는 필자에게 “오랜만에 억겁 세월의 찬 기운을 느끼며 빙하에서 비박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그는 진정한 히말라야의 방랑자였다.
   
   
▲ 지난 1월 필자(왼쪽)와 함께 구르자히말 트레킹을 하던 김창호 대장. 필자는 김 대장과 25년이 넘는 긴 인연을 맺어오며 히말라야, 남미, 유럽 알프스 등지의 고봉을 등반하고 트레킹을 해왔다.

   고서점 뒤지는 공부하는 클라이머
   
   고서점을 뒤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김창호는 산악계에서 ‘공부하는 클라이머’로 정평이 나 있다. 세계의 산으로 가득 찬 그의 머리는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보물창고였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새로운 산은 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도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는 2001년 멀티피크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나서도 고산 등반 능력이 중급 수준 정도로 저평가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8000m급 고봉을 하나하나 오름으로써 점점 높아갔다. 8000m급 고봉 첫 등반은 2005년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부터 시작했다. 표고 4500m 거벽인 루팔벽 중앙직등루트로 정상에 올라선 다음 반대편 벽인 디아미르벽으로 내려서는 횡단 등반은 난해함과 위험성 때문에 1970년 메스너 형제의 초등반 이후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35년 만에 이루어진 대기록이었다.(1980년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 귄터 메스너는 하산길에 사망했다.) 이후 2007년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연속 무산소 등정 등 김창호의 14좌 등정 레이스는 쾌속도로 진행되었다. 결국 2013년 5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전 세계에서 14번째의 14좌 무산소 완등 기록이었지만 당시로선 7년10개월이란 최단 기간 완등 기록이었다.
   
   김창호의 14좌 무산소 완등을 마무리짓는 에베레스트 원정은 일반적인 스타일의 등반이 아니었다. 제로 베이스인 인도 벵골만에서 카약을 타고 인더스강을 거슬러 내륙에 진입한 후 자전거를 타고 히말라야 기슭까지 접어든 다음 도보 캐러밴으로 베이스캠프에 진입하는 이색적인 도전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선, 그야말로 ‘From 0 To 8848 에베레스트’의 무동력 원정이었다.
   
   김창호는 이렇듯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등반을 추구했다. 필자가 만난 산악인 중 가장 모험적이었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는 인공산소 사용은 고도를 낮추는 행위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메스너는 인공산소 사용이 산악인들이 등반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자신의 힘에 의한 순수한 등반(by fair means)’에서 어긋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창호는 메스너의 말대로 ‘순수한 등반’의 길을 철저하게 좇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김창호는 2014년 유럽과 아시아 1만5000㎞를 달린 ‘원코리아 뉴라시아(One Korea New-eurasia) 자전거 평화 대장정’ 원정대를 성공리에 이끌면서 대중적인 이미지도 업그레이드시켰다. 하지만 그의 혼(魂)은 늘 산에 가 있었다. 노멀루트를 따르는 14좌 완등을 무산소로 이루어냈다 해도 그에게 최상의 목표는 아니었다. 산꾼으로 꿈꿔온 자신의 길을 계속 찾고 싶어했다.
   
   2007년 남미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중앙봉 한국 초등정, 2008년 당시 지구상 최고(最高) 미등정봉으로 남아 있던 바투라2봉(7762m) 세계 초등정 등 미지의 벽을 대상으로 등반을 펼쳐왔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등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상에서 인간이 오르지 못한 미등정봉과 고산거벽에 자연스러운 선(線)을 만들고 싶어했다. 고정로프 없이, 캠프 없이, 짐을 옮겨다주는 고소등반 셰르파 없이, 모든 보조적 장비와 인력의 도움 없이 등반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책임하에 미등정봉을 오르고자 했다.
   
   그런 도전 욕구 끝에 그가 기획한 것이 ‘코리안웨이(Korean Way)’ 히말라야 거벽 신루트 5개년 계획이었다. 그가 목숨을 바친 이번 등정이 이 5개년 계획의 세 번째 프로젝트였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2016년 도전한 네팔의 강가푸르나(Gangapurna·7455m)와 그 서쪽에 솟은 아샤푸르나(Asapurna· 7140m)였는데 당시 아샤푸르나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뒤돌아섰다. 목표로 삼은 신루트 등반에 성공했고, 어둡기 전에 하산길에 들어서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갠지스강의 여신’이란 의미를 지닌 강가푸르나 남벽은 그가 ‘시바신의 머리카락’이라고 표현할 만큼 폭이 좁디좁은 설벽을 타고 올라 이루어낸 등정이었다.
   
   
   ‘From home to home’
   
   강가푸르나 남벽 등반은 세계 산악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2018 황금피켈상(Piolets d’or)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이 상은 프랑스 고산등반협회(GHM)와 등반전문지 ‘몽타뉴(Montague)’ 편집진이 전 세계 산악인들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있었던 최고의 가치를 지닌 등반 업적을 평가해서 수여하는 상이다.
   
   김창호는 지난해 두 번째 프로젝트에 나서 젊은 대학산악인들과 함께 인도 히말라야의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 2개 봉에 신루트를 내는 데 성공했다. 연이은 등정 성공으로 세 번째 프로젝트인 이번 구르자히말 원정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김창호는 대외적으로는 성공적이고 도전적이란 평가를 받아왔지만 1년 전 즈음부터는 원형탈모증이 생길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등반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을 둔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2016년 봄 강가푸르나 원정 직전 김창호는 “어떠한 원정등반이라도 ‘From home to home(집에서 집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출국 일주일 전에 태어난 딸 단아가 세계 초등정을 이루어내는 어떤 거봉들보다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진정한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최석문, 박정용, 그리고 나 3명은 함께 줄을 묶고 강가푸르나 정상에 섰다. 서로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서 원정대가 추구했던 욕망의 죄를 성스러운 강가푸르나 여신에게서 정화시켰다. 5일간 시바신의 머릿결을 타고 오른 코리안웨이는 완성되었고 신화 속으로의 상승은 끝났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왔다.’ -2016년 김창호의 ‘강가푸르나 남벽 원정기’에서
   
   김창호는 구르자히말 등반에서 아내와 딸 그리고 대원들과 굳게 맺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김창호의 등반은 이렇게 끝났다. 산악인들의 김창호에 대한 기억은 이제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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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hwan0909  ( 2018-10-26 )    수정   삭제
다 좋아. 무산소등정이고 뭐고 다좋고. 산과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맑은 영혼의 사람이었다는것도 다 좋아. 그런데 세살난 딸하고 아내는 어쩔건데. 어린딸과 함께 생계를 스스로 이어가야하는, 졸지에 아빠와 남편을 잃은 가족들은 어쩔거냐고. 이렇게 미담처럼 써놓으면 이기적인 그의 삶과 죽음이 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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