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이 그려진 듯한 노랗고 파란 원색 무늬의 박스 안으로 들어서면 은색 발판이 눈에 띈다. 위치에 맞게 발을 정렬해두고 서 있노라면 의료진이 다가와 등 뒤에 마치 낙하산 같은 줄을 매달아준다.
“발판이 흔들릴 거예요. 눈을 감고 몸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보세요.”
발판은 위로, 아래로, 뒤로, 앞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움직임이 멈출 때면 머리가 울리는 듯이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간혹 어지럼증을 심하게 겪는 환자 중에는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균형을 얼마나 잘 잡는지 보는 듯한 이 검사의 이름은 동적자세검사(CDP)다. 전문 어지럼증클리닉에나 있을 법한 이 검사기기를 통해서 환자의 균형감각을 확인한다고 한다. 기기에 무심하게 그려진 듯한 무늬 역시 시각적으로 교란을 줘 균형감각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다. 세란병원 뇌신경센터·어지럼증클리닉 박지현 진료부장의 설명이다.
“간단하게는 우리 몸의 균형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의 이상 유무를 보는 검사이기도 하고요. 발바닥에서 척추로 이어지는 균형에 대한 체성감각을 모두 확인하는 검사입니다. 평범한 상황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있어도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지를 쉽게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눈을 감은 상태에서 발판을 움직이면서 체성감각을 교란시키면 균형감각이 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어지럼증을 앓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에 적합한 검사입니다.”
“어떤 유형의 어지럼증인지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어지럼증 환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얘기다. 올해 아들의 결혼식을 치렀던 하은숙씨는 15년 넘게 무시하듯 방치해온 어지럼증 때문에 큰일을 겪었다. 아들의 결혼식장에서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것이다.
“한복 차려입고 하객에게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세상이 핑 돌면서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볼까봐 며느리 될 신부가 있던 신부대기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토하기까지 했어요.”
하씨가 맨 처음 어지럼증을 겪은 것은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때때로 30분, 1시간 정도 격한 어지럼증이 찾아오곤 했지만 또 어지러운 순간을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듯 일상을 즐길 수 있었다.
“몸이 허해지면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르고, 또 가본들 무슨 소용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내버려두곤 했다가 사단을 겪었습니다.”
대다수 어지럼증 환자들이 그렇다. 어지럼증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질병 중 하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지럼증 자체는 증상일 뿐 질환이 아니지만 워낙 다양한 질환에서 어지럼증 증상이 나타나는 만큼 한 환자가 겪는 어지럼증의 원인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어지럼증의 원인을 찾기 쉽지 않다는 얘기는 곧 환자들 역시 어지럼증의 원인을 굳이 찾지 않으려고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활에 다소 지장이 있더라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어지럼증은 방치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어지럼증 증상이 잦고 강해지면 그제서야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일 년에 며칠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어지럼증을 겪어온 기자 역시 어지럼증 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박지현 세란병원 진료부장은 “종종 30년, 50년 동안 어지럼증을 앓고 있다가 이제야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를 만나곤 한다”고 말했다.
“어지럽다고 하면 금세 빈혈을 의심하거나 ‘몸이 허해서’ 그런 거라고 치부해버리는 분위기가 있었잖아요. 영양섭취를 제대로 못하던 옛날이야 맞는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영양부족이거나 빈혈 때문에 생기는 어지럼증은 거의 없어요. 반면에 조금만 일찍 병원에 와서 검사를 하고 정확한 진단을 받고 제대로 된 치료 과정을 거치면 거의 다 나을 수 있는 것이 어지럼증이기도 해요. 뒤늦게서야 어지럽지 않은 삶을 찾으러 온 환자를 보면 안타깝죠.”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이 늘어난 이유
사실 어지럼증 환자들이 쉽게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지럼증 증상이 심해질 때면 동네 이비인후과 의원에 찾아가보곤 했지만 신경안정제를 비롯한 약물 몇 가지를 처방받을 뿐 적절한 치료를 받기는 어려웠다. 약을 먹어도 어지럼증이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면 “어지럼증은 평생 재발하니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 아닌 조언을 믿고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최근 10여년간 한국에서도 어지럼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어지럼증 전용 검사실을 개설하고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을 운영해온 박지현 진료부장은 맨 처음 어지럼증클리닉을 열었을 때 주변에서 의아해하는 반응을 겪었다고 말했다.
“어지럼증도 하나의 질환처럼 정밀한 진단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지럼증 치료로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미국에서 따로 공부해 진단 방법과 치료 방법을 익혀 들여왔습니다.”
어지럼증을 치료하고자 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이에 맞춰 어지럼증 전문 클리닉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이유는 병의 치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치료’는 생존과 직결된 질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생존을 넘어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병원을 찾고 치료받는 분위기가 생기며 어지럼증 치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