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마르의 프티 베네치아
콜마르의 프티 베네치아

기승전, 다음은 ‘여행’이라는 시대이다. 대형서점 여행 코너는 늘 사람이 북적인다. TV채널마다 해외여행 프로그램이 줄을 잇고, 명절이면 공항이 북새통이다. 이쯤되면 여권에 아시아 여러 나라 도장이 찍혀 있고, 더 이상 패키지 여행은 성에 차지 않는다. 그저 좋은 경치 보고, 맛있는 음식 먹는 것 말고, 뭔가 마음을 채워줄, 그리고 돌아와도 허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해줄 여행이 필요하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독일행도 많은 물음표를 안고 떠났다. 20일 남짓한 나의 여정도 물음표꼴로 생겼다. 독일 중앙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루트이다.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독일. 어느 겨울동화’라는 장시를 썼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정치·사회·경제 면에서 뒤졌던 독일의 현실을 작가의 시각으로 파헤친 문제작이다. 그 예리한 시선에 한 발 걸쳐 내 이번 독일 여행 제목을 ‘독일. 어느 음악동화’라고 정했다. 제목이 창대하니 더 열심히 배우고 느껴볼 일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관문이자 유럽중앙은행이 주재하는 경제 중심지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말 그대로 입국 경로로만 삼기로 했다. 공항역에서 바로 30분 거리인 만하임으로 이동했다. 만하임은 작지만 프랑크푸르트 못지않은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입지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광장에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첫 모델이 서 있다. 1888년 카를 벤츠의 아내 베르타가 남편 몰래 차를 끌고 나와 이곳 만하임에서 처가가 있는 포르츠하임까지 100㎞를 왕복한 것이 첫 자동차 운행이었기 때문이다.

1888년은 독일에도,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해였다. 1년 동안 세 황제가 보위에 있었고,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5번을, 구스타프 말러가 첫 교향곡을 발표했다. 시대가 바뀌는 와중이었고, 베르타가 탄 내연기관 차량은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벤츠 기념상 앞에 고도가 낮은 만하임의 상수도 수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급수탑이 보인다.

궁정 오케스트라의 ‘만하임 로켓’

만하임은 팔츠 선제후의 수도였다. 선제후는 독일의 전신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7인회의 구성원을 말한다. 성직자인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와 세속 영주인 보헤미아 왕, 작센 대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그리고 팔츠 백작이 모여 황제를 선출한 것이다.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한 후진적인 정치체계가 아이러니하게 민주적으로 보인다.

만하임의 전성기는 18세기 카를 테오도어 선제후가 다스리던 때였다. 당시 만하임 궁정 오케스트라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들로 구성되었다. 만하임 오케스트라가 빚어낸 관현악 주법들이 다른 궁정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이들의 솟구치는 관현악 사운드를 ‘만하임 로켓’이라 불렀다.

1777년, 21세의 모차르트도 만하임을 찾아 궁정음악가가 되기를 꿈꿨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하숙집 딸인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로이지아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의 대공이 되어 뮌헨으로 옮겨가면서 모차르트는 더 이상 만하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4년 뒤 모차르트는 다시 음악을 좋아하는 카를 테오도어 선제후를 찾아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공연한 ‘이도메네오’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모차르트는 뮌헨에 남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얼마 뒤 궁정음악가가 아닌 프리랜서로 빈에 정착한다. 한 작곡가에게는 인생을 건 도박이었지만 음악사에는 놀라운 전기였다. 오늘날 모차르트가 없는 빈을 가정해 보자. 그가 알로이지아와 결혼했고, 선제후가 뮌헨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만하임이 음악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또는 뮌헨이 모차르트의 성에 찼더라면, 그에게 배우기 위해 베토벤이 빈이 아닌 뮌헨에 왔을 것이다. 어쨌거나 빈이 ‘음악의 수도’가 될 운명이었던 셈이다. 모차르트는 빈에 온 직후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한다.

나의 첫 방문지는 만하임에서 20분 정도 남쪽에 있는 선제후의 여름궁전 슈베칭엔이었다. 전임 선제후 카를 필리프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만하임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짓기 시작한 여름궁전을 손주사위인 카를 테오도어가 완성했다. 강대국 수도에 있는 여름궁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베르사유를 모델로 한 슈베칭엔 궁전은 초여름에 열리는 음악제로 유명하다. 내가 라디오 디제이로 지난 10여년을 일하며 매년 가장 비중 있게 소개했던 음악제이다.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이곳에서 연주한 뒤 아버지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선제후에게 한껏 칭찬을 들었다!”라고.

잘 정돈된 정원과 로코코 궁전의 화려한 내부 장식이 모차르트가 썼던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싱그러운 세레나데와 정겨운 소나타들, 그리고 솟구치는 로켓과 같은 교향곡들 말이다.

오후 여정은 역시 지척인 하이델베르크이다. 오늘날은 차로 30분 안쪽이지만, 제아무리 선제후라도 마차로 거의 하루가 걸렸을 거리이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어 강변 산기슭에 자리한 고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성은 17세기 30년전쟁 때 무너진 채로 방치되었고, 그 스산한 모습이 오히려 관광객의 마음을 울리는 곳이다. 수많은 교수와 학생이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거쳐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주인공인 테너 마리오 란자일 것이다. 호프집에서 울려퍼진 ‘우리 함께 지금을 즐기세 (Gaudeamus igitur)’라는 대학생 가요는 낭만과 자유의 표어와도 같다. 브람스는 이 노래를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상을 기념해 ‘대학축전서곡’으로 작곡했다.

여행 첫날, 유럽을 실감하기에 슈베칭엔과 하이델베르크 나들이로 충분했다. 이제 본격적인 시동을 걸 차례이다. 만하임에서 프랑스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알자스라는 주의 이름으로 더 유명한 스트라스부르는 오랜 세월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지배했다. 곧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본고장이다. 그런 배경 때문에 이곳에 현재 유럽연합 의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스트라스부르를 찾은 이유는 어린 시절 존경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목사이자, 오르가니스트, 음악학자이면서 의사로 아프리카에서 봉사했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가 바로 알자스 태생이다. 존경만 했지 인품으로야 근처에도 못 갔지만, 그의 발자취나마 살피고 싶었다. 슈바이처는 여행 내내 내가 만날 바흐, 바그너와 같은 작곡가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는 생각을 남겼다.

슈베칭엔 궁전
슈베칭엔 궁전

슈바이처의 고향

스트라스부르에서 30분 정도 더 가면 콜마르라는 유명한 관광지이고, 거기서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 귄스바흐라는 마을이 있다.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들 슈바이처가 성장한 곳이다. 콜마르는 한국 관광객에게도 유명하다. ‘프티 베네치아’라고 부르는 예쁜 운하가 있고, 푸짐한 음식과 질 좋은 와인 산지라고 알려지면서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한 장면도 이곳을 배경으로 했을 만큼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보석 같은 도시이다.

그러나 콜마르에 가서 ‘이젠하임 제단화’를 보지 않았다면 팥빵의 ‘앙꼬’ 맛은 못 본 것이다. 16세기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을 위해 3단의 제단화를 그렸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부활의 이미지에 여러 성인의 모습을 부록으로 더한 대작이다. 병원으로 쓰이던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프랑스대혁명 뒤에 문을 닫자 제단화를 인근 콜마르로 옮겨왔다. 제단화 외에 많은 작품을 소장한 운터린덴 박물관의 이름도 ‘피나무 아래’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고풍스러운 외관이 예사롭지 않다.

화가 그뤼네발트는 독일 농민전쟁 당시 전란과 병마로 고통받던 민중의 삶을 자신의 성화에 녹여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관으로 옮겨지는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고 괴질로 고통받는 안토니우스 성인이 바로 수도원 환자들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그뤼네발트의 소명의식은 현대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의 오페라 ‘화가 마티스’로 조명되었다.

오페라에서 농민전쟁을 피해 도망가던 그뤼네발트에게 환영이 펼쳐진다. 그는 악마에게 유혹받는 성 안토니우스가 된다. 부귀와 권력, 학문과 전쟁이 그림 속 캐릭터로 저마다 자기 주장을 펼친다. 바오로 성인이 성 안토니우스에게 화가라는 천직에 의문을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한다. 성 안토니우스, 곧 그뤼네발트는 제단화를 완성한다.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그림 속 주인공이 된 것이다. 히틀러의 만행 앞에 음악가로 무기력했던 힌데미트의 자전적인 음악이기도 하다. 모두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중한 기록들이다.

교회와 귀족에게 고용된 화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처럼, 먼 뒷날 슈바이처 또한 자기 고장이 소장한 이 문화재를 ‘예수 생애 연구사’라는 책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스트라스부르대학을 다니면서 그곳의 자유로운 학풍에 힘입어 자기 신학의 토대를 완성했고, 뒷날 의사 학위를 더해 직접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나는 것이다.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에는 맥각병 환자가 많았다. 영어로 ‘성 안토니우스의 불(St. Anthony’s fire)’이라고도 부르는 병이다. 맥각병은 호밀에 들어 있는 맥각균이 원인인데, 발작과 경련, 괴저,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다. 중세에는 딱히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퍼졌기 때문에 공포는 더했다. 맥각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마치 춤추는 것과 같았기에 ‘죽음의 무도’와 같은 중세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안데르센의 동화 가운데 ‘빨간 구두’는 붉은색 구두를 신은 소녀가 춤을 멈출 수 없어 결국 두 발을 자르고 만다는 잔혹한 내용이다. 바로 이 소녀의 모델도 맥각병 환자이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는 20세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러시아 발레단을 모델로 한 영화와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내 많은 관심사의 원천인 ‘이젠하임 제단화’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까운 귄스바흐의 슈바이처 생가에 갈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지만, 하루에 버스가 대여섯 번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이라 돌아갈 차편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1647년부터 1874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성당의 장대한 위용이나 내부의 아름다운 장미창보다 이 도시가 자랑해야 할 것은 슈바이처가 가져다준 선물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외경’이다. 모두가, 나부터가 생명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은 훨씬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이젠하임 제단화’
‘이젠하임 제단화’

본에서 만난 피리 부는 사나이

귄스바흐를 찾아 소년 슈바이처를 선한 의지로 성장하게 했을 자연을 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만하임에 돌아왔다. 콜마르에 다시 갈 핑계가 생긴 것이니 나쁘지 않다.

이튿날 다시 라인강을 따라 한 시간 반 만에 고색창연한 도시 쾰른에 도달한다. 여장을 풀자마자 지척의 본으로 갔다. 본은 쾰른 선제후의 궁정이 있던 도시이자 통일 이전 서독의 수도이다. 그러나 지정학적인 위치를 떠나 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베토벤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뮌스터 광장 앞 베토벤 동상은 어느 기념비보다 강렬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 광장 한 구석을 피리 소리가 가득 채운다. 레게 머리를 한 흑인 악사가 귀에 익은 독일 민요를 연주하는데 발뒤꿈치에 매단 작은 종으로 장단을 맞추니 광장 구석구석 청량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키가 150㎝쯤 될 법한 피리 부는 사나이.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1827년 베토벤이 죽고 8년 뒤인 1835년,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이 동상 건립을 발의했다. 여론은 찬성 일색이었지만 정작 모금은 지지부진했다. 1839년 프란츠 리스트가 1만프랑을 쾌척하면서 겨우 속도를 냈고 베를리오즈, 쇼팽과 슈만 같은 동료가 힘을 보탰다.

슈만은 베토벤의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의 선율을 인용해 ‘환상곡’을 썼고, 출판 수익을 동상 건립에 보태달라고 했다. 그는 ‘환상곡’을 리스트에게 헌정했지만, 사실상 사랑하는 클라라를 염두에 둔 작품이었다. 당시 그는 아직 미성년인 연인을 두고 미래의 장인과 법정투쟁 중이었다. 마침내 동상이 베토벤의 고향 본에 완성되었지만, 제막식은 2년이나 미뤄져 1845년에야 이뤄졌다.

제막식 이틀 전 축하 공연에서 루이 슈포어가 ‘장엄미사’와 ‘합창 교향곡’을 지휘했고, 당일 아침 대성당에서 C장조 미사를 연주했다. 오후에는 리스트가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연주했고, 교향곡 5번 따위를 지휘했다. 이렇게 해서 베토벤은 독일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가 인류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음악을 쏟아냈다는 사실은 적잖은 울림을 준다. 그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찬가에 붙인 ‘환희의 송가’는 오늘날 유럽연합의 노래로 불린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청각장애 작곡가의 아이러니한 조건을 그리스도에 비했다. 그가 반실성 상태로 ‘장엄미사’를 작곡하고 난 뒤 허기에 지쳐 한밤중에 하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난장판이 된 집을 떠난 뒤였다. 토마스 만의 베토벤은 “한 시간도 깨어 기다릴 수 없단 말인가”라고 절규한다. 그리스도가 올리브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잠든 세 제자에게 한 말 아닌가! 베토벤 자신도 칸타타 ‘올리브산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가 어떤 존재인가를 부각했다. 그는 예술사상 처음 스스로 자기 작품의 ‘영웅’이 된 사람이다. 교향곡 3번 ‘에로이카’의 주인공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베토벤 자신인 것이다.

‘환상곡’으로 리스트에게 힘을 보탠 슈만은 만년에 이곳 본의 요양원에서 정신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최후를 지킨 사람이 아내 클라라와 제자 요하네스 브람스였다. 본 시내 공동묘지에 슈만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라인강을 따라가다 보면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 산정에서 발원한다. 동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으로 물꼬를 튼 강물은 스위스와 독일 국경 지역 보덴호수에 크게 모인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향한다. 스위스 국경도시 샤프하우젠에는 라인폭포라고 부르는 엄청난 수원이 있다. 낙차는 크지 않지만 너른 강폭이 좁다 하고 터져 나가는 물길은, 처음 시작된 알프스의 높이와 앞으로 흘러갈 길이를 함축한다. 스위스의 유일한 항구 바젤을 끝으로 위로 올라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이루며 스트라스부르를 지난 라인강은 만하임, 마인츠, 본을 거쳐 쾰른에 도달한다. 다시 그 위로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가면 유럽 최대의 항구 로테르담을 통해 여정을 마무리하고 북해가 된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사람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가게 마련이다. 경제와 종교, 인종의 차별 없이 기회가 평등한 곳으로 말이다. 이제 유럽연합에서 여행자로서 만나는 서비스업 종사자는 대부분 이민자이다. 크로아티아에서 왔다는 웨이터도 코리아라는 말에 남이냐, 북이냐를 묻는다. 이는 오히려 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뜻한다. 그도 최근 몇 달 동안 뉴스를 뜨겁게 달군 한반도의 정세 변화를 잘 알고 있다.

마침 한 스리랑카 노동자가 날린 풍등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는 어쩌다 경기도 고양까지 와서 고향을 그리게 되었을까? 실론티라도 한잔 마셔주고 싶다. 아마 피리를 불 줄 알았다면 독일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베토벤의 할아버지도 라인강을 거슬러 네덜란드에서 본으로 온 악사였다. 그래서인지 베토벤도 들리지 않는 것을 거슬러 남들이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로 나아갔다.

자연이 만든 대장정 라인강의 클라이맥스에 인간이 더한 장관인 쾰른 대성당이 서 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기에 맨 처음 시작부터 붐비는 곳이었지만 25년 전 처음 찾았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이제는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놀랍게도 어제 본에서 본 그 피리 부는 사나이가 오늘 아침 쾰른 돔 광장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다. 아마도 그는 오후에는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하멜린으로 가지 않을까? 대성당의 수많은 조각들이 하멜린으로 피리 소리를 따라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홀리지 않고 더 북쪽으로, 함부르크로 갈 것이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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