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빈의 ‘카페 센트럴’ 전경. (우) 휘핑크림이 올려진 아인슈페너.
(좌) 빈의 ‘카페 센트럴’ 전경. (우) 휘핑크림이 올려진 아인슈페너.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찾은 ‘카페 센트럴’은 입구 앞에 긴 줄이 서 있었다. 미국 뉴저지에서 왔다는 4명의 관광객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며 대열에서 이탈해 일행의 대기 시간을 줄여주었다. 추석 당일 같은 시각 서울의 영화관에도 이렇게 긴 줄이 섰을까. 입구에 장난스럽게 앉아 있는 오스트리아 시인이자 작가인 페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의 전신인형을 보니 그가 여기에 왔었던 게 분명했다. 알텐베르크는 오스트리아 빈의 초기 모더니즘을 소개한 대표적 문인이다. 문학을 사랑해서 이 사람을 모델처럼 앉혀놓았을 리는 없을 테고…. 그는 커피와 음식을 먹고 가끔씩은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갔다고 한다. 사람이 유명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생각과 아울러 ‘외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센트럴(Cafe Central)’은 1876년 빈의 중심인 현재 위치에 들어섰다. 혁명가인 트로츠키(Trotsky), 정신분석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트(Freud), 당대의 문인들인 폴가(Polgar), 츠바이크(Zweig), 알텐베르크, 그리고 루스(Loos)와 같은 건축가들이 이곳에서 커피와 케이크, 시가를 즐겼다고 한다. 사상과 지향점이 제각각인 이들이 커피를 두고 격론을 벌이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렇게 카페 센트럴에 출입을 하며 가까워진 단골들은 카페의 이름을 따서 ‘센트럴리스트(Centralist)’라 불렀다고 한다. 번역을 하자면 ‘중도주의자’ 정도였을 것이다. 과거 서울 명동의 문인과 예인(藝人)들의 집결지였던 모나리자 다방, 은성주점 등의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이전에 빈에 왔을 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사람도 적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 사방을 둘러볼 틈이 없었다. 이번에 찬찬히 살펴보니 궁륭양식(vault)으로 지어진 아치형의 천장은 카페라고 하기에는 과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화려했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에서 주로 보이는 궁륭양식은 유럽 성당의 지붕을 지탱하는 아치형 구조의 건축양식인데, 카페의 높은 천장을 더 높아 보이게 했다. 무슨 커피와 케이크로 가게를 채워놓았기에 이리 대단한 건물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빈에 왔으니 빈 커피(영어로 비엔나 커피)를 시켰다. 빈 커피라고 불리는 커피가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건 예전에 왔을 때 알아서 ‘빈 커피 주세요!’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빈 커피는 통상적으로 커피에 크림이나 거품이 올라가 있는 커피를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대표적 빈 커피인 멜랑지(Wiener Melange)와 아인슈페너(Salon Einspanner)를 주문했다.

멜랑지는 빈의 커피집 어디에나 있는 메뉴인데, 프랑스에서 유래해서인지 독일어식 발음인 멜랑게 대신 멜랑지로 불렸다. 원뜻은 ‘혼합된(mix)’이다. 에스프레소에 물을 붓고, 따듯한 우유거품을 가득이 아니라 넘치게 채운다. 흡사 카푸치노와 비슷하지만 그 거품의 양이 압도적이다. 커피잔에 입을 대고 마시면 거품이 코끝에 저절로 닿는다. 성냥팔이 소녀가 겪었을 유럽의 매서운 겨울 추위에 맞설 때 코끝에 묻는 우유거품은 빈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것 같다. 초콜릿 한 조각과 함께 단순하고 우아한 잔에 담겨 나온 커피는 일행을 행복하게 해줬다. 표정으로 커피맛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모두 “커피 맛있네요!”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휘핑크림에 숨은 비밀

아인슈페너는 독일어로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다.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졌다. 신기했다. 칼로리를 소비하기 위해 호텔까지 꼭 걸어가야 할 의무감을 준 휘핑크림 때문이 아니라 커피와 크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잔(glass)에 담겨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 따듯한 음료는 투명하지 않은 컵(cup)에 담겨 나와야 하고, 차가운 음료는 투명한 잔인 글라스(glass)에 담겨 나와야 한다. 커피의 도시라는 빈에서 나름 황당했다.

웨이터에게 왜 글라스 잔에 담겨 나왔는지 물었다. “이름처럼 마차와 관련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인슈페너는 빈의 명물 중 하나인 마차(Fiaker)를 모는 마부들이 선호하는 커피인데, 유리잔에 담아서 손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했다. 아울러 가득 담긴 휘핑크림은 마차가 울퉁불퉁한 빈 시내의 돌길을 달릴 때 커피가 넘치는 것을 막아준다고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추운 겨울에 바람을 맞으며 마차를 운전하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일 텐데 휘핑크림은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조수 역할을 했을 것 같았다. 아인슈페너는 내 몫이었다. 달콤한 휘핑크림이 먼저 입안에 감돌고 한참 후 커피가 깊은 크림층을 통과하였다. 크림은 달콤했지만 달지 않았고 커피맛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커피맛을 구별시켜 맛있는 커피를 음미하도록 도와주었다. 입안에서 커피와 휘핑크림이 섞인 맛은 독일어 감탄사인 ‘분더바(Wunderbar·영어로 wondrful)’ 소리가 절로 나오게 했다. 빈 커피 중 피아커(Fiaker·마차)라는 이름의 커피도 있는데 이는 아인슈페너에 들어가는 휘핑크림을 저지방우유로 대체한 것이다. 칼로리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피아커를 권한다.

커피와 함께 디저트도 주문했다. 아펠 슈트루델(Viennese apple strudel with vanilla sauce)과 초콜릿 케이크(Warm chocolate cake ‘Viennese style’ with vanilla ice cream)를 시켰다. 아펠 슈트루델은 크루아상처럼 얇은 밀가루층이 겹겹인 페이스트리 안에 설탕에 절인 사과가 들어 있다. 미국에서는 애플턴오버라고도 불린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소스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초콜릿 케이크가 아이스크림과 함께 나왔기 때문에 크림을 주문했다. 잘했다 싶었다. 따듯한 아펠 슈트루델을 뒤덮은 바닐라 소스는 흡사 신사의 정장을 망토로 완성시켜주는 격이었다. 칼로리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설상가상이겠지만, 언제 또 이 맛을 볼지 모르는 관광객에게는 금상첨화였다.

초콜릿 케이크는 초콜릿 소스가 접시에 흥건한 채, 바닐라 아이스크림, 휘핑크림과 함께 내어졌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향’이 아니라 바닐라 ‘그 자체’였다. 우리가 흔히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먹는 바닐라 ‘향’ 아이스크림은 하얀색인데, 진짜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노리끼리한 색을 띤다. 그리고 바닐라 스펙(vanilla speck)이라고 불리는 작은 알갱이가 가득 박혀 있다.

초콜릿 케이크는 밀가루와 진한 초콜릿만으로 반죽한 것 같았다. 달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초콜릿 맛과 향이 진하고 풍부했다. 따듯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거기에 올려진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차가움과 따듯함이 대립되는 게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조화를 이루었다.

두 디저트 모두 허브 한 조각이 올라갔다. 디저트가 못내 아쉬워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중년의 일행도 만족해했다. 높다란 천장과 화려한 인테리어가 어울리는 커피와 디저트였다. 비록 단출한 커피 두 잔과 두 조각 디저트가 올려진 테이블이었지만 한국에서 먹었을 추석상을 대신해주기에 충분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초콜릿 케이크.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초콜릿 케이크.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카페가 없을까?

카페 센트럴은 그 외관도 눈길이 간다. 카페가 들어갈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석조건물인데 원래는 은행과 증권거래소로 쓰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팔라이스 페르스텔(Palais Ferstel)이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후기 낭만적 역사주의(late-romantic historicism) 양식의 건물이다. 보통의 경우 건물의 이름은 건축주의 이름을 따르는데, 빈에서 유일하게 건축가의 이름을 건물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아니라, 건물주 위의 건축가였다. 건물이 오래된 만큼 담겨 있는 이야기도 많다. 군대용 위락시설인 카지노가 들어서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하여 카페 센트럴이 40여년 동안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잿더미만 치우고 궁여지책으로 실내 농구경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4개의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잘 지어놓은 건물 하나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의 모임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페 센트럴이 들어선 멋진 석조건물을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카페가 없을까?’ 하는 질문이 호기심의 시작이었다. 얼마전 끝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고종황제를 비롯한 당시 명사들이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한 세기 넘게 마셔온 커피와 차는 있는데 100년 된 찻집이나 커피집은 없는 게 이상했다. 카페 센트럴처럼 돌로 지은 집에 커피숍이 들어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본 서울 시내의 커다란 석조건물은 덕수궁 석조전, 서울시청, 한국은행,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 건물 등이다. 한국전쟁 중 폭격을 당해 서울 전체가 폐허가 되었겠지만, 이런 석조건물들은 아직 그대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상상이기는 하지만 이런 건물들 한 귀퉁이에 다방이나 살롱의 이름으로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빈에서 해봤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 속 인물들이 마신 자리에서 나도 커피 한잔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한국 시각으로는 잠잘 시간에 든 생각이었기에 몽롱한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다. 프로이트가 커피를 마신 카페는 아직도 존재하는데 이효석·공상순 선생 등이 커피를 마셨던 다방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조만간 우리나라 역사책이나 신문에서 읽었던 인물들이 커피를 마셨던 곳에서 나도 커피를 마시는 날이 왔으면 한다. 아마도 그날이 오기 전에 카페 센트럴에 또 가 있을 것 같다. 카페 센트럴의 커피 한잔이 내 머릿속 상상을 앞으로 100년, 뒤로 100년을 꿈꾸게 했다. ‘꿈의 분석’을 쓴 프로이트도, 혁명을 꿈꾼 트로츠키도 나와 같은 커피를 마시며 나름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카페 센트럴(Cafe Central)

주소 Corner Herrengasse/Strauchgasse, 1010 Wien, Austria

전화번호 43 (1) 533 37 63-61

주말과 공휴일, 크리스마스 직전에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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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권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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