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함부르크를 떠나 1시간 반 남짓 남동쪽으로 내려가 독일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다. 10월 3일은 우리에겐 개천절이지만 독일은 통일을 이룬 날로 기린다. 그러나 베를린 중앙역 안팎의 인파는 심상치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난민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모여 있다.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관용’이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대치 중이다. 이들 사이사이 무장경찰 몇 개 중대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베를린은 독일에서도 특히 이민자에 대한 관용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17세기 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받아들인 2만여명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가 18세기 프로이센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은 이민자들을 위해 프랑스말로 예배를 드릴 교회까지 지어주었다.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의 프랑스 돔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에 온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난 전체 위그노 20만명 가운데 소수였다. 이들은 낙후된 북독일 작은 나라의 체질을 강화해줄 고급 인재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독일의 문제는 그와 반대이다. 유럽연합 가운데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인 나라가 형편이 낫고 세계대전의 원죄가 있는 독일이다. 반면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독일보다 훨씬 못사는 동유럽이나 아랍 출신이다. 이들에게 주는 보조금과 일자리는 결국 세금에서 나온다.

통일이 되면서 동독을 끌어안은 지 30년, 그 핸디캡을 겨우 극복할 즈음에 독일은 다시 한 번 몸살을 앓으며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이다. 관용이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남유럽에 비해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독일이었지만, 민심이 어수선하니 소매치기도 많고 거리도 전보다 지저분해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릴 수만은 없다. 마침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뜬 무지개는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베를린은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독일의 심장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거리 1번지에 위치한 베를린 필하모니 앞도 공사 중이라 버스가 서지 않는다. 짧은 체류기간 동안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는 없지만 포기는 이르다. 베를린에는 그에 못지않은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셋이나 더 있고 오페라단 또한 그만큼 유지되고 있다. 얘기인즉슨 베를린에 가면 늘 최고의 콘서트나 오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용을 시험하고 있는 베를린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서독 시절의 방송 교향악단이다. 통일 이후 옛 동독의 라디오 심포니와 명칭이 겹치면서 도이치 심포니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신생 악단을 거쳐간 젊은 지휘자들은 뒷날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다. 로린 마젤, 리카르도 샤이, 켄트 나가노와 같은 사람들이다.

통일절에 네덜란드의 바로크음악 명인 톤 코프만이 이 악단과 연주할 곡은 바흐 부자(父子)와 하이든의 음악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음악가로 일하던 둘째 아들을 방문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 바로 베를린 인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이다. 뒷날 화가 멜첼이 그린 대왕의 콘서트가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에 걸려 있다. 대왕은 아버지 바흐에게 자작 주제를 주고 변주를 청했다. 그렇게 해서 바로크 대위법의 금자탑 ‘음악의 헌정’이 탄생했다.

지난주 함부르크에서부터 이어지는 바흐의 둘째 아들 얘기에 ‘아들도 유명한가’ 궁금해할 독자가 많으실 것이다. 가업을 잇는 경우는 많지만 대개는 아버지나 아들 어느 한쪽으로 무게가 기울게 마련이다.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도 아버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훨씬 인정받았을 중요한 음악가였다.

프랑스 첼리스트 장 기엥 케라스가 연주한 아들 바흐의 첼로 협주곡이 바로 그런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문예사에서 ‘다정다감양식’을 대표한다. 고 색창연한 바로크 시대를 마감하고 대신 훨씬 밝고 경쾌한 양식이 잇따르며 그 뒤에 올 고전주의를 예고했던 것이다.

2014년은 아들 바흐의 탄생 300주년 기념 해였다. 독일에서 그와 관련 있는 도시들이 연합해 홈페이지와 로고를 만들고 행사를 공동 주최했다. 함부르크나 베를린같이 큰 도시가 포츠담이나 바이마르처럼 작은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홍길동의 본적을 놓고 강원도 강릉과 전라도 장성이 법정까지 가서 결론을 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홍길동인데, 서로 연대할 수는 없었을까.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완성한 다정다감양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질풍노도’이다. 케라스는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있는 조각배의 조타수처럼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미풍을 일으켰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했다. 앙코르인 뒤포르의 연습곡도 시의적절했다. 베를린에서 활동한 뒤포르는 베토벤이 자신의 첫 첼로 소나타를 헌정했을 정도로 이름난 명인이었다. 프랑스 첼리스트 케라스가 베를린 청중에게 선보이기에 뒤포르는 더없이 알맞은 곡이지 않은가!

톤 코프만은 전반부 바흐 부자의 음악에 이어 후반부에는 고전주의의 아버지인 하이든의 교향곡 98번을 지휘했다. 불협화음마저도 화음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하이든의 교향곡과 청중의 박수에 해맑게 화답하는 노인의 모습 덕분에 오후에 본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는 까맣게 잊혔다.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좌) 멜첼이 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콘서트.(우)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좌) 멜첼이 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콘서트.(우)

현대의 모습을 투영한 표현주의 도시

이튿날 오전 베를린 바로 옆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을 찾았다.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이 지은 상수시 궁전은 프랑스말로 ‘걱정 없는’이라는 뜻이다. 구 궁전에서 신궁전까지 울창한 숲을 관통하는 산책로는 베르사유를 모델로 한 유럽의 많은 궁전 가운데 으뜸이다. 공원 안팎을 보니 어제 구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상상이 아니라 실경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멀리 폐허가 된 무너진 유적은 바로 프리드리히의 컴컴한 그림 속, 프리메이슨 단원인 듯 보이는 사람들의 회합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하이든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당대에 보다 나은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프리메이슨의 사명에 뜻을 보탰다. 보통 사람이 눈길을 주지 않는 흔한 모습으로부터 관념과 이상의 세상을 끌어낸 화가의 예리한 시선에 새삼 탄복한다. 네 박자의 단조로운 모티프로 운명의 모든 것을 지어낸 베토벤의 작업과 똑같은 것이지 않은가!

이날 저녁 공연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푸치니 ‘토스카’이다.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는 베를린 국립오페라, 코미셰 오페라와 더불어 독일 수도의 문화적 역량을 집약한 단체이다. 이번 시즌 이들이 공연하는 작품이 50편이 넘는다. 매주 한 작품씩 올리는 셈이다. 그중 10편가량은 새 연출이고, 나머지는 과거 연출작의 재연이다. 유럽의 오페라극장은 이렇게 고정 레퍼토리에 계속해서 신작을 더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번 ‘토스카’도 1969년에 처음 제작된 프로덕션이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하르테로스나 베토벤이나 프리드리히와 같은 시대 예술가를 연기한 테너 마르셀로 알바레스도 훌륭했지만, 청중의 압도적인 찬사는 악역 스카르피아를 부른 에르빈 슈로트에게 돌아갔다.

나는 극장에서 제안받은 이튿날 공연,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보체크’야말로 베를린에서 초연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여럿 가진 베를린이지만, 음악사에서 이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부끄러운 수준이다. 어떤 작품이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위해 작곡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빈과 뮌헨, 밀라노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경쟁도시들에 비하면 언급할 것이 없다. 그러나 20세기 초, 표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오페라 ‘보체크’가 바로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베를린이야말로 거칠고 원색적인 현대의 모습을 투영한 표현주의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음악의 존재 이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체크’ 새 연출의 초연 무대를 마다하고 서둘러 라이프치히로 가야 한 것도 교향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구스타프 말러의 첫 교향곡을 듣기 위해서이다. 20대의 말러가 라이프치히 오페라 지휘자 시절에 작곡한 이 곡은 1888년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되었다. 만하임에서 베르타 벤츠가 남편의 자동차를 몰고 친정에 다녀온 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02년에 라이프치히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베토벤상을 만들었다. 완성된 조각은 빈으로 잠시 옮겨졌는데, 그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벽화’와 나란히 전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빈 분리파 전당에 전시된 ‘베토벤 벽화’는 클림트의 친구 말러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교향곡 4번을 쓰던 무렵이다.

나는 라이프치히 심장부에 위치한 미술관이 독창적인 컬렉션을 갖췄음에도 그토록 한적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더욱이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무색하게 적막감이 돌 정도로 한산했다. 솔직히 나는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25년 전쯤에는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분리파 전당이나 벨베데레 궁전이 구름 관중으로 몸살을 앓는다. 클림트가 상품화된 것이다.

다행히 옛 동독에 속했던 라이프치히는 아직 관광도시는 아니다. 덕분에 막스 클링거도 여전히 ‘소비’되는 예술가가 아니다. 대리석 덩어리 위에 적힌 토마스 만의 주석을 바라본다. “헤라클레스나 지크프리트는 ‘선택받은 영웅(Hero)’이지 ‘스스로 도달한 영웅(Held)’은 아니다. 영웅다움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나약함을 극복하는 것이 영웅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해야 한다. 클링거의 작고 여린 베토벤은 거대한 신들의 옥좌에 앉아 있다. 그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야말로 스스로 도달한 영웅인 것이다.”

조각을 만든 사람은 막스 클링거이지만 그것을 완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토마스 만이다. 베토벤은 그 이후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웅이었다. 말러가 교향곡 1번에 붙인 제목 ‘거인(Titan)’에 대해 이 지면에 다 쓸 수는 없다. 말러가 제목을 가져온, 베토벤 시대 작가 장 파울의 소설은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생소하기 때문이다. 아마 번역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인공지능 번역기의 개선을 기다리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 괴테를 숭상했던 베토벤은 괴테에 대한 반발로 나왔던 장 파울을 알지 못했지만, 베토벤을 존경했던 슈만은 장 파울도 통독했다. 베토벤과 슈만과 장 파울 모두에 정통했던 구스타프 말러는 전부를 꿰뚫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말러의 ‘거인’은 베토벤이요, 그 자신도 거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톤 코프만과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좌)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상.(우)
톤 코프만과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좌)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상.(우)

말러의 거인은 베토벤이었다

베토벤과 말러의 정수가 그 깊은 내력에 도달하기도 전에 너덜너덜하게 상업화되지 않도록, 미국의 찰스 아이브스가 ‘콩코드 소나타’에 베토벤의 ‘운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초월’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부르크에서 들은 ‘콩코드 소나타’와 라이프치히의 말러 교향곡은 같은 영웅의 시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유대인 구스타프 말러는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이었던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스로의 좌표로 제시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었고,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으며, 미국에서는 유럽인이었고, 세계에서는 유대인이었다.”

어딜 가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말러였지만, 사후 100년이 지나 그는 교향악 전통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앞다퉈 연주된다. 라트비아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막 마흔이 된 젊은 음악가이지만, 이곳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미국 보스턴 심포니까지 정상의 두 악단을 이끌고 있다. 그 또한 말러나 자신의 멘토인 마리스 얀손스처럼 유대인이다. 넬손스가 끌어올린 거인의 높이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바로 앞 라이프치히 오페라를 이끌었던 선배 지휘자들, 멘델스존, 말러, 푸르트벵글러, 쿠어트 마주어를 다 합친 것만큼 높이 솟았다.

독일 음악기행의 마지막 이야기는 남쪽 바이에른에서 계속된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