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가스타이크 홀
뮌헨 가스타이크 홀

독일 중동부 라이프치히에서 남부의 뮌헨까지는 3시간 남짓 걸린다. 나는 뮌헨 조금 더 아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까지 내려간다.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가 있는 알프스 지방이다. 엄청나게 긴 이곳 지명은 히틀러가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두 마을을 하나로 합친 데서 비롯되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겨울에는 스키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처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훨씬 적다. 슈트라우스는 말러와 같은 연배이다. 그러나 말러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죽은 데에 비해 슈트라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4년을 더 살았다.

슈트라우스는 독일에서 흔한 성이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와 성은 같지만 무관하다. 음악도 달달한 요한에 비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은 대중적이지 않지만, 누구나 아는 한 곡이 있다. 바로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일출 부분이다. 점증하는 팡파르에 맞춰 두드리는 북소리는 아폴로의 황금전차가 지평선을 넘어올 때 낼 법한, 딱 그 소리이다.

전날 늦게 도착해 여장을 풀고 아침부터 슈트라우스의 집으로 갔다. 그가 죽은 뒤 재단 사무실로 쓰던 곳이 몇 년 전부터 박물관으로 보통 사람을 받는다. 정원은 아예 공원으로 개방해 이날도 유치원 아이들의 소풍이 한창이다.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제자이다. 뷜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말러는 지휘자로만 인정했지만, 슈트라우스는 지휘는 물론 작곡도 으뜸으로 추켜세웠다. 뷜로가 죽은 뒤에도 이것이 말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클래식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작곡가로 꼽힌다.

반대로 가장 수준 높은 청중에게 그는 궁극의 황홀경을 준다.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내 관현악 작품들은 베토벤의 천재성에 범접할 수 없습니다. 또 내 오페라들은 바그너의 영원불멸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소재와 그것을 다룬 나의 솜씨는 옛 작품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는 무지개 끝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만하다고 할 만큼 대단한 자부심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한 서양예술이라는 무지개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다고 자평한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노년기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때였다. 제국음악협회 회장으로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는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지만, 며느리가 유대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나치에 공공연히 반발하지 않았고, 다행히 전후까지 며느리와 손주 모두 안전했다. 때문에 나치에 적극적인 저항을 한 다른 예술가와 비교하면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좌) 가르미슈 슈트라우스 집. (우) 가르미슈 알프스 기슭.
(좌) 가르미슈 슈트라우스 집. (우) 가르미슈 알프스 기슭.

알프스가 그들을 키웠다

그러나 전후 독일이 과거 인물의 선한 업적과 불가피했던 잘못을 제대로 구별했던 것은 집단이성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망령은 청산하되 그것이 마녀사냥이 되지 않도록 균형 있게 공과를 살폈다. 어쩌면 300개가 넘게 쪼개졌던 나라가 연방제 공화국으로 우뚝 선 비결인지도 모른다.

슈트라우스 집을 나서 알프스로 올라가는 산악 열차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니체, 조반니 세간티니,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모두 알프스 체험으로 호연지기를 길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자의 업적이 마치 알프스 고산준령처럼 서로 이어진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말러와 슈트라우스 곡의 소재가 되었고, 스위스 화가 세간티니는 책의 이탈리아 번역판에 삽화를 그렸다. 차창 밖 풍경이 화폭에서 본 것 그대로이다.

지난 여름, 전 세계가 폭염에 지쳤고 독일도 예년보다 더운 가을이 지속된 탓인지 생각보다 산정에 눈이 적다. 중장비가 어디선가 끌어온 눈을 산기슭에 펴고 있다. 곧 시작될 스키 시즌을 대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히 산 중턱의 아이프호수는 태곳적 그랬듯이 거울처럼 맑다.

슈트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처받은 세상에 음악가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는 음악이 처음 시작되었던 소박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장소를 물색했다. 친구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와 루체른을 두고 고민한 끝에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축제를 시작했다. 후년이면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인 잘츠부르크 축제가 100주년이 된다. 슈트라우스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더 소중히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껴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데온 광장에 초승달이 뜬 뮌헨에도 세 개의 콘서트가 기다린다. 마리스 얀손스가 이끄는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는 10년 전 한 저널의 설문조사에서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선정되었다. 2위 역시 당시 얀손스가 이끌던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였다.

내가 들은 콘서트는, 얀손스에 이어 콘세트르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지만 전 세계에 불어닥친 ‘미투 운동’의 여파로 최근 불명예 퇴진한 다니엘레 가티의 무대였다. 공연에 앞서 ‘이 사람과 해야 하나’라며 불만을 터뜨린 단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많고 연령층이 높은 뮌헨 객석의 반응은 냉정했다. 아니 그보다는 인내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치 한 번 기회를 줄 터이니 만회해보라는 기운이 가득한 헤라클레스 홀이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과 20세기 작곡가 안톤 베베른을 엮어 연주한 가티는 굳은 표정이었지만 자신에게 기회를 준 악단과 청중에게 진정 고마워하는 모습이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다시 재기할지 아니면 서서히 잊힐지 두고볼 일이다. 같은 오스트리아 빈의 토양 아래 100년의 차이를 두고 활동했던 슈베르트와 베베른의 음악은 18세기 바로크의 벨베데레궁전에 걸린 20세기 분리파 클림트의 그림 ‘입맞춤’처럼 독특한 친화력을 보였다.

이튿날 아침, 뮌헨 바로 아래 슈타른베르크호수를 찾았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첫 구절에 나오는 곳이다. 여의도 면적의 7배가 넘는 호수의 느낌은 양수리 비슷하다. 아침이면 짙은 안개가 끼고 아스라하게 알프스가 보인다. 1886년 6월 13일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의 익사체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바그너를 숭상한 나머지 작품 속 배경을 직접 현실로 구현한 루트비히 2세를 두고 모두가 ‘미친 왕’으로 수군댔기 때문에 사인도 미스터리였다.

오늘날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인근의 노이슈반슈타인성과 헤렌힘제성, 린더호프성은 모두 달력 그림으로 안성맞춤일 만큼 남독일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바탕으로 한 노이슈반슈타인은 디즈니성의 모델이고 왕이 탔던 마차에서 신데렐라가 당장 내릴 것만 같다.

가르미슈 아이프호수
가르미슈 아이프호수

슈타른베르크호수의 추억

왕의 시신이 발견된 호수의 외딴 기슭에 교회와 십자가가 쓸쓸히 서 있다. 역설적으로 그가 죽은 곳에서 다시 한 번 ‘로엔그린’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안개가 깔린 호숫가에서 동생 살해범으로 지목받은 브라반트의 공주 엘자가 자기 변호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엔그린’을 가장 먼저 들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가사와 음악을 거의 외우고 있다. 나는 아직 골디셰 델리아의 옛날 음반을 가지고 있는데, 엘자의 ‘우울한 날에 외로이’에서 트럼펫의 ‘매우 여리게’로 음악이 시작되고 ‘휘황한 검의 광채 속에 한 기사가 다가왔어요’라는 노래가 나오면, 열여덟 살이었을 당시처럼 진정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낭만주의의 극치이다.”

나도 처음 인터넷에 연결되던 때를 기억한다. 1995년 여름 플로피디스크 한 장에 들어가는 넷스케이프라는 프로그램을 깔고 전화선을 통해 어렵사리 세상과 연결되었을 때 내가 처음 두드린 검색어가 바로 T. S. 엘리엇과 토마스 만이었다. 작가가 직접 낭송하는 ‘황무지’와 ‘로엔그린’ 추억의 육성은 우리 집을 슈타른베르크호수로 만들었다. 지금은 유튜브에 널렸지만, 첫 기억을 대신할 수는 없다.

뮌헨 필하모닉은 창단 125주년을 기념해 말러의 교향곡 8번을 연주했다. 말러가 대규모 합창을 동원해 1000명에 이르는 공연을 치른 곳이 바로 뮌헨이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천인 교향곡’에는 어림잡아 600명 정도가 선 듯하다.

오르간의 신호로 시작한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의 합창은 가스타이크(Gasteig)를 진동시켰다. 원래 음악당 자리는 유명한 술집이었고 그곳에서 히틀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로 그쳤다. 말러의 음악은 악명 높은 ‘비어홀 폭동’의 잡음을 쓸어내는 듯했다. 콘서트홀을 위한 미사곡인 1부를 마치고 휴식 뒤에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장에 붙인 2부가 시작되었다.

첫 대목은 바로 가르미슈와 같은 고산준령으로 청중을 안내한다. 여러 교부들의 신념에 찬 아리아에 이어 천사들이 죄 많은 파우스트의 육신을 위로하고, 구원의 여인 그레트헨과 성녀들이 그를 성모 마리아에게 인도한다. 1910년 뮌헨 초연 때, 앞서 이 글에 언급한 인물이 거의 다 참석했다. 말러의 동료 슈트라우스와 제자 안톤 베베른, 작가 호프만 스탈과 토마스 만,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괴테의 꿈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토마스 만의 뮌헨 집은 이자르강을 끼고 영국 정원 건너편에 있다. 호젓한 고급 주택가에는 완고한 귀족 같던 독일 작가의 기운이 남아 있다. 마이스터의 나라 독일에서 그는 정신을 갈고 문장을 깎아 자기 문화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숨 막힐 것 같은 그 기운을 벗어나니 영국 정원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세상의 굴레를 벗어던진 유토피아와도 같다.

독일 여행 마지막 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관현악 무대는 대개 이렇게 오전에 마련된다. 뮌헨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다가 가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는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한다.

전반부,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협주곡을 협연했다. 12음 기법의 난해한 곡이었지만, 이날도 맨발로 주술사처럼 무대를 장악한 코파친스카야의 카리스마에 청중은 집중했고 갈채는 끝없이 이어졌다.

루트비히 2세 마차
루트비히 2세 마차

오늘의 클래식음악은 무엇인가

슈트라우스가 음악의 무지개를 마감한 뒤로 쇤베르크는 무지개 없는 시대를 주도했다. 그는 12음 기법을 두고 “독일 음악 200년의 주도권을 확보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무지개 없는 시대가 정말 200년 정도 지속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클래식음악은 무엇인가’ 묻는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클래식음악은 대략 바로크시대에 시작되어 20세기 전반에 마무리되었다. 함부르크의 클롭슈토크와 말러가 예고하지 않았던가, 죽어야 부활한다고!

누구도 박물관에 ‘왜 어제 그린 그림과 오늘 새긴 조각은 없는지’ 묻지 않는다.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극장도 박물관과 같다. 새로운 음악은 바흐나 베토벤, 심지어 말러나 슈트라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서 쓰임새를 인정받은 뒤에 그것을 위한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얻을 것이다. 어쩌면 유튜브나 인터넷이 새 콘서트홀인지도 모른다.

오후에 뮌헨의 미술관인 알테와 노이에 피나코테크를 갔다. 많은 걸작 가운데 여행의 끝을 장식할 그림이 눈에 띈다. 세간티니가 그린 ‘밭가는 풍경’이다. 두 농부가 함께 이랑을 판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번스타인의 오페라 ‘캔디드’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도 서울과 드레스덴에서 각기 이 곡이 연주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 식객이던 철학자 볼테르가 30년 전쟁의 참상을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에 번스타인이 곡을 붙인 것이다. 피날레 합창 ‘우리 밭을 일구자(Make our garden grow)’야말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최선의 가르침이다.

아마도 이젠하임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나 세간티니, 슈트라우스, 토마스 만이 지금 살고 있다면 지구온난화나 이민자 갈등에 대한 작품을 그리고 쓸 것이다. 당대에 그랬듯 스스로 나약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극복한 영웅’이 되는 것이 해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침 바이에른 주선거에서 극우가 약진한 만큼 집권당은 크게 패했고, 메르켈은 총리직은 유지하되 당수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도 정권이 바뀌었지만 갈등과 분열은 별반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한다. “노력하는 한 길을 잃는다”라고!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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