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우) ‘미소롱기 폐허 속의 그리스’.
(좌)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우) ‘미소롱기 폐허 속의 그리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경험해보고 싶은 시기와 장소가 19세기 유럽이다. 낭만주의가 만개한 시대다. 개인의 정열과 상상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순간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에 기초한 18세기 이전의 고전주의에 이어 압제를 불사른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이성주의를 잇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낭만주의다. 성(聖)을 실천하고 찬미하는 고전주의, 속(俗)스러운 자유와 평등을 앞세운 이성주의도 좋다. 그러나 고전주의는 뭔가 일방적이고, 이성주의는 너무도 삭막하다. 인생 전부를 신의 목소리나 혁명의 행진곡에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신은 너무 조용하고, 혁명은 너무 시끄럽다. 적당한 잡음을 즐기며 이기적이고 게으른 보통 인간 수준에 비춰볼 때, 신이나 혁명 모두 너무 무겁다.

고전주의·이성주의를 모두 겪은 뒤 등장한 낭만주의는 양극단의 성과 속에서 벗어난 중간지대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신과 이성 모두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는 반면, 개인에 기초한 열정적 꿈을 중시한다. 이것이 낭만주의의 출발점이다. 초월자 신의 뜻을 받드는 죄인으로서의 인간, 이성실천을 위한 집단으로서의 혁명동지들과는 무관하다. 신·인간·자연·사회를 특별한 이념이나 물리적 제약 없이 자유롭고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낭만주의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낭만주의가 특화된 영역이 이탈리아에서는 건축, 영국에서는 문학, 프랑스에서는 미술, 독일에서는 음악이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가 인류 지성의 출발점인 것은 당연하지만, 18세기 이후 문학·미술·음악의 주도권은 반도를 넘어 유럽대륙으로 확장된다. 시인 바이런은 19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주의의 아이콘이다. 그리스 독립운동에 참가했지만, 36살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한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타국의 혁명에 목숨을 거는, 헤밍웨이나 체 게베라의 원조가 바이런이다. 고전주의는 신의 이름으로, 이성주의는 혁명을 위하여, 낭만주의는 나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나간다. ‘차일드 헤럴드 순례기’를 비롯한 바이런의 문학작품들은 당시의 낭만주의 정서를 이해하는 교과서에 해당한다.

문학은 바이런, 미술은 들라크루아

영국 문학계에서는 낭만주의의 상징이 바이런이라고 할 때,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어떤 인물이 낭만주의 아이콘에 오를 수 있을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가 최적의 인물일 듯하다. 바이런보다 10년 뒤인 1798년에 태어나, 1863년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생존시기를 보면, 독일 낭만주의의 슬로건인 ‘질풍노도(Stum und Drang)’ 시대의 화신 그 자체로 느껴진다. 1789년 혁명의 열기가 남아있던 시기에 태어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등장,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을 전부 겪은 ‘혁명 홍수 시대’의 체험자이자 목격자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이라고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가? 혁명은 결코 쿨(cool)하고 아름다운 이벤트가 아니다. 정의·자유·평등 같은 대의명분과 함께 폭력과 살인이 일상화된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으로 변해, 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으로 발전한다. 단두대로 공포정치를 조장한 로베스피에르도 스스로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들라크루아는 그같은 카오스 시대를 이겨낸 생존자인 것은 물론 24살 때 파리 살롱에 입선한 이래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살아간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부침은 있었지만, 혁명의 홍수에 빠져 익사할 정도의 시련은 없었다. 혁명의 최선두에 서서 반대자들을 단두대로 몰아가면서 생존해나간 인물도 아니다. 혁명이라는 화를 피해 적당한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 낭만주의 화가다. 들라크루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그같은 카오스 시대에 살아남은 낭만주의자라는 점에서부터 시작됐다.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는, 혁명과 반혁명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척박한 시대를 그는 과연 어떻게 개척해 나갔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날아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인물 중 한 명이 들라크루아다.

내년 1월 초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들라크루아전.
내년 1월 초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들라크루아전.

뉴욕 메트에서 내년 1월까지 전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는 들라크루아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9월 중순부터 시작해 내년 1월 초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인파를 피하려면 특별히 밤 9시까지 문을 여는 토요일 밤 관람이 제격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예술은 독점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가운데 혼자 지켜보는 것이 좋다. 개인의 열정이 짙게 배어나는 낭만주의 화가를 만나러 간다는 점에서 ‘독점 관람’은 한층 더 중요하다.

전시장으로 들어가려는데 흥미로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회 타이틀이 그냥 ‘들라크루아(Delacroix)’다. 19세기 것이 아닌 현대적인 얼굴 사진과 더불어 특별한 부제(副題) 없이 들라크루아란 이름만 달랑 걸려 있다. ‘낭만주의 전위병’ ‘팔레트를 무기로 한 혁명시대의 목격자’ 같은 부제도 붙을 법하지만, 이름 하나가 전부다. 수식어 하나로 묶어 규정하기 어려운 화가가 들라크루아라는 의미일 듯하다. 항상 느끼지만, 뉴욕에서 토요일 밤 7시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만큼 조용한 곳도 없다. 그러나 거의 텅 빈 공간 속에 걸린 전시물을 보면 실망이 앞선다.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들이 아니라 주로 미국 내 미술관에 흩어진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했기 때문이리라. 양적으로 볼 때도 빈곤하다. 대신 전시장 대부분을 차지한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삽입된 들라크루아의 흑백 동판화 시리즈다. 전부 20여장 정도로, 전시회의 중심처럼 느껴진다. 들라크루아는 괴테는 물론 셰익스피어 작품에 심취한 인물이다. 바이런은 들라크루아가 가장 존경한 시인이다. 피아니스트 쇼팽과의 교류는 유명하다. 그림만이 아니라 문학·음악을 통한 상상력의 확장은 들라크루아만이 아니라 당대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공통점이었다.

뉴욕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는 ‘미소롱기 폐허 속의 그리스(Greece on the ruins of Missolonghi)’라는 작품일 듯하다. 1826년 들라크루아가 28살 때 제작한 유화로, 가로 147㎝ 세로 208m에 달하는 초대형 유화다. 그리스가 오스만제국(현재 터키) 지배하에 있던 때 벌어진 미소롱기 대학살을 기록한 그림이다. 양손을 벌린 채 황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여성의 표정이 인상 깊다. 대리석 바위 아래 깔린 그리스인과, 여성 뒤에 선 오스만제국 군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리스가 어떤 곳인지, 그림만 봐도 와닿는다. ‘미소롱기 폐허 속의 그리스’는 학살된 그리스인 1만여명을 위한 추모화이다. 미소롱기라는 곳은 들라크루아 작품이 나오기 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한 바이런이 숨진 곳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죽음과 함께 들라크루아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이후 유럽 열강의 그리스 독립운동 지원은 적극화된다. 흥미롭게도 들라크루아는 미소롱기는 물론 그리스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그리스인 모델을 등장시킨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3월에도 들라크루아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다. 3월 말부터 4개월간 열린 파리 루브르 전시회였다. 프랑스 전역에 흩어진 180점의 그림을 모은 초대형 들라크루아 전시회로, 1963년 들라크루아 사후(死後) 100주년 기념전 이후 처음 열린 대형 이벤트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루브르 전시 기간 중 하이라이트 작품이었다. 원래부터 루브르가 소장한 그림이지만, 특별전을 통해 이때 새롭게 선보였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제목에 관한 오해다. 원래 제목을 보면 ‘La Libert guidant le peuple’, 즉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정확하다. 일본에서 의역된 제목이 한국에 넘어오면서 ‘자유의 여신’으로 변한 듯하다. 동양적 사고로 보면 19세기 말 ‘자유’라는 추상명사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왼손에 총을, 오른손에 삼색기를 든 여성을 여신으로 승격해, 자유의 개념을 보다 시각화·구체화한 제목이라고 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 자화상
들라크루아 자화상

센 강변에서 일하던 세탁녀가 주인공

또 한 가지는 오해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전혀 무관하다. 들라크루아가 32살 때이던 1830년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수많은 혁명 때문에 헷갈릴 듯하지만, 반(反)왕당파를 몰아내려던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10세를 쫓아낼 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마치 들라크루아가 혁명에 직접 참가해 피가 튀는 현실을 직접 경험한 듯하지만, 전혀 아니다. 들라크루아는 총이나 칼을 들고 혁명에 직접 참가한 적이 ‘결코’ 없다. 낭만주의 화가답게, 상상력만을 동원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림을 대하는 파리지앵의 공감대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근거를 그림 속에 투영시킨다. 그림 한가운데를 차지한, 자유의 여신 격인 여성에 관한 세밀한 묘사다. 당시 그림을 본 파리지앵이라면 여성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아냈다고 한다. 세탁으로 끼니를 이어가던 실제 여성이 그림 속 주인공이다. 19세기 파리 센 강변에서 일하던 세탁녀는 최하류 계층의 상징이다. 혁명 당시 세탁녀의 아버지는 굶주림과 왕의 폭정에 항의하다 총알 10발을 맞은 채 무참히 살해된다. 세탁녀는 울부짖으며 “내 손으로 적 90명을 죽일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무장혁명시위대 맨 앞에서 싸우면서 왕당파 9명을 살해한다. 그러나 마지막 체포 직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들라크루아는 파리의 최하류 세탁녀를 시대의 영웅으로 만들어 공표했다. 원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은 비평가들의 악평으로 관심사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여성의 가슴이 드러나 있고, 사방팔방 피로 범벅이 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그림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7월혁명 성공 후 파리지앵의 환호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작에 올라서게 된다. 그림 덕분이겠지만, 들라크루아는 7월혁명 1년 뒤인 1831년,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Lgion d’honneur)를 받게 된다. 더불어 그림 속 여신 바로 옆에서 총을 들고 전진하는 10살 정도의 소년은 30여년 뒤 문호 빅토르 위고를 통해 부활한다. 장편소설 ‘레미제라블(Les Misrables)’ 속 소년 시민병의 모델이 들라크루아 그림 속 소년일 것으로 추정돼 왔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여신이 쓴 모자는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 중 하나다. 관찰하듯 자세히 봐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모자다. 원통형 삼각 디자인으로, 모자 윗부분이 앞으로 약간 굽은 이른바 ‘프리지안 모자(Phrygian cap)’다. ‘자유의 모자’라고도 불리는 프랑스혁명의 상징이다. 영화는 물론 역사물이나 공공장소처럼 혁명과 관련된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자다. 원래 고대 안탈리아 지방(터키 아시아지역)에서 사용하던 모자로, 고대 로마 당시 노예가 자유민 자격을 얻을 때 받은 징표였다고 한다. 마치 어린이에게 젖을 물리듯 혁명과 인민의 어머니로서 가슴을 전부 드러낸 자유의 여신이 바로 이 모자를 쓰고 있다. 비록 세탁녀이기는 하지만 누구의 압제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민의 상징으로서 프리지안 모자를 쓴 것이다.

자유의 여신이 쓴 모자의 비밀

추정컨대, 들라크루아는 19세기 말 미술가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을 화가였을지 모른다. 혁명을 그린 화가인 동시에, 프랑스 정부를 위한 기록화가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던 당시, 모로코·알제리에 대한 그의 그림들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줬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대의 화가들 입장에서 본다면, 돈 걱정 없이 여행을 하면서 이국적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너무도 부러운 존재였을 듯하다. 잘못 알려져 있는데, 야외 풍경을 직접 현장에서 화폭으로 옮긴 첫 번째 화가는 인상파가 아닌 들라크루아였다. 그의 활동 시기에 막 등장한 이동형 튜브 물감을 이용해 아프리카 현지의 태양빛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자유를 그렸지만 자유분방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자유정신에 의거해 살되 전통과 기존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꿈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자세를 견지했다. 낭만주의 화가를 대표하지만, 고전주의 화풍과 소재를 작품 구석구석에 집어넣은 인물이 들라크루아다. 피로 점철된 혁명만이 아니라 야릇한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손을 댄 전방위 화가가 들라크루아다. 카오스 시대를 무사히 넘긴 지혜인 동시에, 들라크루아가 프랑스만이 아닌 인류 모두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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