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아이돌그룹 K/DA. ⓒphoto 라이엇게임즈
가상 아이돌그룹 K/DA. ⓒphoto 라이엇게임즈

데뷔 3주 만에 뮤직비디오 조회수 7600만건. 미국 아이튠즈 기준 K팝 부문 1위, 팝 부문 최고 4위. 빌보드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직접 소개글을 올린 신인.

이 무서운 신인 아이돌그룹은 실존하는 그룹이 아니다. 가상 아이돌그룹 ‘K/DA’다. 보통 케이디에이로 읽는 이 그룹은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서 시작했다. 게임 캐릭터 아리, 이블린, 카이사, 아칼리가 멤버다. 지난 11월 3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개최된 e스포츠 국제대회, 롤드컵 2018 결승전에서 데뷔 무대를 치렀다. 데뷔곡은 ‘팝스타(POP/STARS)’다.

게임 제작자이자 아이돌그룹 제작자인 라이엇게임즈는 K팝 스타일과 게임 캐릭터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철저히 준비했다고 밝혔다. 마치 아이돌그룹이 데뷔하기 전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치르는 것과 같다. K/DA라는 이름도 게임에서 따온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게이머의 기여도를 나타내는 수치에서 따왔다. 한국의 여자 아이돌그룹 ‘(여자)아이들’의 멤버 소연과 미연이 K/DA 제작에 참여했다. 목소리 녹음은 물론 얼굴과 몸짓을 그대로 본뜨는 모션캡처까지 도왔다.

외신들은 K/DA의 성공적 등장을 놓고 가상 아이돌이 대중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고 분석한다. 그동안 서브컬처에서 별스럽고 은밀하게 시도되던 가상 아이돌은 이제 진짜 아이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담과 러브 라이브!, 하츠네 미쿠까지

가상 아이돌의 계보를 되짚어가다 보면 1996년 일본에 당도한다. 주인공은 일본 연예기획사 호리프로가 만든 3D CG 캐릭터 ‘다테 쿄코’다. 다테 쿄코는 호리프로가 야심 차게 내놓은 ‘병에 걸리지도 않고 스캔들도 없는 꿈의 탤런트’였다. 60여명의 전문 인력과 수십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다테 쿄코는 한국에서도 디키(DiKi)라는 이름으로 1999년 데뷔하기는 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 이후 일본 연예인이 한국에 진출한 첫 사례였다.

1997년에는 한국에서도 가상 아이돌이 태어났다. ‘사이버 가수’ 아담은 아담소프트에서 개발한 가상 아이돌이었다. 음반 판매량이 20만장에 달하고 CF 촬영도 하는 등 나름 성공가도를 걸었지만 2집은 실패했다. 이후 “군에 입대했다”는 다분히 한국적인 이유로 활동을 접었다. 아담이 ‘입대’한 후 류시아, 사이다 등 다른 사이버 가수들도 데뷔했지만 인상적인 활동을 펼치진 못했다.

21세기에 등장한 가상 아이돌은 CG 캐릭터 선배들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어설픈 CG에만 기대지 않았다. 스토리라인을 덧붙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무장하고 이야기를 붙여 등장했다. 그리고 한 작품을 가지고 여러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미디어믹스 전략을 들고나왔다. 일본 게임제작사 반다이남코에서 2005년 출시한 게임 ‘아이돌 마스터’와 2010년 등장한 ‘러브 라이브! 스쿨 아이돌 프로젝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러브 라이브!’는 성공적인 미디어믹스 사례로 꼽힌다. 처음부터 출판사, 음반사,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함께 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유명 아이돌그룹 AKB48의 총선거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팬들의 투표를 통해 그룹 이름을 정하고 멤버의 포지션, 활동 범위를 결정했다. ‘러브 라이브!’는 마이클 잭슨, 아무로 나미에 등 유명 뮤지션들의 콘서트 장소인 도쿄돔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열고 5만석 전석을 매진시키기도 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 스쿨 아이돌 무비’는 일본 극장 수익만 28억엔(약 280억원)을 올려 여러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하츠네 미쿠는 여타 가상 아이돌과는 조금 다르게 출발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하츠네 미쿠는 맨 처음 2007년 일본 크립톤 퓨처 미디어에서 개발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 ‘보컬로이드’의 이미지 캐릭터였다. 보컬로이드는 사람의 음성을 합성해 억양과 높낮이를 조절해서 노래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 있으면 누구나 음악을 만들고 하츠네 미쿠가 노래를 직접 부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2차 창작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츠네 미쿠는 사용자가 직접 참여해 키워낸 아이돌이다. 열광적 인기를 등에 업고 일본에서는 높은 인기를 누렸다. 도요타의 신차 광고모델로도 섰고 홀로그램을 이용한 콘서트도 진행했다. 세계적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와도 합동 공연을 했다. 이것을 보고 한국에서도 보컬로이드 캐릭터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SBS A&T와 야마하가 합작해 ‘시유’라는 이름의 한국어 보컬로이드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 2012년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 홀로그램 무대로 야심 차게 출연했지만 ‘시대를 앞서나갔다’는 평가만 받았다. 다만 당시 무대에 섰던 백댄서가 방탄소년단(BTS)이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뒤늦게 화제가 되긴 했다.

유튜버가 된 가상 아이돌

이제 가상 아이돌은 가장 인기 있는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201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키즈나 아이’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초의 버추얼 유튜버(브이튜버·Vtuber)라고 할 수 있다. 키즈나 아이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233만명으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유튜브 스타다. 구독자 수로 보면 한국의 유명 유튜버인 대도서관(189만명)보다 훨씬 많다. 아예 일본 관광국은 키즈나 아이를 공식 홍보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키즈나 아이의 영상이 업로드되면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한국어 자막이 달릴 정도다.

키즈나 아이는 단순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니다. 귀여운 외모는 모션캡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과 몸에 모션캡처 기술을 연결해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그대로 재현해낸 캐릭터다. 목소리의 정체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전문 성우가 연기하는 것으로만 알려졌다. 키즈나 아이는 키즈나 아이일 뿐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키즈나 아이의 방송은 일반 유튜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적인 잡담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게임 플레이 영상을 업로드하기도 한다. 키즈나 아이의 성공에 힘입어 일본에서는 이미 5000명이 넘는 버추얼 유튜버가 활동 중이다. 초기에는 버추얼 유튜버를 만들려면 고가의 장비와 기술 인력이 필요했지만 VR헤드셋 같은 가상현실 장비가 보급되면서 달라졌다. MCN 업계는 물론 게임 업체나 개인까지도 속속 버추얼 유튜버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추세다. 시장이 커지면서 일본 최대의 모바일 게임사 그리(GREE)는 지난 4월, 이 분야에 100억엔(약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다시 K/DA 얘기로 돌아가보자. K/DA는 예고 없이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다. H.O.T.에서 지금의 방탄소년단으로 K팝 아이돌의 계보가 이어지듯 다테 쿄코에서 시작된 가상 아이돌의 시대는 케이디에이로 계승됐다. 요즘 아이돌이 가수 외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멀티테이너이듯이 가상 아이돌 역시 가수, 배우, 유튜버, 게임 캐릭터로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K팝 문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힙(hip)’하고 ‘핫’한 콘텐츠로 자리매김한 시점에 K팝 아이돌 그룹을 콘셉트로 하는 가상 아이돌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K/DA의 흥행이 반짝 흥행으로 끝나게 될지, 아니면 가상 아이돌의 르네상스로 이어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상 아이돌은 소수가 즐겼던 ‘덕후’ 문화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 축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성윤 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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