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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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과학 그래픽노블’ 작가를 만나러 지난 11월 30일 경기도 판교의 NC소프트로 달려갔다. ‘그래픽노블(graphicnovel)’은 ‘그림(graphic)’과 ‘소설(novel)’의 합성어로, 만화처럼 이미지와 글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야기 구조가 소설처럼 복잡한 장르를 말한다. 조진호 작가는 과학을 주제로 한 그래픽노블 서적을 잇달아 펴내고 있는 저자다.

게임업체인 NC소프트 사옥은 ‘ㄷ(디귿) 자’를 엎어놓은 모양이다. 거대한 규모가 판교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했다. NC소프트는 컴퓨터게임 ‘리니지’를 만든다. 조진호 작가는 이 빌딩 12층 NC문화재단에서 일한다.

조 작가를 취재하러 간 건 그가 그래픽노블 ‘아톰 익스프레스’를 새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원자(atom)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를 탐구해온 화학자와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조 작가의 전작 두 권은 ‘그래비티 익스프레스’(2012·원작 ‘어메이징 그래비티’)와 ‘게놈 익스프레스’(2016). 각각 중력과 유전체(genome)를 둘러싼 인류의 생각 변화를 짚었다.

‘아톰 익스프레스’ 책 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니 조 작가는 따로 그림을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에서 ‘생물’(서울대 생물교육과 93학번)을 공부했고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에서 생물 교사로 최근까지 일했을 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곧바로 과학만화를 그렸다”면서 “첫 작품인 ‘그래비티’는 출간만을 목표로 했는데, 독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비현실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책은 11쇄인가, 12쇄까지 찍었다고 했다. 한국출판문화 대상 등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과학 그래픽노블이 한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만화를 그리는 여동생의 권고로 과학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생 조주희 작가는 ‘밤을 걷는 선비’라는 작품을 낸 바 있는데 이 작품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확인해 보니, 이 작품은 MBC 수목드라마로 만들어져 2015년에 방영됐다. 조 작가는 여동생뿐 아니라 어머니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면서 “배우진 않았어도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조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도구는 그래픽디자이너가 많이 사용하는 일본제 그래픽 태블릿 ‘와콤’. 그의 그림 선은 굵고 전체적인 색깔은 어두운 편이다.

“주제를 선정하고 제로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아톰 익스프레스’를 만들기 위해 과학책 30~40권을 읽으면서 서너 달 공부했다. 내가 읽은 책 리스트는 ‘아톰 익스프레스’ 맨 뒤에 정리해놓았다. 스토리라인, 콘티 구성 등 그림을 그리기 전 작업에만 8개월이 걸린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 다시 1년이 소요됐다.” 그는 “작품 스토리를 짜기 위해서는 머리가 빠개진다”고 말했다.

조진호 작가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작품 세 권을 서둘러 읽었다. 그의 책들은 이미 명성이 높았지만 ‘만화책이지, 그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읽지 않았었다. ‘아톰 익스프레스’가 집으로 배달되기를 기다리며 그의 첫 작품 ‘그래비티 익스프레스’를 사서 읽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중력 관련 책을 많이 읽었지만, 중력에 대한 인류 생각의 흐름을 이렇게 잘 정리해준 책이 있나 싶을 만큼 내용이 좋았다. 특히 뉴턴이 중력법칙을 발견하는 장면과,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감탄했다. ‘게놈 익스프레스’는 시간이 부족해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으나, ‘아톰 익스프레스’에서도 책을 읽는 즐거움은 이어졌다.

‘아톰 익스프레스’에서 작가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두 사람과 같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원자는 과연 존재하는가를 치열하게 탐구했던 과학자들의 생각 궤적을 따라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조진호 작가가 열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며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과학자를 만나는 식의 구성이다.

경험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게 원자를 보여달라. 그럴 수 없다면 원자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반면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관념론자이다. 원자란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원자란 존재를 상정해야 자연의 작동원칙 등 모든 설명이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꼭 눈으로 봐야 하나, 안 봐도 있는 줄 안다’는 식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조진호 작가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18세기 초반 활동했던 화학자부터 20세기 초반의 아인슈타인까지 만난다.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내가 처음 접한 영국 화학자 조지프 블랙. 맨 마지막 인물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하나, 1905년 또 다른 논문에서 원자의 존재를 입증해 당시까지의 논란을 잠재운 바 있다. 아인슈타인은 브라운운동이 원자들의 충돌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설명하는 걸 뛰어넘어 원자의 크기, 질량을 계산할 수 있는 방정식까지 내놓았다.

‘아톰 익스프레스’는 특히 열역학 부분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열역학은 물리학에서 어렵기로 악명 높다. 열역학은 증기기관을 사용하던 시절에 중요했다. 열역학을 완성한 루트비히 볼츠만(오스트리아인)은 첫 번째 이론물리학자이자 통계물리학을 만든 사람이라고 얘기된다. 볼츠만은, ‘원자를 내게 보여달라’고 말하는 20세기 초반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와의 대결로 고통받다가 끝내 이탈리아 베네치아 옆의 휴양지에서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 ‘원자’의 존재를 둘러싼 과학자들 간의 수많은 대결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인물 중 하나다.

“책 주제를 적당히 다루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들어갔다. 열역학을 많은 저자가 다루지 않는 건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추상적이어서 그렇다. 내게도 ‘열역학’은 어려웠다.”

그는 책 원고를 쓰고 나서 물리학자 두 사람으로부터 감수를 꼼꼼히 받았다고 한다. 김상욱(경희대 물리학과)·김범준(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가 잘못된 개념이나 표현을 바로잡았다.

조 작가는 이 점을 의식한 듯하다. ‘아톰 익스프레스’ 속에 독자로부터 항의받는 장면을 두 곳이나 집어넣었다. 198쪽과 309쪽에서 독자들이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항의하는데 조 작가는 ‘조금만 참아달라’고 독자들을 달랜다.

그래픽노블은 말 그대로 소설이다. 소설은 창조다. 인물들뿐 아니라 공간과 시간, 배경 등 만들어야 할 게 많다. 캐릭터 하나하나를 창조하는 작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게임회사를 운영한 적이 있다. 2002년이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게임을 제작해 주니어네이버, 야후꾸러기를 통해 팔았다. 이때 게임 속 캐릭터 만들기를 한 작업이 재밌었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 작업하는 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게임회사를 만들기 전에는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에서는 학내 프로그램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포스데이터(현 포스코ICT)에서 2년 반 일했는데 대기업 일이 재밌지 않아 사표를 내고 게임업체를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J인터랙티브’. 자신의 이름을 땄다. 직원 수가 최대 50명까지 되기도 했으나 경영은 쉽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때 NC소프트 김택진 사장으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았다. CJ인터넷으로부터도 거의 동시에 제안을 받았다. 2006년 NC소프트에 회사를 매각했고, NC소프트의 자회사로 2년 반을 일했다.

NC소프트가 이 자회사를 모기업으로 통합하면서 그는 회사를 떠났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복귀해 마치지 못한 석사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석사 논문을 쓰고 민족사관학교 생물학 교사로 일했다. 2010년 2월이었다. 민사고에서 우수한 학생을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수업준비가 만만치 않았고, 처음 몇 년간은 매일 밤 수험생처럼 공부했다. “3년 차가 되니 여유가 생겼다. 좀이 쑤셨다. 책을 쓰기로 했다. 과학책은 당시에도 매니아처럼 읽었다.”

그는 여동생의 권유를 받아 만화로 푸는 과학책을 쓰기로 했다. 내용을 ‘시대별’로 할 것인지, ‘인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연구하다가 ‘주제’ 중심으로 가기로 했다. “생각의 흐름, 생각의 역사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조 작가는 말했다.

중력을 다룬 책을 맨 먼저 낸 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력은 스토리가 잘 나오는 구조이고,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그래비티 익스프레스’ 다음에 내놓은 게 ‘게놈 익스프레스’였는데 그가 대학에서 공부한 생물학 분야다. 한데 내용이 좀 어렵다는 독자의 평이 있었다. 그는 “공부한 티를 내다 보니 책이 좀 두툼해졌다. 내가 힘을 좀 줬다”며 웃었다.

그는 ‘익스프레스 시리즈’를 펴내는 위즈덤하우스와 모두 8권을 내기로 계약했다. 다음 책은 진화를 다룰 ‘에볼루션 익스프레스’, 그 다음은 양자역학을 다룰 ‘퀀텀 익스프레스’다. 광합성 이야기, 면역, 그리고 시간도 다룰 계획이라고 했다.

“지식전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과학자가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했는지를 말하고 싶다. 발상 전환법이다. 목표까지 가는 과정에는 많은 갈림길이 있다. 수많은 이가 이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해 실패하고 좌절한다. 천재 과학자가 수행한 일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게 만들고 싶다.”

그가 판교의 NC문화재단 실장으로 일하는 건 지난 7월부터다. NC소프트 김택진 사장이 ‘문화재단 운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제안을 받아들였고, 8년 일한 민사고의 익숙함을 뒤로하고 떠났다. NC문화재단은 2013년에 발족했으나, 조진호 작가가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시동을 걸고 있다. 공익사업, 그중에서도 아이들 창의력 개발 관련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재단 일을 하다 보니 과학 그래픽노블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며 “작업 시간을 어떻게 더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익스프레스 시리즈’가 전 8권으로 계획되어 있으니, 앞으로 최소 2년에 한 권씩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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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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