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 오늘은 지난 10월에 국내 재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감독 웨스 앤더슨·2014)을 다루고자 합니다.

배종옥 | 4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작품의 다른 면모들을 알게 됐어요. 역시 수작(秀作)은 거듭 보아도 흥미가 줄어들지 않는 듯합니다.

신 | 하긴 웨스 앤더슨은 전작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2012)을 비롯해 워낙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미학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니까요.

배 | 하지만 영화 속에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어도 스타일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스토리가 안 보이기 십상이거든요.

신 | 여러 성향의 감독이 있지만, 스타일 위주의 감독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겠네요.

배 | 아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이 영화 좋다”고 하는 분들도 몇 년 지나서는 기억에 남는 게 스타일밖에 없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신 | 영화는 액자 안에 액자, 그 안에 또 액자라는 식으로 겹겹이 액자를 둘러싼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화면 비율을 변화시키는 특이한 연출 기법을 사용했지요. 좌우가 넓은 와이드스크린으로 진행하다가 1930년대 파트에서는 좌우가 잘린 브라운관 TV와 비슷한 화면 크기로 나옵니다.

배 | 화면 비율이 그런 식으로 변화되는 건 미처 몰랐네요. 아기자기한 소품, 화려한 색감, 미니어처의 적극 활용 등으로 영화는 마치 그림책의 삽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아카데미 미술상, 의상상을 받았을 정도로 비주얼은 아주 강력합니다.

신 | 성인을 위한 동화적 성격도 강하게 풍기지요. 전쟁이 한창이던 1932년 어느 날, 엄청난 부호인 ‘마담 D’(틸다 스윈튼 분)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직후에 의문의 살인을 당합니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스 분) 앞으로 남기지요.

배 |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녀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 분)는 구스타브를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지목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lobby boy) ‘제로’(토니 레볼로리 분)와 함께 누명을 벗기 위한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하고요.

신 | 한편 드미트리는 마담 D의 유산과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 분)을 고용하지요.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다른 영화의 주연급들을 대거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배 | 드미트리 역의 애드리언 브로디는 ‘피아니스트’(The Pianist·2002)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입니다. 늙은 제로 역의 F. 머레이 아브라함은 ‘아마데우스’(Amadeus·1984)의 그 유명한 살리에르 아닙니까.

신 | 내레이터를 맡은 젊은 작가 주드 로, 양심적 경찰관 역의 에드워드 노튼, 제로의 연인 ‘아가사’ 역의 시얼샤 로난도 쟁쟁한 배우입니다. 하비 케이틀, 빌 머레이, 오웬 윌슨도 빼놓을 수 없네요.

배 |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겠습니다.

신 | 틸다 스윈튼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옥자’ 덕분에 한국 관객들에게 낯익은 배우가 됐지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80대 노파로 나옵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분장상도 받았는데, 틸다 스윈튼 덕분이지 싶네요.(웃음)

배 | 그녀의 영화 가운데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아이 엠 러브’(I Am Love·2009)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틸다 스윈튼이 굉장히 비현실적인 얼굴이거든요.(웃음) 젊어서는 한때 회의감에 배우 안 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이 40 넘어서 만개한 경우입니다. 배우는 언제 터질지 모른다니까요.

신 | 살인사건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취하고 있으나 영화는 전체적으로 코믹한 분위기입니다. 감옥에서 탈주하는 장면이나 스키 추적신은 만화적 설정과 묘사로 임하고 있고요.

배 | 제가 요즘 코미디 연극 공연을 하고 있어서인지 배우들의 코믹 연기를 유심히 보게 되더군요. 망가지거나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웃기려 해서는 소용없어요. 오히려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유발되는 측면이 있지요. 코믹적인 리듬과 템포감이 있어야 하고 감독의 터치나 조율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 | 하지만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어둡고 음울하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시즘이 대륙을 뒤덮던 시대상을 강압적인 군인들의 모습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배 | 시각적으로 멋지게 담아서 혐오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사실 스토리가 험하잖아요.(웃음) 철문에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상자 안에서 잘린 목이 나오기도 하고요. 제로는 온 가족이 몰살당한 이민자 출신이고, 구스타브는 살인자로 몰려 교도소 생활도 하고요.

신 | 1·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시대가 갖고 있던 우아함이 몰락하는 과정을 애잔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주브로브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역사를 상정하고 있다는 거지요. 제목에 ‘부다페스트’가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고요. 또 시대 변화에 따라 쇠락을 거듭, 외롭고 쓸쓸한 이들만 찾게 된 1960년대 호텔의 모습도 그러하고요.

배 | 하긴 구스타브라는 인물 자체도 비슷하네요. 죄수복을 입고도 파나시 향수를 찾는 허세가 있지만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시를 읊는 로맨티스트이니까요.

신 | 더구나 포악한 군인에 맞서 약자인 제로를 지키려다 죽음에 이르는 휴머니스트인 데다가 호텔 지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견지하려는 일종의 순수주의자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지요.

배 | 구스타브를 거쳐 마담 D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제로가 끝까지 호텔을 팔지 않고 있는 것도 영화의 그런 메시지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겠네요.

신 | 물론 질병으로 일찍 죽은 아내 아가사와 아이의 추억이 어린 곳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긴 합니다만.

배 |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젊은 작가가 늙은 제로에게 “구스타브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자 “자신의 환상 속에서 열심히 살았던 거지”라고 대답하지요. 어쩌면 이게 감독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 모두가 각자 꿈꾸는 대로 분투하며 살아가는 거 아닐까요.

신 | 제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치밀하게 빚어낸 판타지의 매혹”.

배 | 저도 ★★★★. “나도 어쩌면 내 환상 속에서….”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배종옥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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