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5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한식당 빌라에베레스트에서 엄홍길 대장이 등반 도중 숨진 네팔인 셰르파 자녀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photo 정병선
지난 12월 15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한식당 빌라에베레스트에서 엄홍길 대장이 등반 도중 숨진 네팔인 셰르파 자녀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photo 정병선

“산악인이 산에서 죽는 것도 운명이다.” 지난 10월 12일 히말라야 등반 중 숨진 고(故) 김창호 대장이 생전 술자리에서 기자에게 한 말이다. 2014년 조선일보가 기획한 ‘뉴라시아자전거평화대장정’ 당시 100일 동안 24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는 히말라야 등반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려주었다.

최근 네팔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김창호 생각이 났다. 이번 네팔행(12월 8~16일)은 엄홍길(58) 대장과 함께했다. 히말라야 등반이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위급 상황이 있었다. 히말라야 골든 트래킹코스로 불리는 푼힐(해발 3200m) 등반을 앞두고 일행 중 한 명이 고산병 증세에다 복통을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등반 3시간을 앞두고 오전 1시 롯지에서 발생한 상황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인 김승남 전 성모병원 원장의 응급조치와 엄홍길 대장의 신속한 판단 덕분에 환자는 헬기를 타고 포카라로 긴급 후송될 수 있었다.

응급 상황이 마무리된 후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은 이렇게 말했다. “히말라야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다. 내가 16개 봉(峯) 정상 등정을 하고 살아난 것도 ‘히말라야 신(神)’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올해는 엄홍길 대장이 1985년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으로 네팔에 발을 디딘 지 34년째다. 젊고 기고만장했던 산악인은 이제 나이 60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번에 엄 대장과 네팔을 찾은 이유는 여럿이었다. 엄 대장은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국내외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도전의식을 심어준다는 취지로 설립한 재단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재단의 목표 중 하나가 네팔에 학교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엄 대장이 히말라야 16개 봉을 등정하고 살아남은 데 대한 보답으로 오지에 16개 학교를 건립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엄홍길 휴먼스쿨이라는 이름으로 오지에 건립된 학교는 벌써 15개가 완공됐다. 2010년 에베레스트 길목인 해발 4060m 팡보체 마을에 첫 휴먼스쿨을 완공한 이후, 타르푸와 석가모니 탄생지 룸비니 등에 학교가 속속 들어섰다. 지난 12월 9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1시간30분 거리인 둘리켈에 15번째 휴먼스쿨 완공식이 있었다. 엄 대장은 12월 11일 포카라에서 네팔 정부가 주는 ‘국제 산악인상’도 받았다. 2003년부터 유엔이 정한 ‘세계 산의 날(12월 11일)’ 기념식을 맞아 네팔을 알린 산악인이자 네팔 교육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김창호와 함께 숨진 네팔인 유가족 초청

엄 대장의 이번 네팔 방문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지난 10월 김창호 대장이 이끌던 ‘구르자히말 원정대’와 함께 사망한 네팔인 유가족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12월 15일 네팔 카트만두의 한식당 빌라에베레스트에서였다. 이 식당은 한국 산악들의 안식처 같은 곳이다. 히말라야에서 잠든 박영석, 고미영, 김창호 대장이 히말라야 등정 전 한식을 먹으며 힘을 충전한 곳이었다. 앙 도르지 셰르파가 운영하는 이곳엔 우리 산악인들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 김창호 대장과 함께 사망한 네팔인 치링 보테(39), 데나 안죽 보테(30), 푸르푸 보테(18), 나트라 바하둘 찬탈(34) 등의 유가족이 모였다. 등반대에서 요리사와 포터 등으로 활약했던 네팔인들의 유가족은 엄 대장 초청으로 고향에서 두 시간여 버스를 타고 왔다. 치링 보테의 아들 쌈중(8)과 파상(6), 데나 안죽 보테의 딸 밍마(8)와 아들 닌마(6)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엄 대장과 대화를 나누던 데나 안죽 보테의 아내 친점 보테(31)는 “아직도 전화소리만 울리면 아이들이 ‘아빠야?’ 하며 묻는다”고 했다. 엄 대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엄 대장은 그동안 등반 중 목숨을 잃은 네팔인 유가족을 지나치지 않았다. 1986년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해발 7500m 설벽에서 추락한 술딤 도르지(18) 셰르파의 죽음을 목격한 뒤부터였다. 하산길에 팡보체라는 셰르파 마을에서 만난 도르지의 어머니와 부인은 엄 대장을 보고 통곡했다. 당시 도르지는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데다 결혼한 지 넉 달 된 신혼이었다. 이날의 한이 셰르파 유가족 돕기와 오지 학교 건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휴먼스쿨 첫 번째 학교를 이곳 팡보체에 세워 죽은 도르지 셰르파의 영혼을 위로했다. 엄 대장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다”며 “하지만 산악인과 셰르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라고 했다.

식당에서 엄 대장은 자신의 자리 반대쪽에 앉아 있는 청년들을 불렀다. 니마 텐지(24) 셰르파와 파상 타망(23) 셰르파였다. 엄 대장은 “니마는 1999년 나와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 때 사망한 카미 도르지 셰르파의 아들이고, 파상은 2000년 칸첸중가 등정 때 사망한 다와 타망 셰르파의 아들이다”라고 소개했다. 이들 역시 자신이 어렸을 때 숨진 셰르파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다. 엄 대장은 “니마는 대학을 졸업해 엔지니어가 됐고, 파상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외국인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해 한국행을 앞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엄홍길휴먼재단의 장학생으로 이렇게 휼륭히 자랐다고 했다. 니마는 “엄 대장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길거리 소년이 됐을지 모른다”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돌봐준 덕분에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엄 대장과 니마, 파상은 한식당에 차려진 불고기를 유가족 자녀에게 건네며 웃음을 잃지 않도록 했다. 또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을 들려주며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엄홍길휴먼재단은 이들 유가족 자녀에게 매달 5000루피(5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네팔인 노동자 평균 월급이 10만원 수준인 걸 감안하면 큰 액수다.

숨진 셰르파 자녀 25명에게 장학금

엄 대장은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007년 로체사르 등정까지 8000급 16개 봉우리를 완등하는 동안 10명의 대원을 잃었다. 이 중 4명이 셰르파였다. 엄 대장은 휴먼재단을 통해 지금까지 26명의 네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는데 이 중 25명이 희생당한 셰르파의 자녀들이다.(1명은 휴먼스쿨 출신 대학생) 1999년 시작할 땐 사재를 털어 지원하다 2016년부터는 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전달해왔다. 엄 대장은 “사실 외국 원정대들은 셰르파의 죽음에 대해 동정하지 않는다”며 “한국 산악인과 함께하다 사망한 셰르파와 네팔인들을 우리가 저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히말라야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55년부터 2017년까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다 사망한 297명 중 114명이 셰르파다. 3명 중 1명꼴이다. 이를 두고 아웃도어 전문지 ‘아웃사이더’는 “셰르파란 직업은 이라크 참전 미군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엄 대장은 “내 인생의 마지막 등반 기회가 주어진다면 히말라야에서 잠든 지현옥, 박영석, 신동민, 김창호와 죽은 셰르파들로 원정대를 꾸려 로체 남벽을 꼭 등정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눈빛은 어느덧 히말라야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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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선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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