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북 모임에서 북측 안내원들의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느냐에 관심을 보였다. 바야흐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남북의 공통관심사인 시대다. 이런 일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만큼 지난 한 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남북 정상이 무려 세 차례나 만났고, 역사상 최초로 미·북 정상회담도 열렸다. 방금 전까지 핵과 미사일을 둘러싸고 험악하게 으르렁거리던 당사자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급변 현상에 대해 평범한 소시민들로서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최근의 정세 변화에 대한 ‘친절한 안내자’를 자처한 책이 있다. 바로 정세현 전(前) 통일부 장관의 대담집 ‘담대한 여정’(2018년 8월 출간)이다. 이 책은 김정은이 왜 태도를 바꿔 대화로 나왔는지,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대응했는지를 짚어본다. 여기에는 남북관계에 드라이브를 거는 현 정부의 입장과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한마디로 “판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동안은 핵개발 중에, 그러니까 협상력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기도 전에 (북한이) 협상하자고 하니까 미국에서는… 콧방귀도 안 뀌었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이 “화성 15형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미국과 빅딜을 할 수 있는 카드를 갖게 되었다”. 저자는 “이런 정세 변화 때문에 앞으로는 (비핵화를 둘러싼 문제들이) 아주 실무적으로 갈 것”이라고 낙관하며, 우리를 ‘담대한 여정’으로 이끈다.

북한은 체제 경쟁에서 밀리고 공산권마저 붕괴하자, 흡수통일을 경계했다. 더구나 우리가 소련 및 중국과 수교하면서 불안감은 한결 증폭되었다. 북한 역시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미·북 수교를 원했으나 미국의 외면으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도, 한편으로 핵개발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당연히 대북제재도 본격화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북한은 한때 아사자가 속출하는 ‘고난의 행군’ 시대를 보냈다. 그럴수록 오히려 핵개발에 더욱 몰두하여 핵 및 미사일 실험을 연달아 강행했다. 특히 김정은 시대에 이르러 각종 실험이 가속화·고도화되었다. 2017년 11월 29일 화성 15형 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자 북한은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이로써 한반도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북한이 미국 동부까지 핵무기를 투발(投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 미국도 제재나 하면서 방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저자의 주장대로 북한의 핵능력이 빅딜카드로 현실화된 것이다. 이 국면을 놓치지 않고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중매쟁이 노릇을 하여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미·북 정상회담까지 이끌어냈다. 저자는 무엇보다 “미군 주둔을 용인한다”는 북한의 메시지가 트럼프를 선뜻 회담 테이블로 불러낸 결정적 요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북한은 아무리 제재를 받아도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내부 자본의 동원은 거의 바닥이 났다. 외부 투자가 절실하다. 하지만 미국이 막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북한은 줄기차게 평화협정 및 미·북 수교를 원했다. 김정은 역시 미·북 수교를 비탕으로 외부 자본 및 경제 지원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김정은의 선의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판문점 만찬 때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나중에 방송을 보니까 눈이 벌겋더라고요. 그 나름으로 하루 종일 피곤했을 겁니다. 그런데 젊은 친구가 눈이 벌개가면서 일을 마무리하려는 그게 바로 진정성입니다. 속이려면 그렇게 못 합니다.” 살벌한 외교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의 분석이라고 보기에는 감상적이기 짝이 없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은은 평양에 미국대사관이 열리고 맥도날드가 들어가고 대동강변에 트럼프타워가 세워지기를 원한다. 저자는 “북한이 중·소 분쟁 때 중·소를 가지고 놀았다”고 논평한다. 그러니 미·북 수교만 되면, 이번에는 북한이 미·중을 능란하게 다루리라고 낙관한다. 미·북 수교는 또한 미국의 이익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를 통해 미국은 주한미군을 유지한 채 좀더 가까이 올라가서 중국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미·북 수교는 손쉽게 이뤄지고 한반도에 완전한 평화가 곧 도래할 것만 같다. 심지어 저자는 앞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문제들이 “실무적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단언까지 한다.

하지만 그의 낙관에 대해 의구심이 하나둘이 아니다. 우선 중국이 그렇게 만만할 리가 없다. 저자는 마치 한반도 문제를 남·미·북 3자 간의 문제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주한미군이 유지된 채 미국이 평양까지 올라가 중국을 좀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6·25전쟁 때 미군의 38선 월선 공격에 대해 존망을 걸고 대항했던 나라다.

무엇보다 저자는 북한이 주한미군을 용인한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북한의 속내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더 걱정되는 것은 우리 측 대응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특보는 평화체제가 진전되면 주한미군의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라고 군불을 지핀다. 아예 발벗고 나서서 북·중의 의중을 대변해준다. 주한미군은 미국의 국익에 사활적이지만, 동북아 균형추로서 우리에게도 사활적이다. ‘영원히’는 아닐지언정 ‘상당 기간’ 분명히 그렇다.

물론 미군이 물러나서 한반도가 ‘자주의 땅’이 될 수만 있다면 당장 미군 철수를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공백에는 필연적으로 중국 패권주의가 밀고 들어온다. 지정학적으로 보아, 중국 패권주의는 미국 패권주의보다 더욱 전면적이고 더욱 직접적일 것이다. 미국의 방어선이 일본으로 후퇴하고, 일본이 적대국으로 돌아서고, 중국의 패권주의가 난무하고, 북한이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군림하고, 우리는 국론분열로 신음하는 미래는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무조건 비관만 해서 변화를 피하는 것은 재앙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낙관에 사로잡혀 서두르는 것은 더 큰 재앙이다. 따라서 비관부터 낙관까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하는 것이 전략의 출발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김정은의 선의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을 ‘연탄 찍듯’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담대한 여정’은 북한이 처한 사정을 따뜻하게 헤아리고, 김정은의 진정성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아무리 특수하다고 해도 ‘선의’나 ‘신뢰’에 매달리는 외치(外治)는 위험천만하다. 그런 유화 전략이 성공한 사례는 역사상 전무하다. 신뢰를 쌓고 희망은 키워나가야 하지만, 그것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단단한 사실과 현실이어야 한다.

외치에 관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내치(內治)를 떠올려보게 된다. 지금 외치는 부글거리고 내치는 얼어붙었다. 외치는 내치의 연장이다. 내치가 실패하면 결국 외치도 성공할 수 없다. 지금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북한의 호감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의 든든한 지지다. 새해에는 내치는 지금보다 훈훈하게, 외치는 지금보다 냉철하게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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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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