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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44호]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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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추기’의 도시 빈에서 모차르트 부자의 인생을 반추하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빈 왕궁정원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 photo 셔터스톡
베네치아발 빈행 OBB RJ132호. 매일 오전 9시55분 출발하는 특급열차다. 만년설에 뒤덮인 알프스산을 넘는다. 베네치아에서 빈까지의 소요시간은 7시간43분. 침대칸 심야열차도 있지만, 겨울의 알프스를 보기 위해 낮 여정으로 결정했다. 창문에 접한 2등석으로 요금은 29유로다. 유럽의 열차가 그러하듯, 출발 한 달 전에 구입하면 당일보다 80% 이상 저렴하다. 유럽 열차의 특징 중 하나지만 1등석과 2등석의 차이를 구별해내기가 어렵다. 좌석이 조금 넓다는 점과 커피 무료 제공 정도가 전부다.
   
   사추기(思秋期)라는 말이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는 10대 사춘기(思春期)와 비교해 뒤도 보면서 앞을 헤아리는 40대 중반 이후의 시간이 사추기다. 황혼기라 부르기에는 너무 이른, 추수의 계절 가을에 직면한 인생이다. 예외도 많겠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 시기다. 사회적으로 볼 때 사춘기는 세상의 흐름에 빨려들어가는 시기다. 반면 사추기는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에 맞춰나가려 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오스트리아 빈은 사추기에 가장 어울리는 도시일 듯하다. 뉴욕, 파리, 로마, 런던 그 어디도 사추기와는 멀다. 계절로는 겨울의 빈이 사추기에 적격이다. 클래식 음악회와 19세기 스타일의 오페라는 기본이다. 중세 분위기의 마차행렬과 종소리를 앞세운 낡은 열차가 도시 전체를 순회한다. 잿빛 하늘에다 쓸쓸한 분위기로 가득 찬 공간이다. 18세기 합스부르크 대제국 당시의 초대형 바로크 건물과, 그 사이에 들어선 좁은 골목이 연출해내는 ‘비균형적 조화’도 신비하게 느껴진다. 어제의 유럽과 함께, 삶의 흐름을 재음미해 볼 수 있는 ‘마법의 무대’다. 불안하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에 넘치던 시간을 되살려주는 곳이 바로 빈이다.
   
   국립악기박물관(www.kmt.at)은 최근 빈을 찾은 가장 큰 이유다. 악기를 통해 음악가를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도시가 빈이라는 말을 베네치아 이탈리아인 친구로부터 들었다. 주기적으로 찾은 도시지만 그동안 악기박물관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빈은 악기 제조 도시로도 유명하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말러로 이어지는 음악가들이 빈에서 활동한 이유 중 하나가 빈산(産) 악기에 있다. 정밀기계를 대하듯, 예술을 넘어선 과학으로 악기를 주목한 나라가 게르만계 오스트리아다. 감정의 이탈리아, 이성의 빈 음악인 셈이다. 악기 제조에 관한 빈만의 노하우가 없었다면 천재음악가들의 출현도 없었을지 모른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악기박물관은 ‘항상’ 한산하다. 전체 길이 100m는 됨 직한 공간에, 필자를 포함해 관람객 두 명이 전부다. 악기박물관에 들어서는 순간 DNA 깊숙이 새겨진 인간의 본능이 되살아난다. 나무 냄새다. 자연의 냄새는 인간의 본능을 재생시켜주는 최고의 자극제다. 박물관 바닥이 목재인 데다, 악기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무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울리는, 목재 바닥에서의 소리가 오감 전체를 파고든다.
   
   악기박물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Johann Georg Leopold Mozart)의 흔적이다. 이탈리아 친구를 통해, 레오폴드가 평생 사용했던 바이올린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차르트가 직접 사용하고 연주했던 악기들도 있지만, 자식이 어릴 때 들었던 아버지의 악기가 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필자의 아버지 역시 음악가였다. 요즘은 ‘뮤지션 엔터테이너’로 불리지만, 20세기 때는 ‘딴따라’나 ‘풍각쟁이’로 통하던 직업이다. 클래식과 무관한 전자기타가 주업이었다. 모두에게 오락수단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필자에게는 전혀 다르게 와닿는 악기다. 초·중·고·대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준 ‘밥줄’이 아버지의 전자기타였다. 레오폴드의 바이올린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와 가족 전부를 먹여살린 ‘생존 무기’였을 것이다. 예술을 논하기 앞서, 의식주를 해결해준 바이올린이 있었기에 천재 모차르트가 탄생할 수 있었다.
   
▲ 빈 국립악기박물관에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 photo 유민호

▲ 국립악기박물관에서 판매 중인 모차르트 책자.

   모차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
   
   갤러리 13호가 모차르트 관련 악기 전시장이다. 흥미롭게도 입구 쪽에 눈에 익은 인물화들이 들어서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들이다. 천재 모차르트가 음악 순회를 통해 한 번쯤 만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16명 자식 중 11번째 딸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정략결혼한 인물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후 남편과 함께 길로틴으로 처형된 비극의 여인이다. 앳된 10대 모습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초상화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푸른 드레스와 배경의 붉은 커튼으로 장식된 품격 높은 모습이다.
   
   갤러리 13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선 이유는 1762년 벌어진 음악회 때문이다. 여섯 살 천재 모차르트가 쇤브룬궁전에서 연주회를 벌일 당시, 두 사람이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할까, 모차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출생연도는 똑같이 1756년이다. 같은 또래 어린이가 벌인 피아노 연주회에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렀고, 함께 피아노도 치면서 놀았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는 점도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란 근거 중 하나다. 근친상간은 프랑스 혁명군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한 명분이다. 황태자의 아들과 성관계를 가진 마녀로 몰아세워 여왕의 목을 잘랐다. 1793년 10월 16일로, 당시 37세이다. 모차르트는 이보다 2년 정도 앞선 1791년 12월 5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갤러리 13호에는 모차르트 신자라면 모두가 감동할 피아노 3대가 들어서 있다. 음향 구조 면에서 열악한 건반악기지만,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했거나 소유했던 회사의 제품들이다. 18세기 중엽 피아노는 보통 사람들이 소유하기 어려운, 금수저 사치품에 속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돈과 무관한 흙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자식교육을 위해 금수저 전용 피아노를 장만했다. 조기 천재교육 덕분만이 아니라, 비싼 피아노를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결단’이 천재음악가 탄생의 출발점이었다. 회계전문가로 일하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종이를 접할 수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상황과 비슷하다. 다빈치가 활동한 15세기 중반에는 종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가정이 드물었다. 모차르트가 사용했다는 피아노를 자세히 살펴봤다. 건반 하나하나의 두께가 얇다. 건반 깊이가 현대 피아노의 절반 정도에 그칠 듯하다. 연주 스피드가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피아노 천재 모차르트 작품들이, 기존의 느린 바로크 음악과 구별되는 이유일 듯하다.
   
   레오폴드의 바이올린은 베토벤 전시관으로 이어지는 갤러리 14호 입구에 ‘독립적으로’ 전시돼 있다. 레오폴드의 평생 손때가 묻은 듯 전체적으로 검다. 첫눈에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악기지만, 필자에게는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흙수저 가장의 땀이 밴, 밥벌이 도구로서의 바이올린이다. 18세기 당시 음악가는 악기 하나만이 아닌, 악기 전반에 능숙한 음악 장인(Artizano)들이었다. 모차르트가 그러했듯이, 레오폴드도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러나 주된 악기는 바이올린이었다. 잘츠부르크 궁중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호른과 트럼펫을 위한 교향곡이나 협주곡도 작곡했지만, 주된 영역은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 교습법에 관한 그의 책은 당시 유럽 각국어로 번역됐던 획기적인 고전으로 평가된다. 레오폴드의 바이올린은 오스트리아산이다. 레오폴드가 자식 앞에서 연주를 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18세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음악=금수저 별천지 세계’로 통했다. 악기는커녕 연주회에 갈 수 있는 돈이나 지식을 갖춘 사람조차 극소수였다.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극이 됐을까?
   
▲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쓰던 바이올린.

   모차르트 부자의 불화
   
   20대에 접어든 모차르트와 아버지 레오폴드와의 불화는 너무도 잘 알려진 얘기다. 잘츠부르크 궁중악단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하고, 줄곧 반대하던 여관집 딸 콘스탄체(Constanze)와의 결혼을 통해 부자간 관계가 단절된다. 현실에 집착하는 ‘꼰대’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천재 자식과의 세대 차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다. 부자관계를 떠난 각각의 성장배경이다. 모차르트는 학교를 간 적이 없다. 음악 천재로, 여섯 살 때부터 궁중이나 고급연회장을 오가며 돈 버는 일에 나선 불쌍한 인생이다. 레오폴드는 다르다. 원래 대학에서 철학학위를 받은 지식인으로 음악을 전문으로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철학·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음악에 빠졌고, 무급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로 데뷔했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에 통달하면서 음악으로 흘러간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식·견문·지혜라는 측면에서 모차르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거인이 아버지 레오폴드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약한 부분은 있다. 모차르트는 레오폴드가 생각할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진 철저한 이단아였다. ‘근세적 사고’로 살아간 레오폴드와 달리 ‘근대적 사고’로 음악에 전념한 인생이 모차르트였다. 서양사에서 유럽사는 크게 다섯 범주로 나눠진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 그리고 현대다. 대략 근세는 15세기 르네상스, 근대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부터 시작된다. 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다. 모차르트 부자가 살던 시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졌던 30년 종교전쟁이 끝난 뒤다. 국민·주권·시민국가가 등장한 근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눈과 머리는 아직 근세에 머물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근세와 근대는 예술의 의미를 180도 다르게 만든 분기선이다. 간단히 말해 근세는 주문형 예술이다. 주로 교회나 왕, 그리고 왕 주변 인물들의 요구에 맞추는 ‘노동’이 예술이었다. 수요자 중심의 예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조차도 그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는 어떨까? 최소한의 요구에 맞추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먼저다. 100% 실현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작품을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공급자 중심의 예술인 셈이다. 모차르트 부자를 보면 고용인이나 하수인으로서의 레오폴드와 자유인 창조자로서의 모차르트로 구별된다. 모차르트 역시 초기에는 수요자 뜻에 맞춘 작품에 주력했다. 그러나 말기의 모차르트 작품은 다르다. 자신만의 색깔에 기초한 음악을 했다. 숨지기 70여일 전에 초연된 오페라 ‘마술피리(Magic Flute)’에서 보듯 독창적 스타일의 작품이 주류다. 철학·신학에 정통한 리버럴아티스트 아버지를 뒀지만, 시대를 앞서간 ‘진짜 예술가’는 무학(無學)의 아들 모차르트였다. 레오폴드는 1787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모차르트는 4년 뒤 아버지를 뒤따른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아버지 생존기의 모차르트는 사춘기 청년으로 느껴진다. 작품의 대부분이 어두운 단조가 아닌 밝고 힘찬 장조다. 그러나 레오폴드가 사라지자 모차르트는 한순간 사추기 성인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가을은 너무도 짧았다. 겨울을 상징하는 단조음악 레퀴엠(장송곡)이 너무도 일찍 찾아왔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마지막 남긴 작품은 K-626 레퀴엠이다. 타인을 위한 곡이었지만, 정작 본인을 위한 레퀴엠으로 연주된다. 직접 찾아가 확인했지만, 빈의 산 미카엘(St. Michael)교회가 레퀴엠 초연무대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뜬 지 5일 뒤, 그를 위한 조의곡으로 연주됐다. 겨울바람을 느끼는 사추기 장년이라면 먼저 빈에 들를 것을 권한다. 모차르트와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삶의 깊이와 넓이를 확대해나갈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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