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테레사가 초대전에 걸릴 자신의 누드 작품 옆에 서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테레사가 초대전에 걸릴 자신의 누드 작품 옆에 서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70년 전, 강원도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 현대무용의 선구자 최승희(1911~1967)는 북한 전역을 다니며 발레 꿈나무들을 뽑았다. 강원도에서도 두 명이 선택됐다. 그중 한 명이 다섯 살 여자 아이였다. 토슈즈는 아이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어떤 무대인지도 모르고 공연에 동원돼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최승희는 아이의 끼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남한으로 넘어왔다. 아이의 가방엔 몰래 챙긴 토슈즈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토슈즈를 신을 기회는 영영 없었다. 엄마는 외동딸이 예술가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엄마는 토슈즈를 없애버리고 예술 쪽은 돌아보지도 못하게 했다.

‘최승희 키즈’였던 소녀는 올해 75세가 됐다. 엄마의 뜻과는 달리 평생 예술가로 살았다. 사진작가로 화가로 여전히 현역을 지키고 있는 김테레사이다. 여류작가로 이 나이까지 중단 없이 작업을 이어오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의 화업 40년을 돌아보는 초대전이 오는 2월 27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초대전의 주제는 ‘누드 앤드 댄스’. 발레리나에서 플라멩코 여인까지 40여점의 춤 그림에는 못다 이룬 춤에 대한 열정이 녹아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를 시작으로 60여점의 누드 그림은 인류 누드의 역사를 보여준다.

지난 2월 11일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김테레사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작은 체구에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작업실 곳곳에 전시에 나갈 작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 그중 한 작품인 발레 그림이 있었다. 백조가 된 발레리나가 막 깨어나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김테레사의 ‘발레’ 시리즈.
김테레사의 ‘발레’ 시리즈.

그는 1972년 외과의사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전시를 하고 자신의 에세이 책을 내고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오다 최근 몇 년 소식이 끊겼다. 그동안 “고관절 쪽 수술을 하고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힘든 재활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뉴욕깡패’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배짱 두둑한 그이지만 “오랜만의 전시가 겁이 난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재활을 이겨내고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전시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세계적 거장들의 누드 작품을 본 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누드화가 어떤 것인지를 한국 여자가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을 냈다는 그는 “벌거벗은 것과 누드화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공개한 누드 작품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사진 공모전에 컬러시대를 열다

누드 도전장처럼 그의 등장은 늘 파격이었다. 그는 화가 이전에 사진작가였다. 1968·1969년 ‘동아 사진 콘테스트’에서 2년 연속 특선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가 대학원생 때였다. 컬러사진으로는 최초의 수상으로 무명의 여학생이 일으킨 파란이었다. 일찍 결혼한 그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남편 김승원씨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했다. 뉴욕 예술 명문인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 미술전공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했다. “미대 전공자도 떨어지는 마당에 미술교육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프랫 입학 후 에피소드이다. 드로잉 수업은 공포였다. 모델이 포즈를 바꿀 때마다 동기들은 능숙하게 스케치를 하는데 그는 해본 적이 없으니 한 장도 그릴 수가 없었다. 한 달을 도망다니다 교수 손에 끌려왔다. 그 순간 카메라가 떠올랐다. 사진을 찍듯 순간을 포착해 머릿속에서 재구성하고, 그 형태를 재빨리 선으로 옮겼다. 30초마다 움직이는 모델을 따라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갑자기 주변이 고요했다. 교수, 학생들이 전부 그의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교수는 비싼 스케치북을 들고 오더니 연습 드로잉용 신문지를 치우고 그의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의 드로잉을 낭비하지 마.”

그는 몰입형이다. 사진을 배울 때는 엄지 지문이 닳도록 셔터 레버를 당겼다. 그림을 그릴 때는 한 가지 주제에 매달렸다. 특히 움직이는 대상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맨해튼 서커스 공연장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그려댄 피에로 시리즈와 춤, 말, 투우 그림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한밤중에도 구상이 떠오르면 차를 몰아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아침에 집에서는 그를 찾아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진 공모전에서 컬러 시대를 열었던 그는 그림에서도 색을 겁 없이 사용했다. 국내에서 미술교육을 안 받은 탓에 자기만의 색깔을 지켰을 수도 있다. 그가 상형문자 같은 화려한 원색의 추상 수채화를 들고 1980년 국내 첫 전시회를 할 때는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흑백 시대였다. 컬러를 터부시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이는 부끄럽게 저런 그림을 어떻게 걸어놓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컬러TV도 나오고 그림들도 과감해졌다.” 어두운 화단에 색을 선물한 셈이다.

그를 화가로 국내에 소개한 사람은 이경성(1919~2009)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화가 탐방을 왔다가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이 전 관장은 “비구상 수채화 작품은 처음이다”라면서 그의 작품을 한국으로 가져와 전시를 주선했다. 사진작가로 떠나 화가로 돌아온 그는 미술계에 화제였다. 이후 이어진 전시마다 “테레사의 컬러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소문이 나면서 컬렉터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나쁜 아내, 나쁜 엄마”

카메라도 놓지 않았다. 뉴욕에 건너간 이후 사진 영역이 넓어졌다. 1975년부터 ‘워싱턴 스퀘어’의 사람들을 찍기 시작해 2010년까지 이어진 작업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워싱턴 스퀘어, 그때 그리고 그 후’(열화당)라는 사진집도 나왔다. 워싱턴 스퀘어에 죽치고 앉아 작업한 그의 사진들은 광장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광장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사진은 비극의 전후를 아프게 보여준다. 2012년 뉴욕 이튼 코헨 파인아트 화랑에서 열린 사진전은 뉴욕 시민들에게는 특별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이 자신이고 이웃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워싱턴 스퀘어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무명의 예술가는 유명인이 되어 찾아와 자신이 찍힌 사진을 비싸게 사가기도 했다.

결혼 이후 여성들의 경력 단절은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어떻게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물어보니 “나는 나쁜 아내, 나쁜 엄마”라는 답이 돌아왔다. “에고가 강해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라는 설명이었다. 국내 대학 교수직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5년여 이어가다 “작업에 전념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뒀다. 남편의 외조도 큰 힘이었다. 냉정한 비평가인 동시에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그의 기억에 남은 장면 하나이다.

“작업을 시작하면 끼니도 잊고 밤낮을 잊고 몰두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이었는데 남편이 오더니 혹평을 했다. 너무 화가 나 페인팅나이프로 캔버스를 확 찢고 나와버렸다. 차를 몰다가 화를 식힌 후 돌아가보니 남편이 찢어진 그림을 외과수술 하듯 꿰매고 덧칠을 해서 수술을 해놨더라. 그러더니 손을 잡고 맨해튼에 있는 큰 화방에 가서 비싼 물감을 잔뜩 사주더라.”

자신의 피가 이끄는 대로 거침없이 살았던 그는 건강 탓에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다. 작품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작업에 대한 욕심이 여전한 그에게는 혹독한 벌이었다. 살기 위해 밥 수저를 들다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누워서 허공에 대고 그림을 그리고 지우면서 힘든 시간을 견뎠다. 종이에 자신의 마음들을 끄적이다 보니 노래 가사였다. 작곡에 도전했다. 이론 선생님을 찾아 7개월 동안 작곡을 배웠다. 50~60대 중년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슬픈 노래’가, 문득 인생이 무대 위의 피에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삐에로’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쌓인 곡이 20여곡에 이른다. 그 노래들에 그림을 붙여 ‘화가의 노래’라는 악곡집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 오프닝에서 재즈보컬 양혜정이 그의 노래를 부른다. 사진가, 화가에 이어 작곡가로도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는 교수 시절 강의 시간에 학기가 끝날 때면 의식처럼 치르던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교본이었던 데생용 인물 석고상인 ‘아그리파’를 학생들에게 망치로 신나게 부수게 했다. 고정관념을 깨고 상상의 세계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의 영혼이 지금껏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가 앉아 있는 등 뒤로 말이 질주하는 그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 말과 그가 겹쳐 보였다. 그는 조금 더 몸이 회복되면 골프도 다시 도전해보겠다고 했다.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와이 낫(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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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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