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수상시장. 베네치아에는 신선한 로컬푸드를 파는 로컬마켓이 곳곳에서 열린다. 20유로어치만 사면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 ⓒphoto 셔터스톡
베네치아의 수상시장. 베네치아에는 신선한 로컬푸드를 파는 로컬마켓이 곳곳에서 열린다. 20유로어치만 사면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 ⓒphoto 셔터스톡

매년 겨울은 베네치아다. 한국의 여행족들이 관심을 갖는 해외장기 체류지 중 나에게는 베네치아만 한 도시가 없다. 연(緣)을 맺은 지 10년이 넘었다. 제2의 고향이라고나 할까. 유럽을 떠돌 때 주변 지역이나 국가를 이어주는 허브(Hub)가 베네치아다. 1년에 최하 3개월 정도는 머문다. 베네치아에 갈 때마다 머무는 집 주소를 넣은 명함도 따로 갖고 있다.

내가 베네치아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일본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에서 시작된다. 정확히 25년 전인 1994년 여름, 일본어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을 때 읽은 책이 시오노 나나미의 베네치아 관련 수필이다. 당시 읽었던 글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중요 단어들로 이어진 의미 덩어리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꽂혀 있다. “희미한 등불에 비친 너의 그림자. 골목 벽을 타고 울려퍼지는 너의 발자국 소리. 미로를 헤매는 동안 접하게 될 우주 속의 고독. 베네치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의 가치이자 의미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는데 베네치아에 중독된 출발점이었다.

베네치아를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동반자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자아 발견, 나아가 자아 실현이 가능한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발견이나 실현이라 말하면 뭔가 거창하고 철학적으로 들릴 듯하지만 나의 기준은 다르다. 사소하고도 구체적이며 간단하다. 일상적인 하루를 음미하고 반성하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 여기고, 만났던 순간순간을 기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건강유지와 함께 내일의 소망에 대한 확신, 신(神)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자세 등등이 자아 발견이나 실현의 주된 내용들이라고 생각한다. 방향도 없이 둥둥 떠내려가는 허망한 삶이 아니다. 인생의 의미를 하나씩 되새기며 감사하고 즐기는 일상이다. ‘글로벌·국가·민족·우리’를 외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충실한 구체적 삶이 있는 곳. 이런 곳이 자아 발견이나 실현이 가능한 곳인데 나에게는 베네치아가 대표적이다. 물론 함께 나눌 사람이 있으면 더 좋다.

시오노 나나미가 맺어준 베네치아와의 인연

시간이 흐를수록 느끼지만 입이나 머리가 아니라 발과 가슴으로 살아가는 삶에 주목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베네치아 골목에서 접한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는 자아 발견이나 실현의 출발점이다. 일상에 쫓기는 번잡한 서울에서 스스로의 그림자, 발자국 소리, 우주 속의 나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반성하고 기억하고 겸허하게 살아갈 만한 시간 여유가 없는 삶이 대부분이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자. 일상 속에서 자아 발견이나 실현에 대한 답을 한 번이라도 구해본 적이 있는가. 인증 셀카를 위한 디지털 여행이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아날로그 여행 최적지가 베네치아다.

낯선 도시에서 장기체류를 하려면 꼼꼼한 계획과 자세가 필요하다. 무작정 가서 부딪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1년 중 6개월 이상을 해외여행에 투자하고 있다. 이는 21세기 들어 거의 정례화되고 있다. 부자니까 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정반대다. 오히려 돈과 무관하기에 여행에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다. 아파트 값이 오르든 내리든, 주식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무관하다. 명품 브랜드 가방 두 개를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고 하지만 5년째 사용 중인 1000엔짜리 가방 하나면 충분하다. 일본의 100엔숍에서 산 허름한 가방과 함께 해외를 떠돌고 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복잡해질수록 원론적이고도 간단한 세계관이 필요해진다. 결론은 ‘인생=여행’이다. 그 같은 생각은 이미 성인(聖人)들을 통해 증명됐다. 여행은 예수나 마호메트, 부처의 공통분모다. 목적지도 없는 방랑생활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전달했고, 결국은 모두 고향 밖에서 객사했다. 무일푼, 홈리스란 점도 공통점이다. 무례한 비교일 수 있겠지만, 성인의 일상을 닮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의 원점이라 믿고 있다.

장기체류 해외여행을 하려면 의식주란 측면에서 남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머리는 하늘로 향하겠지만, 발은 땅에 붙어 있어야 한다.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나의 베네치아 체험에 바탕한 장기체류 노하우를 전한다. 먼저 의식주에 앞서 ‘언제 얼마간 머물 것인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붐비지 않고, 비싸지 않고, 조용하게 머물 수 있는 시기를 찾아야 한다. 유럽의 경우 겨울이 정답이다. 베네치아 역시 1개월 이상 장기체류를 원한다면 겨울을 권한다. 구체적으로는 11월부터 2월까지가 좋다. 길어야 3개월 이내가 좋다. 길어지면 호기심이 줄어들고 타성이 생긴다. 유럽인 대부분이 겨울에는 동면에 들어간다. 추운 날씨 탓도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가족들 모임 때문에 여행에서 멀어진다. 겨울의 베네치아는 춥다. 해수면이 높아지는 아쿠아 알타(Aqua Alta)도 11월부터 본격화된다. 낮의 산마르코광장 주변만 붐빌 뿐 다른 곳은 한산하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5시 이후 거의 모든 지역이 ‘유령도시’로 변해간다. 베네치아 여행의 백미는 보트다. 한 달에 38유로만 지불하면 베네치아 주변 모든 섬을 무한정 왕래할 수 있다. 보트를 타고 베네치아 주변 섬을 전부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한 달 정도가 필요하다.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다. 한 달에 38유로만 지불하면 주변 섬을 무한정 왕래할 수 있는 보트를 탈 수 있다. ⓒphoto 유민호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다. 한 달에 38유로만 지불하면 주변 섬을 무한정 왕래할 수 있는 보트를 탈 수 있다. ⓒphoto 유민호

오페라 티켓 서울의 10분의 1 가격

옷은 청바지와 코트 차림이면 된다. 속옷, 양말도 현지에서 사면 된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 덕분에 별로 비싸지 않다. 이탈리아 서민의 대부분은 10유로 미만의 저가 중국산, 아프리카산 제품으로 살아간다. 비싼 메이드 인 이탈리아는 외국인을 위한 고가품일 뿐이다. 큰 가방을 들고 가는 것보다 신발 심지어 오리털 외투도 현지에서 사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남성은 정장, 여성은 이브닝드레스를 하나쯤 준비하길 권한다. 12월의 이벤트인 ‘70% 바겐세일’ 기간을 이용해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제품을 구입해도 좋다. 오페라 연주회나 음악회 같은, 베네치아에서만의 특별한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정장이 필요하다. 매년 겨울 정명훈이 지휘하는 오페라 티켓의 경우 서울 가격의 10분의 1 정도에 즐길 수 있다. 흙수저라 해도 베네치아에서는 ‘잠시’ 금수저로 변신할 수 있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은 장기체류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거주지는 호텔이 아니라 민박이 기본이다. 베네치아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은데 이곳의 숙박료는 베네치아 도심의 거의 절반 가격이다. 필자의 경우 리도섬이 겨울의 주거지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의 촬영 현장으로, 중세 때는 성지 이스라엘로 떠나는 십자군의 출발지였던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옆에 나란히 앉는 것보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 좋다. 베네치아를 사랑하기에 반대편에서 조망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필자가 매년 머무는 리도 민박집의 경우 베네치아는 물론 이탈리아 곳곳으로 향하는 길라잡이와 같은 곳이다. 오래 맺은 연으로 인해, 민박집 가족 모두와 마음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유럽 여행에 필요한 옷·신발·책들을 보관하는 ‘창고’로도 활용하고 있다. 요컨대 한 번이 아니라 평생 사용할 민박처를 발굴해야 한다. 숙박비는 시기, 체류기간에 따라 달라지는데 2월 베네치아 카니발 시즌에는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뛴다. 민박을 한 달 이상 장기 계약할 경우 대략 2명 기준 1박에 35유로 정도다.

먹는 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24시간 요리를 할 수 있는 민박집을 찾아야 한다. 돈 때문만이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이라도 몇 번만 먹으면 질리게 된다. 스스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맛만이 아니라 시간 엄수와 건강, 현지화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요리도구는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이 좋다. 기본적으로 칼, 프라이팬, 냄비만 있으면 된다. 리도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매주 주기적으로 로컬마켓이 열린다. 리도의 경우 매주 화·금요일 두 번 열린다. 이른바 ‘제로 킬로미터 메르카토(Zero-㎞ Mercato)’다.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팔리는 채소, 고기, 와인, 치즈가 리도 주변 로컬푸드란 의미다. 보통 아침 8시부터 정오까지 문을 연다.

세상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지만 현지 상황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곳으로 로컬마켓만 한 공간도 없다. 리도 주민 전부가 모이는 작은 축제라 볼 수 있다. 바다에 접한 리도의 로컬마켓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무대이기도 하다. 뒷배경으로 알프스 만년설과 베네치아 도심 풍경이 들어서 있다. 치즈, 우유, 채소, 꽃, 파스타, 소고기, 닭고기 전부 구입해도 20유로가 넘지 않는다. 와인의 경우 베네통 지역 특산 메를로(Merlot) 6리터짜리가 8유로 정도다. 베네치아 현지인들은 겨울에 대부분 냉장고 없이 생활한다. 와인, 고기, 채소, 달걀도 부엌 창문 밖에 보관한 채 즐길 수 있다. 민박집 자전거를 타고 장보기에 나서는 데 20유로 정도 쓰면 1주일 내내 먹고도 남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후 500주년 행사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단기와 장기여행을 가르는 분기점이다. 아시아 장기체류의 경우 골프나 트레킹이 현지 생활의 중심이 될 듯하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외면보다 내면의 성숙이 유럽 장기여행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매일 헬스클럽에 가서 몸을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의 경우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즉시 한 달 60유로를 주고 헬스클럽에 등록한다. 하루 3유로짜리 커뮤니티 수영장에도 간다. 낯선 도시에서도 운동을 하면 규칙적인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정신적 성숙이다. 간단히 말해 공부다. 베네치아의 경우 배우고 익힐 연구 대상이 무한하다. 종교·예술·역사·문화·문명이란 차원에서 근대화 이전의 뉴욕에 해당하는 곳이 베네치아다. 여행에 나서기 전, 베네치아에서만 접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 공부하는 것이 좋다. 필자의 경우 베네치아에 흩어진 수많은 교회가 매년 새롭게 공부하는 테마 중 하나다. 베네치아는 다리와 교회로 채워진 도시다. 전부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교회 창문 하나만 봐도 천차만별이다. 베네치아는 기독교 신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다. 건축·조각·미술로 이어지는 인류사 모두가 배어 있는 곳이다. 신과 교회로 가득 찬 도시의 이면에 카사노바와 가면 카니발이 횡행한 곳이다. 공부하고 익히는 만큼 보이고 느낄 수 있다.

2019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후(死後) 500주년이 되는 해다. 베네치아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다빈치 사후 500주년 기념의 하이라이트 도시다. 다빈치가 남긴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이 주인공이다. 팔과 다리를 벌린 채 우주와의 조화, 합일점을 구하는 인체 비례도인 ‘비트루비안 맨’을 곳곳에서 접했을 것이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갤러리(gallerieaccademia.it)에 보관된 세계적인 작품으로, 오는 4월 17일부터 현지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공공전시를 잘 하지 않는 작품으로, 전 세계 다빈치 팬들이 몰려들 전망이다. 다빈치는 피렌체 출신이다. 평생 베네치아와는 무관한 인물이다. 그러나 평화와 균형의 상징인 다빈치의 ‘비트루비안 맨’은 베네치아에 보관돼 있다. 우연이 아닌 필연적 상황일지 모른다. 우주를 떠도는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최적의 공간이 바로 베네치아라는 뜻 아니겠는가. 돌팔이 철학론일 듯하지만 ‘자아 발견·실현=조화·평화·안정’이라고 믿는다. 다녀온 지 두 달도 안 됐지만, 8개월 뒤 베네치아 여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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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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