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주간이다. 저절로 종교의 의미를 떠올려보게 된다.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신(神)이 없는 삶, 즉 종교 없는 삶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인간의 이성을 흔들어 깨운 근대계몽운동도 종교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종교는 이런저런 도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굳건한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지난 세기 후반부터 종교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만 보더라도, 최근 20~30년 동안 탈(脫)종교 현상이 가속화되어, 현재는 무종교인이 거의 30%에 육박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히 늘던 종교인구가 금세기 들어 감소세로 돌아섰다. 2015년 통계를 보면 종교 없는 사람이 56%에 달한다. 그것은 10년 전에 비해 무려 9%포인트나 증가한 수치다. 불과 10년 만에 수백만 명이 종교를 떠난 것이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되돌리기 어려워 서구사회든 우리 사회든 무종교인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종교가 도덕의 기준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도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종교 없는 삶의 독자적 성격을 탐색하려는 시도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필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Living the Secular Life·2014)이다.

저자는 개인적으로도 종교 없는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회학자다. 그는 각계각층의 무종교인들을 심층면접한 결과를 취합해 이 책을 썼다. 부제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New Answers to Old Questions)’이다. 실제로 이 책은 종교 없는 삶에 대한 ‘오래된’ 질문들을 제기하고, 무종교인의 입장에서 그것들 각각에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을 믿지 않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가. 신을 도덕성의 원천으로 삼으면,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한다. 이것은 도덕의 무책임한 아웃소싱이다. 반면 신을 믿지 않으면 도덕에 대해 스스로 숙고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더욱 세심하게 따져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물론 종교인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소통을 강조한다.)

종교에서 멀어지면 좋은 사회에서 멀어질까. 오늘날 가난하고 혼란스럽고 문제가 많은 나라일수록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다. 남미나 아프리카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부유하고 안정적이고 잘 돌아가는 나라일수록 종교적인 성향이 약하다. 유럽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종교가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종교와 좋은 사회의 관련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무종교인들이 (미국에서) 최근에 부쩍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기독교 보수단체와 정치세력(공화당 우파) 간의 동맹이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했다. 또한 가톨릭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 여성의 사회생활 참여 확대 등도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종교에 대한 회의적 의견이나 정보를 자유로이 접할 수 있다. 나아가 인터넷은 그 자체로 다양한 욕망을 제공하고 만족시켜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종교 없는 부모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오로지 신의 징벌을 토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한다. 이에 입각한 교육은 오히려 도덕적 발전을 가로막는다. 반면 종교 없는 부모들은 징벌이 아니라 공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접하는 방법을 더욱 진지하게 가르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을 위한 공동체가 가능할까. 그동안 종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 없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다양한 공동체 생활을 즐기고 있다. 특히 인터넷 발달로 공동체적 연결이 훨씬 용이해졌다. 실제로 최근에는 독특한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갖는 무종교인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종교 없이도 삶의 고난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종교가 주는 공동의 지지와 심리적 위안은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행운들을 신의 덕분으로 돌린다면, 불행한 일도 신의 탓이 된다. 반면 애초에 아예 신을 믿지 않으면 ‘믿음의 위기’도 겪지 않으며, 어떤 불행도 기꺼이 더 잘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사회적 유대, 합리적인 문제 해결, 확고한 자기 신뢰 등을 통해 고난을 더욱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신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믿는다. 이로 인해 현세는 상대화되기 일쑤다. 자칫 현세는 내세를 위한 전초기지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종교 없는 사람들에게 이 생은 유일한 생이며 따라서 그들은 이 생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죽음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저자에게 ‘있는 그대로’는 ‘종교 없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여러 부류다. 우선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가 있다. 또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모른다는 불가지론자도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는 적극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종교가 없는 상태일 뿐이다.

한편 무종교적 인본주의자라는 개념이 있다. 적극적으로 인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내면적 충만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실존이 아름다운 신비라고 여기는 경외주의자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외주의자임을 자처한다. 경외주의란 ‘실존에 대한 경이와 깊은 감사, 그리고 이 세상의 현실에 바탕을 두는’ 태도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 없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신 없는 종교’는 가능할까. 저자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은 종교의 기능에 주목한다. 기능 측면에서 ‘신 없는 종교’가 ‘신 있는 종교’보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종교를 단순히 기능적 합리성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노릇이다. 저자도 고민하듯이, 결국에는 종교 없는 삶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에 부딪힌다. 저자는 경외주의라는 대안을 제안한다. 관건은 그것이 확고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느냐 여부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종교 없는 삶은 여전히 무엇인가 ‘없는’ 삶이 되고 만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유달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근대계몽주의의 인본주의적 기획이다. 즉 삶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신념이다. 대표적인 것이 괴테의 ‘파우스트’다. 거기서 괴테는 ‘주님의 종’을 벗어나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인간상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인류는 당장이라도 신과 종교를 걷어차버릴 기세였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 후로도 여전히 종교의 끈을 놓지 못했다. 파우스트도 결국 죽어서는 천사에 의해 구원되는 존재로 묘사됐다. 하지만 지난 세기부터 종교 없는 삶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교 앞에서 다소 주저하던 계몽주의의 물결이 마침내 종교에 들이닥치기라도 한 듯하다. 이미 인간의 이성 역시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이런 대격변이 인류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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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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