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베나리아 궁전
토리노 베나리아 궁전

피렌체를 떠나 토리노로 간다고 하자 사람들이 “사업차 가는 것이냐”고 묻는다. 여행이 일의 일부이니 사업이 맞긴 하다. 과연 토리노는 뜨내기가 별로 없는 조용한 도시이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자동차 피아트와 알파 로메오, 란치아의 본사가 토리노에 있다. 그런 경제력과 알프스를 배경으로 2006년 동계올림픽도 치렀다. 월드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탈리아 유벤투스 축구팀에 온 뒤로 유벤투스와 토리노의 경기를 보러 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느는 추세라고 한다. 토리노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이탈리아는 여러 나라가 난립했다. 중앙에 교황령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나폴리 왕국이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토스카나는 피렌체가 중심이 된 공국이었고, 밀라노도 같은 지위였다.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베네치아는 공화국이었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북부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는데, 이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가 토리노였다.

토리노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궁전들이 널려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궁전을 갖고 있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가 부럽지 않을 만하다. 실제로 토리노 사람들은 베르사유나 쇤브룬과 같은 궁전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도심의 왕궁과 시 외곽의 베나리아 궁전, 스투피니지 사냥궁전 모두 그 못지않은 규모이기 때문이다.

궁전의 도시 토리노와 니체

토리노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은 6촌인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대공을 사르데냐 왕으로 만들면서 뒷날 통일 이탈리아의 초석을 놓은 외젠 공(1663~1736)이다. 유럽에는 외젠의 승리를 상징하는 두 개의 건축물이 있다. 빈의 벨베데레 궁전이 그중 하나로, 외젠이 의탁했던 합스부르크 황제가 오스만투르크와의 싸움에서 이긴 외젠에게 내린 상이다. 클림트의 ‘입맞춤’을 비롯한 분리파 화가들의 걸작을 소장한 명소이다. 다른 하나가 토리노 수페르가 언덕의 전승기념 성당이다. 남산 높이의 산 정상에 범상치 않은 돔이 보이는데 이곳에 오르면 병풍 같은 알프스를 뒤로하고 포강이 흐르는 토리노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성배 기사들의 순례 행렬이라도 만날 듯한 고즈넉한 산세를 자랑한다.

내가 이 도시를 찾은 이유이기도 하지만 토리노는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시내의 왕립극장은 푸치니가 ‘라보엠’을 초연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지난 기고에서 보았듯이 부활절 기간은 오페라가 쉬어가는 때이다. 다행히 내가 머무는 동안 이탈리아 공영방송(RAI)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하지만 오페라극장에서 멀지 않은 콘서트홀은 지금까지 내가 본 전 세계 공연장 중 가장 볼품없었다. 이곳이 이탈리아 최고의 라디오 교향악단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이탈리아 공영방송 교향악단은 현재 미국 출신 음악감독 제임스 콘론이 이끌고 있다. 나는 콘론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대신 숨은 걸작을 알리는 데 매진하는 지휘자다. 이날도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가운데 관현악과 ‘탄호이저’ 서곡,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을 연주했다. 시의적절한 음악 아닌가! 얼마 뒤 피렌체 5월 음악제 때는 마르티누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레스피기의 ‘보티첼리 삼부작’,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이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임을 음악으로 환기시킬 만한 선곡이다.

토리노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탈리아 공영방송(RAI)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토리노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탈리아 공영방송(RAI)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예술지상주의자의 최후

콘론은 ‘파르지팔’ 연주에 앞서 그리스도 수난 전야에 듣는 엄숙한 음악이니 박수를 삼가 달라고 청했다. 바그너 최후의 작품 ‘파르지팔’은 사악한 마법사로부터 불치의 상처를 입은 왕이 그리스도의 성혈(聖血)을 받은 성배(聖盃)의 힘으로 치유된다는 이야기이다. 마법사를 이기고 성배를 되찾아오는 사람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기사 파르지팔이다. 오페라 속에서 때 묻지 않은 파르지팔은 기사장에게 묻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멀리 왔네요?” 기사장은 “이곳은 시간이 곧 공간인 곳”이라고 답한다.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이날 오페라 파르지팔의 전 3막에서 흐르는 관현악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 데 50분이 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름한 공연장은 성배의 전당이 되었다. 사실 토리노 음악당은 거드름 피우는 허세꾼을 모을 것이 아니라면 굳이 다시 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음향에 별 문제가 없었다. 허름한 콘서트홀이었지만 그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딴판이었다.

이른바 ‘인생샷’을 찍으려는 물결로 몇 시간 줄을 서야 하는 피렌체와 로마의 유적지에 비하면, 토리노는 붐빌 게 없는 곳이다. 수페르가에 오르는 산악기차인 푸니쿨라도 손님이 차지 않았고, 나 말고 돔 전망대에 오른 다른 사람은 동유럽에서 온 할머니와 손녀뿐이었다. 만일 토리노 음악당이 여느 유럽 공연장이나 서울처럼 화려했더라면 나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예술을 과시와 겉치레의 도구로 삼는 것이야말로 가장 저급하고 볼썽사나운 일이다. 속물에 누구보다 환멸을 느낀 니체가 1889년 쓰러진 곳이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광장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니체는 그로부터 11년을 요양원에서 보내다가 쓸쓸히 최후를 맞는다.

다음 날, 니체가 쓰러진 토리노를 떠나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베네치아로 향했다. 운하를 지그재그로 연결하는 수상교통은 부활절 연휴 인파로 북새통이다. 다행히 내가 찾는 곳은 다른 사람들이 찾는 곳이 아니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이다. 휴가철이나 영화제가 열릴 때면 다르겠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토마스 만이 쓴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무대인 드뱅호텔 앞은 민들레 홀씨만 솜이불처럼 하얗게 쌓여 있다. 이 호텔은 오래도록 리모델링 중인 리도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토마스 만은 소설에서 크로아티아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당도하는 리도를 ‘베네치아의 정문’이라고 했다. 육로로 다리를 건너 본섬으로 들어가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뒷문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허세를 부리며 베네치아에 입성한 노작가는 10대 미소년에게 속절없이 이끌려 콜레라의 창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주위를 맴돌다가 죽음을 맞는다. 미(美)에 탐닉한 ‘예술지상주의자’의 최후라 할 만하다.

베네치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리도섬 대신 무라노섬을 관광의 우선순위에 놓는다. 아기자기한 유리 제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다. 본섬에서 무라노를 가기 전에 산 미켈레라는 섬이 있다. 땅이 부족한 베네치아에서 정방형으로 조성한 묘지섬이다. 이곳에 바그너의 뒤를 이은 총체예술의 완성자 세르게이 댜길레프, 또 그의 사단에서 시작해 20세기 음악을 지배한 러시아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묘가 있다. T. S. 엘리엇에게 ‘황무지’를 수정하도록 조언한 미국 시인 에스라 파운드 또한 여기에 묻혔다.

지난번 주간조선에 소개한 모리스 베자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댜길레프가 시작한 무용극을 뿌리로 한다. 평생 전염병을 두려워한 댜길레프는 소설 속 노작가처럼 베네치아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뒤 산 미켈레에 안장되었다. 반세기 뒤 스트라빈스키가 뉴욕의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미망인은 그의 유해를 소비에트 러시아로 돌려보내는 대신 댜길레프가 있는 베네치아로 데려왔다.

이날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산 미켈레 묘역에는 음악보다는 문학을 좀 더 사랑하는 러시아 부녀가 꽃다발을 들고 에즈라 파운드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무덤을 찾고 있었다. 댜길레프의 묘비에는 어느 무용가의 무덤에서 본 것보다 많은 토슈즈가 놓여 있었고, 멀지 않은 스트라빈스키 묘에도 뜻밖에 새로 놓인 장미가 많았다.

그리스도 수난일 저녁 베네치아 라페니체극장에서는 디에고 파솔리스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라페니체는 ‘불사조’라는 뜻이다. 그 이름 탓인지 1792년 문을 연 이래 세 차례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200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그 사이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스트라빈스키의 ‘난봉꾼의 행각’과 같은 걸작이 초연되었다.

토리노 수페르가 성당
토리노 수페르가 성당

파솔리스의 레퀴엠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레퀴엠’은 후대에 이 걸작을 완성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파솔리스 또한 기존의 여러 판본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법을 내놓았다. 빠른 템포와 급격한 셈여림 변화는 파솔리스의 장기이다. 그는 이런 자극적인 해석으로 모차르트와 그 이전 이탈리아 음악의 권위자가 되었다. 보통 1시간가량 걸리는 이 곡을 파솔리스는 45분 만에 끝냈기에 뭔가 좀 더 필요한 듯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집트의 왕, 타모스’ 가운데 한 장면과 성가곡 ‘오소서, 참된 성체시여’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드라마틱하게 마친 파솔리스는 수난일에 쏟아지는 박수가 겸연쩍었던지 한두 번의 커튼콜 뒤로 악보를 높이 치켜들며 이제 공연이 끝났음을 알린다. 공연이 끝나고 지휘자가 악보를 치켜드는 것은 모든 공을 음악에 돌리자는 제스처다. 최근 유행이 된 듯한데 드레스덴이나 베를린 공연장에서도 흔히 봤다.

오페라는 이탈리아가 종주국이다. 반면 교향곡은 독일에서 태어난 장르이다. 현실의 벽을 넘을 이상적인 음악이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19세기를 지나면서 독일은 오랜 변방에서 일약 유럽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또다시 유럽연합의 리더가 되었다. 음악사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독일식 교향악단 모델이 전 세계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이라는 대국에 현실의 벽을 넘을 교향곡이 아직도 필요할까. 반면 이탈리아의 국운은 고만고만하다. 로마제국은커녕 한 번도 르네상스시대의 문화 수준에 도달한 적이 없다. 현실의 벽을 넘을 이상적인 음악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독일과 여전히 오페라 유산을 깔고 앉은 이탈리아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다음 날, 안토니오 비발디가 버려진 소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오페라의 꿈을 키웠던 피에타 성당을 찾았다. 여기서는 저녁에 있을 ‘사계’ 공연 티켓을 팔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전 세계의 콘서트홀과 오페라극장은 관객이 찾지 않는 불모지이다. T. 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4월’과 같은 모습이다. 성배를 들고 나타나 클래식 음악의 갈증을 풀어줄 파르지팔을 기대한다. 어쩌면 사람들을 또 한 번 끌어모을 교향곡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여기 봐, 김치.” “저기가 맛집이래.” 산 마르코 광장에 넘쳐나는 한국말을 들으며 니체의 오열, 바그너와 댜길레프의 죽음, 토마스 만의 사망 선고 따위는 잠시 내려놓고 맛있는 와인과 해산물 파스타를 먹으러 간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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