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단오풍정’. 작자미상.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벽화. ⓒphoto 조정육
‘신(新)단오풍정’. 작자미상.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벽화. ⓒphoto 조정육

중국에는 곳곳에 길 없는 길이 많다.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곳에 만든 길, 그 길이 잔도(棧道)다. 잔도는 벼랑이나 낭떠러지처럼 사람들이 다니기 힘든 가파른 곳에 돌이나 나무를 박아 선반처럼 만든 길이다. 잔도는 진시황 때부터 국책사업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황산(黃山), 태산(太山), 장가계(張家界)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2014년에 중국 정부는 지상 300m 높이의 장가계 대협곡에 430m 길이의 유리잔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길다는 장가계의 유리잔도보다 촉잔도(蜀棧道)가 역사성이 더 깊다.

촉은 ‘삼국지’의 주인공 중 유비가 거점으로 삼았던 쓰촨성(四川省) 지역이다. 한(漢)나라가 무너져가던 시절에 위(魏)의 조조와 오(吳)의 손권 그리고 촉의 유비가 서로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는데 조조의 위나라는 세 나라 중 영토가 가장 넓어 황허강과 양쯔강 유역의 알토란 같은 땅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군사의 수도 촉나라보다 5배는 더 많았다. 그런 강성한 위나라가 손바닥만 한 촉나라를 쉽게 집어삼키지 못했다. 관중에서 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매우 험준했기 때문이다. 그 험한 고갯길에 촉나라는 검문(劍門)을 설치했고 그 덕분에 검문은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문을 열 수 없다’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길이가 100㎞가 넘는 대검산(大劍山)이 하필이면 검문이 세워진 고갯길에서 딱 끊어져 있어 칼처럼 생긴 두 산이 양쪽에서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이때부터 ‘촉도’는 험준한 길의 대명사가 되었고 세상살이의 험난함에도 비유된다.

촉도가 얼마나 험했던지 이태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촉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이여, 하늘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구나.’ 이태백뿐만 아니라 조선의 시인들도 ‘촉도’와 관련된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두루마리로 된 ‘촉잔도’를 그렸다.

촉도가 유명한 것은 검문 때문이지만 사람살이의 지난함과 지혜로움을 알게 해주는 것은 잔도다. 잔도는 유비의 ‘싱크탱크’인 제갈량이 중원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설치했다. 그는 검문 앞의 협곡과 강가에 진시황 때부터 있었던 낡은 잔도를 보수하고 수리해서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로 만들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촉나라 역시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역시 예지력이 뛰어난 제갈공명답다.

신발 벗겨지도록 하늘 높이 뛰어오르라

하아! 우리 시대의 여성이구나. 2017년 여름이었다. 전주에서 특강을 하고 숙박을 한 뒤 아침에 일어나 숙소 주변을 산책하는데 한국전통문화전당의 정원에 세워진 ‘신(新)단오풍정’이 눈에 들어왔다. 땅바닥에 담장처럼 세워진 벽화였다. 내 눈높이에서 그네를 뛰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붉은 태양이 벽화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햇살을 가르며 그네 탄 여인이 몸을 굴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세게 굴렸던지 그녀의 몸은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그네를 굴리며 온몸에 들어간 힘은 발끝까지 뻗쳐 색동고무신 한 짝이 발에서 벗겨져 공중으로 높이 솟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네 탄 여인과 물가에서 몸을 씻는 여인들이 석간주색의 그림틀을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만 행동해야 하는 제약과 한계를 이제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자신에게 가해진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통쾌했다. 마치 내 앞의 장애물을 그녀들이 뻥뻥 차고 밀어내는 것 같아서 속이 다 후련했다. 대리만족이라도 좋았다.

‘신(新)단오풍정’을 보고 있자니 조선 중기의 선비 이응희(李應禧)가 쓴 시 ‘그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좋은 명절이라 단오절에/ 버드나무 가에서 그네를 뛰네/ 바람 타고 푸른 허공에서 오고/ 해를 차고 푸른 하늘로 오르네’. 그네타기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중국의 기록인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우리 민족이 이미 삼국시대에 ‘5월이 되면 씨를 뿌리고 난 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춤과 노래로 세계인의 혼을 빼놓는 한류의 소프트파워가 괜히 이 땅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몇천 년 동안 손뼉 치며 발장단을 맞춘 ‘짬밥’에서 그런 내공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응희가 본 그네 뛰는 여인은 누구였을까.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新)단오풍정’의 여인에게 똑같이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신(新)단오풍정’의 여인에게 바친 헌화가처럼 보인다. 거침없이 바람을 타고 해를 차고 푸른 허공을 오르내릴 수 있는 여성. 그런 당찬 여인이 ‘신(新)단오풍정’ 속의 여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아쉽게도 벽화에는 따로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작가도 알 수 없었다. ‘신(新)단오풍정’이란 제목은 필자가 붙인 이름이다.

짐작하셨겠지만 ‘신(新)단오풍정’은 신윤복(申潤福·1758~1814년경)의 ‘단오풍정’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단오풍정’은 신윤복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다. 조선 초기의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은 단오일을 ‘날씨가 아름답고 청명하다’고 표현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이런 좋은 날에 방안에만 들어박혀 있다면 그것은 날씨에 대한 모독이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전부 야외로 나왔다.

신윤복은 아름답고 청명한 단오일의 한순간을 가뿐한 붓놀림으로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의 작품은 일단 단옷날의 세시풍속을 그렸다는 점에서 익숙할 뿐만 아니라, 기생이나 한량을 전문적으로 그린 신윤복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예술성이 높다. 어디 그뿐이랴.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 가채를 늘어뜨린 여인, 젖가슴을 드러낸 채 술병을 머리에 이고 오는 아낙 등 신윤복의 붓질이 아니었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내밀한 세계를 빠삭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은 그 유명세만큼 많은 패러디 작품이 탄생했다. 그 작품들은 신윤복의 인기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네뛰기의 콘텐츠가 상당히 풍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네뛰기는 답답한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최고의 스포츠였다. 조선의 여인들이 전 국가적으로 그네뛰기에 참여한 배경이다. 그 덕분에 고구마 줄기처럼 그네뛰기와 관련된 그림이 수두룩하다. 그 연장선상에 ‘신(新)단오풍정’이 있다. 그런데 같은 고구마 줄기에서 딸려 나온 그림이지만 지향하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그네 타는 여인이라는 소재는 가져오되 과거의 전통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단오풍정’. 신윤복. ‘혜원전신첩’. 18세기. 35.6×28.2㎝. 종이에 연한색. 간송미술관(국보 제135호)
‘단오풍정’. 신윤복. ‘혜원전신첩’. 18세기. 35.6×28.2㎝. 종이에 연한색. 간송미술관(국보 제135호)

설날과 추석만큼 중요한 명절 단오

단오는 음력 5월 5일이다. 단오는 다른 말로 단오절(端午節), 단양(端陽), 단양절(端陽節), 오월절(五月節), 중오(重午), 중오절(重午節·重五節), 천중일(天中日), 천중절(天中節),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고 한다. 순우리말로는 ‘수릿날’이다. 지금은 단오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원래는 한식, 설날,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할 만큼 중요한 날이다. 강릉 단오제, 영광 법성포 단오제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祈豊祭)로 지금도 계속되는 축제다.

단오는 양기가 가장 센 날이다. 음기가 가장 강한 날인 동지의 반대편에 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는 양력으로 6월 7일이 단오다. 시기적으로는 모내기를 끝냈으니 여유가 있고 더운 여름이 폭발하기 직전의 초여름이니 더위도 견딜 만하다. 한여름이 되면 농작물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농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를 뽑고,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논에 물을 대야 하고, 폭우에는 물꼬를 터야 하니 8월 한가위까지는 정신이 없다. 그 직전이 바로 단오다.

궁궐에서는 단오에 왕이 신하들에게 옷과 부채를 하사했다. 이렇게 여유롭고 좋은 계절에는 뭔가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정결하게 목욕재계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 마침 날도 좋으니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도 되겠다. 야외에서 머리를 감아도 찬기가 느껴지지 않는 날이 단오다. 며칠 전 비가 내린 계곡에는 창포로 정수해 ‘새벽배송’한 계곡물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부지런한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다. 특히 부스럼이나 피부병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유명 약수터에는 물맞이를 하러 온 남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금도 어지간한 목욕탕에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폭포탕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다. 물맞이의 전통이 남아 있는 증거다. 단옷날에는 창포를 삶아 창포탕(菖蒲湯)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창포탕으로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 하여 최고의 천연 샴푸로 여겼다.

창포는 창양(菖陽)이라고도 부르는데 중요한 약재로 쓰였다. 창포를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져 장수를 누린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해 창포로 담근 술인 창포주를 마셨고, 창포로 담근 김치인 창촉(菖歜)을 먹었다. 창포주 대신 약쑥으로 담근 술인 애료(艾醪)를 마시기도 했다. 복록(福祿)을 얻고 재액을 물리치고 싶은 바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창포 줄기를 비녀 삼아 머리에 꽂았고, 어깨나 팔에는 오채사(五綵絲)라는 오색실을 묶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였다. 오색실은 다른 말로 장명루(長命縷), 속명루(續命縷), 벽병증(辟兵繒)이라고 한다. 모두 다 장수를 발원하고 악귀나 병마를 물리치기 위한 명칭이다.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당시를 생각하면 그렇게나마 자식이 건강하기를 염원했던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 짐작된다. 대궐과 경대부의 집 문설주에는 복숭아나무 판자에 단사(丹砂)로 그린 붉은 부적 단부(丹符)를 붙였다. 일반 백성들의 문 위에도 창포를 문에 꽂아두거나 쑥으로 만든 호랑이 모양의 장식물인 애호(艾虎)를 매달아두었다. 애호 대신 애옹(艾翁)을 걸어둔 사람도 있었다. 애옹은 쑥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이라서 애인(艾人)이라고도 했다. 모두 다 재액을 방지하고 사기를 물리치기 위한 주술이었다.

명절날에 먹는 것이 빠질 수 없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맛집으로 소문난 떡집에 가서 수리취떡을 먹는다. 수리취떡은 쑥잎을 넣어 만든 떡으로 수레바퀴 모양으로 생겼다. 단옷날을 수릿날이라고 하는 이유도 수리취떡을 먹기 때문이다. 떡을 먹다 체하면 약도 없는 법이다. 수리취떡에 곁들여 앵두화채를 먹으면 체할 일이 없다. 갈증이 많이 날 때는 기침에 좋은 제호탕을 달여 마셔도 좋다. 그리고 기운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씨름 구경을 갈 것이다. 이리저리 놀이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단옷날의 하루가 저문다. 내일부터 한가위까지는 ‘쌔빠지게’ 고생할 일만 남았다.

길 없는 길에 길을 만들며 가라

다시 ‘신(新)단오풍정’으로 돌아가보자.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을 지탱해줄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 어떤 ‘백그라운드’도 없고 오로지 허공만이 있을 뿐이다. 편안함을 거부하고 위험 속으로 몸을 던졌으니 그녀 앞에는 탄탄대로 대신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자갈밭이 펼쳐질 것이다. 그래도 감수해야 한다. 길 없는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시작한 그네뛰기가 아닌가. 극세척도(克世拓道)의 마음으로 길을 만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내 앞에 길이 생길 것이다.

그 길이 잔도다. 길을 만들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원래부터 없던 길이니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실패가 두려우면 신윤복 ‘단오풍정’의 여인처럼 다소곳하게 정해진 틀 안에서 그네를 타면 된다.

그런데 ‘신(新)단오풍정’의 그네 탄 여인은 이미 몸을 날렸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저 나아가야 한다. 설핏 두려움이 어리는 듯하지만 다부진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의 길을 향해 뛰어든 선각자의 각오를 읽을 수 있다. 다행이다. 그녀 또한 제갈공명이 잔도를 만들어 중원으로 나아갔듯 자신의 세계로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잔도를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어찌 그네 타는 여인뿐이겠는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모두는 잔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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