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 ‘유몽유도원’. 2016년. 캔버스에 오일. 209.5×444㎝
민정기. ‘유몽유도원’. 2016년. 캔버스에 오일. 209.5×444㎝

중국의 진(晋)나라 태원(太元·376~396) 연간의 일이었다. 무릉(武陵)이라는 고을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강에서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 길을 잃었다. 강물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강 양쪽 언덕을 끼고 수백 보에 달하는 복숭아숲이 나왔다. 복숭아숲은 우뚝 솟은 산 앞에서 끝났다. 돌문처럼 생긴 산자락에는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작은 동굴이 보였는데 입구가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매우 좁았다. 입구를 지나 다시 수십 보를 걸어 들어가자 갑자기 앞이 확 트이면서 넓어지더니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가 나타났다.

동네 안에는 기름진 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통해 있었으며 간간이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길 가운데를 오가며 씨를 뿌리거나 밭을 갈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기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면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물었다. 어부가 대답을 해주자 곧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차리고 닭을 잡아 음식을 내어왔다. 낯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은 곧 마을 전체로 퍼졌고, 모두들 찾아와서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 선조들이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처자와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는데, 이후로 다시는 밖에 나가지 않아 바깥세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물었는데, 진나라 이후 한(漢)나라를 거쳐 위진(魏晉)시대에 이른 것도 알지 못했다.

어부가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니 모두들 놀라워하며 한탄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교대로 돌아가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어부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바깥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곳에 대한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심정이다. 밖으로 나온 어부는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길을 따라 지나는 곳마다 표시를 해두었다. 어부는 군의 태수를 찾아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다. 태수는 곧 사람을 시켜 어부를 따라가도록 했는데, 표시해둔 대로 찾아갔지만 도원은 찾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말았다. 남양(南陽) 땅에 유자기(劉子驥)라는 고상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역시 이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하며 찾아갔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길을 묻는 자가 없었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동진(東晉)의 은둔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을까마는 도화원에 대한 얘기는 아주 중독성이 강해 사람들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도화원에 대한 환상을 잊지 못했다. ‘도화원기’가 지어진 지 1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얘기에 혹해서 붓을 든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전설 속 도화원을 찾았다

드디어 나올 것이 나왔구나. 민정기의 ‘유몽유도원’을 처음 봤을 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다. 도연명의 ‘도화원기’가 지어진 지 1600여년이 지난 2016년에 여기 한국에서 도화원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도화원기’의 어부가 두 번 다시 찾지 못하고 전설로만 남아 있던 도화원을 드디어 민정기라는 작가가 한국의 부암동에서 찾은 것이다.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긍정이 없으면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몽유도원을 유람하다’란 뜻의 ‘유몽유도원’은 상당히 큰 작품이다. 그 큰 작품의 화면은 기암괴석과 도원이 거의 전체 면적을 차지한다. 사람들이 사는 빌라와 낡은 기와집과 주택은 산자락 끝을 겨우 비집고 들어온 듯 화면 하단에 배치되어 있다. 어부가 도원을 나온 이래 그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신비스러운 공간이 바로 우리 집 뒷산에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오른쪽 화면 중간에 복숭아꽃이 피어 있다. 그러나 복숭아꽃의 잔영은 그 범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에 붉은색과 노란색, 주황색과 연두색이 뒤섞여 있어 산 전체가 복숭아꽃빛에 물든 것 같다. 아니 하늘마저 꽃물이 들었다. 봄바람에 날린 복숭아꽃이 삼라만상을 물들였다. 그래서 도원과 기암괴석과 하늘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민정기의 ‘유몽유도원’이 유화물감으로 그린 서양화인데도 마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거친 바위의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잔붓질을 거듭했다. 그 결과 여러 겹의 물감을 칠한 후 맨 윗부분의 물감을 긁어내 감추어둔 바탕색을 드러낸 것 같은 효과를 나타냈다. 그 효과는 마치 동양화의 부벽준(斧劈皴)을 보는 듯하다. 부벽준은 산이나 바위의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도끼로 쪼갠 듯한 단면을 그린 기법이다. 민정기 작가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릴 때 그 배경그림 ‘북한산’을 그려 유명세를 탔다.

민정기가 그린 ‘유몽유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원천으로 하지만 그림의 양식적인 배경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그 모델이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가 안견은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의 제의를 받고 ‘몽유도원도’를 제작했다. 안평대군은 1447년 4월 21일에 안견을 수성궁으로 불러 자신의 꿈 얘기를 하며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수성궁은 인왕산 아래 있던 안평대군의 집으로 산세와 지세가 좋아 최고의 명당 자리로 꼽혔다. 예전에 철거된 옥인아파트 자리가 수성궁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속에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유람하다 마지막에 최항과 신숙주를 만났던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 꿈 얘기를 들은 안견은 사흘 만인 4월 24일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현재는 아쉽게도 일본의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견은 북송(北宋)의 이곽파(李郭派) 화풍을 토대로 ‘몽유도원도’를 제작했는데 기존의 그림과는 다른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당시 두루마리 그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된 것과는 달리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진행된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왼쪽의 낮은 야산이 있는 곳은 현실세계가 있는 반면, 화면 대부분은 환상적인 도원의 세계로 채워져 있다. 그림을 펼치자마자 그림의 ‘하이라이트’인 도원의 세계를 먼저 보여주고자 한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도원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기암괴석을 배치해 현실세계와 다른 공간임을 분명히 했다. 안견은 복숭아밭이 잘 보이도록 야산과 바위산은 정면에서 본 시각으로 그린 반면, 구름이 뒤덮인 복숭아밭은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려 비밀스러운 공간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했다. 부감법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그리는 그림 기법이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를 3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며 시를 짓게 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을 비롯해 신숙주, 김종서, 정인지, 박팽년, 최항, 성삼문 등 23명이 쓴 시가 첨부되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그림이라는 한계를 넘어, 풍류인 안평대군의 ‘네트워크’와 조선 전기의 문화지형도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유명세가 붙은 ‘몽유도원도’를 민정기가 다시 붓을 들어 우리 시대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에는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도 보인다.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장르의 차이점만이 아니다. 민정기의 ‘유몽유도원’에는 텅 비어 있던 도원에 인물을 그려 넣었고, 주택과 도로 등 사람이 사는 현실세계를 ‘굳이’ 끌어들였다. 도원이 사람 사는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후 꿈속에서 본 장소와 비슷한 곳에 정자를 세워 무계정사(武溪精舍)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곳이 바로 부암동이다. 무계정사는 창의문을 넘어가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인왕산 바위의 기운이 강하게 흘러내려온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아지트’를 짓고 바위에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넣은 후 1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었다. 오래지 않아 무계정사는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드는 격조 높은 ‘살롱’이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던 민정기는 ‘유몽유도원’에 부암동이라는 지역의 인문학적인 배경을 넣고자 했다. 도원을 그리면서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천국’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터전을 얘기하겠다는 의지다.

안견. ‘몽유도원’. 1447년. 비단에 연한색. 38.7×106.5㎝. 일본 덴리대 도서관
안견. ‘몽유도원’. 1447년. 비단에 연한색. 38.7×106.5㎝. 일본 덴리대 도서관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에 담긴 의미

불운의 스타 안평대군은 이름이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이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일찍 세상을 떠난 문종은 큰형이고 둘째형이 수양대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서화에 뛰어난 풍류인이었다. 풍류인으로 풍류만을 즐기며 살았더라면 그의 인생이 평온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종이 죽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1452년에 11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몽유도원도’ 덕분인지 무계정사는 문화지식인들의 ‘메카’가 되었고, 당시 조정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던 황보인, 김종서 등 현실정치에서 한가락하는 권력자들이 안평대군의 편에 서서 수양대군과 맞서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안평대군 자신은 정치를 하면서도 은자(隱者)처럼 유유자적하게 살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수양대군이 봤을 때는 시커먼 꿍꿍이가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흔히 도원은 은자들이 선호하는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어떤 사람이 은자일까. 이나미 리츠고(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에서 두 종류의 은자를 소개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속박당하지 않는 생활을 즐기려는 ‘자유지향형 은자’와, 긴급 피난하듯 은둔의 길을 택하여 자신을 다스리려는 ‘금욕형 은자’가 그들이다. 자유지향형 은자는 요(堯) 임금 시절의 허유(許由)와 소부(巢父)가 대표적이고, 금욕형 은자는 은주(殷周) 교체기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유명하다. 그러나 두 부류의 은자들 모두 ‘현실 사회나 정치에 위화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을 떼어놓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상통한다. 도연명 또한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귀거래’한 사람으로 진정한 은자 학파의 계보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황당무계한 내용의 ‘도화원기’를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치의 한 중앙에서 ‘끝발’ 날리던 안평대군이 탈속적인 은자들이나 관심을 가질 법한 도원을 꿈꾸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은자들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그 개념을 위트 있게 가르쳐준 내용이 사마천 ‘사기열전’의 ‘노자 한비 열전’ 중 장자(莊子)의 대답에 들어 있다.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사신을 보내 장자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자 장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어찌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료로 끌려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장자는 잠깐 동안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다. 유자(儒者)들에게 정치참여로 입신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면, 은자들에게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니는 것보다도 못한 ‘하질’에 속했다. 고상한 은자들은 출세를 외면하고 자발적인 ‘루저’로 살았다. 이렇게 유자와 은자는 서로 갈 길이 달랐다.

그런데 최고의 권력을 지향한 안평대군이 도연명 같은 은자들의 터전인 도원을 꿈꾸었다는 게 이상하다. 그는 단지 도화원을 알고 있다는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꿈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현실을 꿈처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린 이유다. 안평대군이 도연명처럼 도원을 갈망한 것이 아니라 도원을 빙자해 자신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퍼포먼스’로 결론 지은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정권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던 수양대군에게 정적이 도화원을 빙자해 세몰이를 하고 있으니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적들을 전부 제거했다. 안평대군도 수양대군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려 작살이 났고, 반역죄로 강화도로 유배된 후 사약을 마셨다. 무계정사도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여러 종류의 ‘도원도’가 제작되었지만 조선 전기의 최고작 ‘몽유도원도’도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었다. 그 금기사항을 오늘 다시 민정기가 들고나왔다.

우리는 이곳에 도원을 만들 수 있을까

6월 6일 현충일에 부암동에 갔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고, 안견과 민정기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낡은 동네였는데 말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바위에 새긴 ‘무계동’이라는 글자는 높은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쳐져 찾을 수 없었다. 개인 소유의 땅이라 들어가 볼 수조차 없었고, 다만 대문 앞에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이 놓여 있었다. 마치 무릉의 어부가 무릉도원을 찾아 다시 가봤지만 그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안평대군이 꿈꾸었고 민정기가 걸어다닌 공간을 어슬렁거리고 있노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저 육중한 대문 너머에는 무릉도원이 있을까. 과연 도원은 어떤 곳인가. 안평대군도 민정기도 이곳 부암동을 도원이라 단언했다. 도원에 갔던 어부도 ‘파라다이스’인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남루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현실세계야말로 도원보다 더 매력적인 곳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도원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과연 이곳에 도원을 만들 수 있을까. 복숭아꽃이 이미 다 져버린 날에 이런저런 생각에 어수선한 하루였다. 어수선한 우리 시대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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