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별 맞춤형 여행’이라고나 할까? 여행지를 선택할 때 나이를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지론이다. 간단히 말해 지력, 체력, 재력, 나아가 시간적 여유를 고려한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체력 면에서 탁월한 2030세대를 보자. 두 발로 국경선을 넘어서는,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같은 여행지가 최적이다. 중국 신장, 아프리카 사막, 남미 정글 같은 곳도 좋다. 한때 유행했던 배낭여행(Backpacker)이 적격이다. 위생과 거리가 먼 음식도 견딜 수 있고, 왕성한 호기심으로 인해 위험도 불사한 직선 행진이다. 40대 말부터 시작되는 ‘베드버그(Bed Bug)’ 민감증도 아직 나타나지 않을 시기다. 코를 골든 불을 켜든, 자리에 눕는 순간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하루 5달러, 16명 거주 기숙사형 숙박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는 몸으로 부딪치는 여행이다. 4050세대는 어떨까. 체력은 떨어지지만, 지력과 재력이란 측면에서 자신이 생기게 된다. 취미로서 음식·와인·패션에 공을 들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서부 유럽이나 미국, 일본으로의 여행이 어울리는 시기다.
60대 이후부터는 어떨까. 정신적으로는 팔팔하겠지만, 체력적 열세를 느끼기 시작하는 연령대다. 그러나 지력, 재력, 시간적 여유라는 면에서는 우세하다.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고 사진찍기로 하루를 보내기보다 스토리텔링에 충실한, 느리지만 머리를 채우는 여행에 어울리는 시기다. 이미 축적된 지식과 세계관에 기초한 ‘확인형’ 여행이 주류다.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시작됐지만, 합스부르크 왕조 순례 같은 테마별 여행이 좋은 예다. 양보다는 질로서의 여행이다.
모든 연령대에 어울리는 여행지
‘세대별 맞춤형 여행’은 여행의 왕도(王道)로서가 아닌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2030세대가 파리·로마 여행에, 60대가 베트남·캄보디아 여행에 나설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여행은 나이와 무관하다. 그러나 젊을 때 체력을 필요로 하는 곳을 멀리할 경우, 나이가 들어 찾아가기 어려워진다. 안전에 관한 부분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치안·음식·소음에 민감해진다. 비위생적인 물 한 잔 때문에 여행 전체가 엉망이 될 수도 있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치안·위생·환경이 열악한 곳의 여행은 젊을 때가 좋다. 교통과 치안이 좋은 곳에서의 문화·역사·문명에 관한 체험은 장년에 어울린다. 100세 장수시대는 보험·연금만이 아닌 ‘세대별 맞춤형 여행’에 대한 노하우도 필요로 한다. 나이에 맞춰 지구 전체를 하나씩 훑어나가는 지혜다.
‘세대별 맞춤형 여행’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은 과연 어느 연령대에 어울리는 곳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세대를 넘어서 모두에게 어울리는 장소로 느껴진다. 이유는 캄보디아에서부터 오스트리아 빈에 이르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세계 전부가 시칠리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족은 물론 60대 이상이 추구할 스토리텔링에 기초한 질적 차원의 여행도 가능하다. 거리의 1인 인형극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공연도 볼 수 있다. 원시적 자연환경에서부터 최고급 문화까지 총망라된 이색공간이다. 호텔비를 예로 들자면, 하룻밤 10유로짜리에서부터 500유로까지 다양하다. 음식비도 마찬가지다. 필자 판단이지만, 지구상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모든 세대에 어울리는 관광지’로 느껴진다.
그동안 틈틈이 시칠리아에 들렀지만 4주간에 걸쳐 장기체류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단기적으로는 부활절 행사 파스카(Pascha) 참관, 장기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 탐사가 가장 큰 목적이다. 시칠리아는 과거의 문명·문화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 아니 인류 역사의 화석이다. 페니키아 등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 카르타고, 로마, 유대, 북아프리카 이슬람, 노르만,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동과 서, 남과 북, 나아가 종교적 차원에서의 이합집산이 이뤄진 멜팅포트(Melting Pot) 교차점이다.
시칠리아는 고대 그리스 신화 곳곳에 등장하는 스토리텔링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지하의 신 ‘하데스(Hades·영어 Pluto)’는 시칠리아와 특별한 연을 갖고 있다. 하데스는 인간이라면 죽은 뒤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고대 그리스판 염라대왕이다. 흥미롭게도 하데스는 돈의 신, 부자의 신이기도 하다. 평생 지하의 보석과 광물에 둘러싸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삶의 환희와 무관한 어두운 지하의 삶이지만, 우주 최고의 부자다. 하데스의 유일한 기쁨은 가끔씩 지상에 올라가 마차를 타고 사방팔방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 즉 여행이다.
자동차 빌려 섬 일주
부인이 된 페르세포네(Persephone)와의 첫 만남도 여행 도중 이뤄졌다. 지하에서 벗어나 지상의 아름다운 곳을 돌아다니던 중 들꽃을 모으던 아름다운 여성을 만난다. 싫다고 뿌리치지만 강제로 납치해서 지하로 끌고 간다. 유럽 박물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조각상, ‘페르세포네 납치(The Rape of Persephone)’는 이 신화의 내용을 묘사한 작품이다. 시칠리아 엔나(Enna)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만나고 납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간조선 제 2557호를 통해 전했지만, 이탈리아 부활절 행사의 명소이기도 하다. 염라대왕의 짝짓기 장소가 바로 시칠리아다.
필자의 지론이지만, 여행의 경우 한 군데 장기체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그 같은 조건은 대도시에 한한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이어진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기 위한 기본자세다. 시칠리아는 어떨까. 대표적인 도시인 팔레르모를 비롯해 카타니아·시라쿠사·라구사 같은 도시에서의 장기체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규모라는 측면에서 볼 때 왜소하다. 시칠리아의 전체인구는 500만명 정도다. 시칠리아 최대도시 팔레르모 인구도 60만명이 고작이다. 중규모 도시 수준인 10만명 이상은 팔레르모를 포함해 전부 4곳에 불과하다. 학술적 연구나 조사는 예외겠지만, 팔레르모조차도 1주일 정도 열심히 돌아다니면 도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곳도 3~4일 정도 머물면 속속들이 알게 된다. 물론 현지인과의 대화는 절대적 요소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한 달 정도면 시칠리아의 윤곽을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자동차는 시칠리아 여행의 필수조건이다. 공공 교통시설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해안선을 따라 철로와 도로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내륙행을 위해서는 자동차가 필요하다. 자동차 렌털의 경우 기름·보험료를 포함해 하루 50유로 정도면 충분하다. 호텔은 아무리 비싸도 하루 50유로 이하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음식은 파스타와 막 잡아 올린 지중해 해산물, 와인을 포함해도 30유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큼지막한 시칠리아 특유의 디저트인 카놀리도 1유로면 충분하다. 필자의 경우 시칠리아 제2의 도시 카타니아에서 자동차를 빌려 시계방향으로 섬 전체를 훑었다. 해안선에 이어진 큰 도시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내륙에 산재한 작은 도시 주변 고대 유적지가 주된 목적지였다.
시칠리아 전체를 통틀어 인상에 남는 고대 유적지 두 곳이 떠오른다. 팔라졸로 아크레이데(Palazzolo Acreide)와 칼타베로타(caltabellotta)로, 관광객과 무관한 곳이다. 둘 다 비교적 오지에 위치해 있다. 아크레이데는 시칠리아 제3의 도시 시라쿠사에서 서쪽으로 45㎞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다. 평야와 산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8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들어서는 순간 바로크 교회들을 만나게 된다. 크기도 하지만 장식이 화려하다. 교회 정면을 입체형 곡면으로 만드는 바로크 양식은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건축 스타일이기도 하다. 시칠리아가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17세기 때 지어진 것으로, 16세기 신대륙 발견 후 얻게 된 엄청난 부가 배경이다. ‘천국으로 가는 보험증서=초대형 바로크 교회’로 이해한 사람들이 당시 스페인 신흥부자들이다. 도시 한가운데 들어선 산 세바스찬(San Sebastiano) 교회를 비롯해 바로크 양식 교회는 전부 7개다. 서울 명동성당 규모의 초대형 교회도 볼 수 있다.